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관이 근무하는 관아에 이름을 새기게 된 것에 대한 기록
간원제명기(諫院題名記)
사마광(司馬光)
迂齋云: “首尾一百六十八字而包括無餘, 識始體, 明職守, 筆力高簡, 如此, 可以想見其人矣.
간관이란 벼슬의 역사
古者諫無官, 自公卿大夫, 至于工商, 無不得諫者.
漢興以來, 始置官. 夫以天下之政, 四海之衆, 得失利病, 萃于一官, 使言之, 其爲任亦重矣.
간관의 자세
居是官者, 當志其大, 捨其細; 先其急, 後其緩, 專利國家, 而不爲身謀. 彼汲汲於名者, 猶汲汲於利也, 其間相去何遠哉?
간관의 임무는 중하기에 두려움으로 임해야 한다
天禧初, 眞宗詔置諫官六員, 責其職事. 慶曆中, 錢君始書其名於版. 光恐久而漫滅, 嘉祐八年, 刻著于石. 後之人將歷指其名, 而議之曰: “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 嗚乎! 可不懼哉?
해석
迂齋云: “首尾一百六十八字而包括無餘,
우재가 말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168자로 포괄함에 남김없어
識始體, 明職守,
정치의 체제를 알고 직분의 분수를 밝혔으며
筆力高簡, 如此,
필력의 고상하고 간결함이 이와 같으니
可以想見其人矣.
기상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다.
간관이란 벼슬의 역사
古者諫無官,
옛날엔 간관(諫官)이란 벼슬이 없었으니,
自公卿大夫, 至于工商, 無不得諫者.
공경대부로부터 장인과 상인에 이르기까지 간할 수 있지 않음이 없었다.
漢興以來, 始置官.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처음으로 간관(諫官)을 설치했다.
夫以天下之政, 四海之衆, 得失利病,
그러자 천하의 정치와 사해의 백성들의 얻음과 잃음, 이로움과 병듦이
萃于一官, 使言之,
하나의 관직에 모여들어 그에게 말하게 하였으니,
其爲任亦重矣.
그 임무됨이 또한 막중했다.
간관의 자세
居是官者, 當志其大, 捨其細;
이 벼슬을 맡은 사람은 마땅히 큰 것을 뜻하고 자잘한 것은 버리며
先其急, 後其緩,
위급한 것을 먼저 하고 늦출 만한 것은 뒤에 하여
專利國家, 而不爲身謀.
오로지 국가에 이득 되게 하고 일신을 위해 도모하진 않았다.
彼汲汲於名者, 猶汲汲於利也,
저 명예에 급급한 사람은 이끗에 급급함과 같으니,
其間相去何遠哉?
그 사이에 서로의 거리가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간관의 임무는 중하기에 두려움으로 임해야 한다
天禧初, 眞宗詔置諫官六員,
천희 초에 진종이 조칙을 내려 간관 6인을 두어
責其職事.
직책을 책임지도록 했다.
慶曆中, 錢君始書其名於版.
경력 연간에 전군이 처음으로 현판에 이름을 썼는데
光恐久而漫滅, 嘉祐八年,
나는 오래되면 사라질 것이 걱정되어 기우 8년에
刻著于石.
돌에 새겨 드러냈다.
後之人將歷指其名, 而議之曰:
그러니 후세의 사람들이 두루 그 이름을 가리켜 평론하여 말들 한다.
“某也忠, 某也詐,
“아무개는 충성스럽고, 아무개는 거짓부렁이며,
某也直, 某也曲.”
아무개는 곧았고, 아무개는 바르지 않다.”
嗚乎! 可不懼哉?
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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