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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북벌의 망상③: 묘청의 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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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북벌의 망상③: 묘청의 난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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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의 망상

 

 

묘청(妙淸)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 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사실 그는 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개경의 리더인 김부식(金富軾)은 즉각 인종에게서 평서원수(平西元帥), 즉 서경을 평정하기 위한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고 토벌군을 조직한다. 맨먼저 그가 한 일은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그랬듯이 개경에 있는 서경의 스파이들을 잡아죽이는 일이다. 묘청이 급작스럽게 거사한 탓에 미처 서경으로 도피하지 못한 정지상(鄭知常)과 백수한은 김부식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만다. 이제 삼성은 일성(一聖)’으로 줄었다.

 

묘청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김부식이 이끄는 성자 토벌군은 서경으로 북상하면서 오히려 주변의 호응을 얻었다. 역시 묘청의 거사는 건국이 아닌 반란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경이 포위되자 묘청의 세력 내부에도 이반이 일어난다. 묘청의 심복이었던 조광(趙匡)이라는 자가 항복해서 자신의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묘청을 비롯한 수뇌부를 살해한 다음 그들의 머리를 관군 진영에 보낸 것이다. 건국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신생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격이다. 그러나 조광의 기대와는 달리 선물을 들려 보낸 그의 사신은 토벌군에게 잡혀 투옥되어 버린다. 뒤늦게 판단미스를 후회한 조광은 그때부터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그래도 1년이 넘도록 항전했으니 아마 수뇌부가 건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11362월 서경이 토벌군에게 함락되면서 사태는 막을 내렸다.

 

대위를 건국하면서 묘청(妙淸)은 칭제건원만이 아니라 북벌까지 주장했다. 이 점에서는, 고려 왕실보다 오히려 묘청이 서경을 중시하고 북방 이민족을 배척하라고 가르친 훈요 10조에 더 충실했던 셈이다. 아울러 그것은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 이념에도 부합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가리켜 조선 역사 1천년 동안 최대의 사건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과연 그럴까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대단히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사건으로 본 듯하다. 그는 이 사건을 낭불양가(郞佛兩家, 낭가郞家란 한반도의 토착 사상을 가리킨다) 대 유학 세력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 진보파 대 보수파의 대결이라고 규정하면서 묘청의 실패를 무척 아쉬워했다. 여기서 민족주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이후 한반도는 기나긴 사대주의의 터널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처음부터 사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반도의 사대주의는 짧게 잡아 648사대주의 원년부터 시작되며, 길게 잡으면 단군 이래, 즉 유사 이래로 지속되어온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대주의 자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한 입장일 것이다? 물론 묘청의 일정에 북벌이 올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어느 정도까지 진실로 볼 수 있을까? 의도가 있고 그 의도를 표방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묘청(妙淸)은 서경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니 북벌을 추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따라서 북벌은 다분히 그의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실은 북벌론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를 억압하는 금나라와 싸우겠다는 자세는 일단 민족적이고 애국적이며 진취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금나라가 동아시아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묘청이 그런 슬로건을 내걸 수 있었을까? 바꿔 말해서 중국의 한족 왕조인 송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다면 그가 그렇듯 자주적인입장을 취할 수 있었을까? 묘청이 북벌의 망상을 품은 데는 필경 송나라(북송)가 멸망하고 동아시아 지역이 오랑캐세상으로 바뀌었다는 현실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묘청의 입장은 결코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하권에서 보겠지만 이런 허망한 북벌론은 17세기에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한 뒤 조선 조정에서도 제기된다).

 

 

대화궁 터의 기와 조각 대화궁은 정전과 사당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의 명칭은 호방하게도 건룡전이었고, 사당은 불교와 도교가 결합된 팔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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