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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4.3항쟁 - 3. 빨갱이란 낙인으로 계속해서 그들을 옥죄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4.3항쟁 - 3. 빨갱이란 낙인으로 계속해서 그들을 옥죄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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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빨갱이란 낙인으로 계속해서 그들을 옥죄다

 

 

큰넓궤에서 생활한 마을주민 120여명 중 상당수는 동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죽었고, 그 중 대다수는 볼레오름으로, 나머지는 미오름으로 갔다.

 

 

  큰넓궤에서 긴 시간을 버티며 살아냈다. 이대로 더 이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방폭포엔 눈물이 흐른다

 

당연히 볼레오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기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발자국을 따라 토벌대가 들이닥쳐 동광리 주민들은 잡히고 만다. 그후 122일에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당한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쫓고 쫓기는 살육전이 계속된 것이다. 다음은 한겨레신문기사를 발췌한 것이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86명 가운데 동광리 주민은 40명으로 알려졌다. 바다와 이어진 정방폭포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파도 너머로 떠밀려갔다. 유족들은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고, ‘헛묘를 동광리 마을 곳곳에 만들었다. 헛묘는 시체를 묻지 않은 묘라는 의미다.

-한겨레신문, 2013.3.30., 13p

 

 

이런 사실을 알고도 정방폭포에 가서 과연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올 수 있을까? 위령제를 지내지는 못할망정, 이젠 차마 사진을 찍으며 희희덕 거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정방폭포에서 한기 때문에 채 3분을 버티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건 그곳에서 죽어간 뭇 원혼들의 억울함이 만든 게 아닐까.

 

 

  60년 전과 지금의 정방폭포 사진, 과연 아름답게만 보이는가?

 

 

 

4.3은 현재진행형

 

이런 살육전을 견뎌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4812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나서 산에서 내려왔지만, 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그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사상검증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적으로 검증만 된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연좌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고한 양민들이었을 뿐이지만, 국가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혔고 그들의 가족까지 연좌제의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니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그저 사는 듯 마는 듯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 진상보고서제주도 경찰, 행정당국이 5만여명의 4.3사건 관련자 가족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며 각종 신원조회의 근거자료로 활용했다고 적혀 있다.

4.3항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채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런데도 국가권력 기관장들은 4.3항쟁의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적도 없었다.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감내하며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대통령도 4.3항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4.3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2006년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위령제에 참석하여 애통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음과 같은 말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최고통수권자의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의 한 맺힌 마음을 위로했을지 느낄 수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죽어도 여한이 없을 그런 말을 공식석상에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 이후 7년이 지났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 다음 대통령은 위령제에 찾아오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공식적인 발언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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