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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북벌의 망상(묘청의 서경천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북벌의 망상(묘청의 서경천도)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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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벌의 망상

 

 

척준경을 탄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자겸(李資謙)이 제기되고 나서 잠시 척준경은 이자겸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했다. 비록 그는 이자겸의 파트너였다는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신발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전력을 문제삼기 어려웠다. 하긴, 인종 스스로가 애초에 그의 과거를 용서하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서 처벌할 수 없다면 쿠데타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언제든 정권이 바뀔 수 있는 나라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을 반쯤 죽여놓고도 치료만 해주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척준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그 용감한 쥐의 이름은 정지상(鄭知常, ?~1135)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시인과 문장가로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위상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그런 그가 자칫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척준경의 탄핵안을 올린 것은 아마 나름대로 정치 이력을 건 승부수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승부수는 통했다. 아직 열여덟 살의 청소년에 불과한 인종으로서는 외척 세력마저 잃은 터에 앓던 이를 빼준 그가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왕의 후의에 힘입어 정지상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고향인 서경에서는 삼성(三聖)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삼성이란 세 성자(聖者)라는 뜻일 테니 나머지 두 명의 성자는 누굴까? 일관(日官, 점술 관원)지금 관점으로 보면 관직에 점술을 맡은 직책이 있다는 게 우습지만, 일관은 제법 요직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경우 일관부라는 관청이 있을 만큼 중요했다가 그나마 고려시대에 들어 위상이 다소 낮아진 것이다. 일관은 천체의 변화를 통해 점을 쳤으므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고대 천문학의 발달에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관상소(觀象所)라는 이름의 관청이 있어 소속 일관들이 점술만이 아니라 기상예보도 담당했다을 맡고 있는 백수한(白壽翰, ?~1135)과 승려인 묘청(妙淸, ?~1135)이 그들이다. 비록 별명은 동등한 성자라도 삼총사의 지휘자는 묘청이다.

 

이들의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정지상(鄭知常)과 묘청은 연배와 위상이 비슷했던 듯하고, 백수한은 묘청을 스승처럼 받드는 위치였던 듯하다(묘청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으니 백수한은 그에게서 배운 것을 자신의 직무에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을 것이다), 정지상(鄭知常)이 백수한을 천거하고, 두 사람이 다시 묘청을 적극적으로 천거함으로써 묘청은 드디어 인종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들 서경 삼총사의 목적은 인종을 움직여 서경으로 천도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개경은 기가 쇠하고 궁궐마저 불탔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마침 이자겸(李資謙)의 반란이 있었던 데다 집도 잃어 개경에 신물이 난 인종은 그들의 설득에 솔깃한 반응을 보인다.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1750년대 초 제작)

 

 

왕의 태도에서 가능성을 읽은 묘청(妙淸)1128년 말에 석 달 동안 토목공사를 벌여 서경의 명당자리에 대화궁을 짓고 천도 준비를 완료했다. 혹한기를 무릅쓴 강행군이라서 백성들의 원성을 좀 샀지만, 어차피 고려의 수도가 서경으로 옮겨 온다면 그 원성은 곧 갈채로 바뀔 터이다. 대내적으로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왕권, 대외적으로는 오랑캐인 금나라에게 사대하는 치욕, 점차 인종의 마음은 그런 사태의 해결책이 천도에 있다는 쪽으로 기운다. 묘청은 지덕(地德)이 강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오늘날 같으면 미신으로 일축해 버리겠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으니 그런 묘청의 주장이 먹혀든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에도 초보적인 형식논리학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과학적 근거와 무관한 풍수지리설이라 해도 자체 근거에 모순이 생기면 유지될 수 없다. 우선 대화궁을 준공했는데도 금나라는 항복하지 않고 천하는 전혀 통일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완공된 대화궁에 벼락마저 떨어지는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종이 대화궁을 보러 서경으로 행차하던 중 폭풍우가 몰아닥쳐 인마가 쓰러져 죽는 천재지변이 잇따른다. 풍수지리를 전공으로 삼은 묘청(妙淸)이 풍수지리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형식논리적인 모순이다.

 

그렇잖아도 천도에 반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개경 귀족들은 찬스를 잡았다. 그들의 리더는 정지상과 학문과 명성에서 필생의 라이벌을 이루며 사사건건 대립하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다김부식(金富軾)정지상(鄭知常)은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정지상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만큼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였으나 불교와 역학, 풍수지리에도 통달한 팔방미인형의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했고 그림에도 능한 천재형의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김부식은 세력 가문인 경주 김씨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학자였다. 아마도 김부식은 정지상을 비정통적인 잡학의 대가라고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에 대해 콤플렉스를 품었음 직하다. 마침 이자겸(李資謙)이 숙청되면서 왕실의 외척 세력이 힘을 잃은 때였으니, 정지상과 김부식(金富軾)이 각각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을 대표하면서 차세대 정치를 이끌 리더로서 대립하기에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던 그들은 오히려 그들을 돕는 풍수지리 현상을 이용해서 일제히 천도를 성토하고 나섰고, 결국 그들의 서슬에 눌린 인종은 천도를 포기하고 만다. 하긴,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그에게 확고부동한 정치적 결단력을 요구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어차피 고려의 국왕은 상징일 뿐 실세는 아니다. 따라서 그 상징을 서경으로 옮길 수 없다면 새로운 상징을 만들면 된다. 이제 서경은 천도의 자리가 아니라 새 도읍의 자리다. 길이 있어 다니는 게 아니라 다니면 길이 된다. 1135년 묘청(妙淸)은 아예 서경에서 딴 살림을 차리기로 결심한다. 개경에서 파견된 서경의 관리들을 잡아가두고 자비령 이북의 길목을 차단한 다음 북부의 전군을 서경으로 불러모으니 제법 나라꼴이 난다. 그렇다면 나라 이름이 없을 수 없다. 묘청은 대위(大爲)라는 국호와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정한다. ‘크게 된다는 국호에 하늘이 열린다는 연호를 정했으니 그의 포부가 얼마나 거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고려 왕조도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이제 대위는 왕국의 수준이 아니라 어엿한 제국이다. 과연 그는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함)을 넘어 자신의 군대를 하늘이 내린 충성스런 군대’, 즉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부르면서 마음껏 호기를 부린다.

 

 

없는 건 국왕뿐 묘청은 서경에 대화궁을 지어놓고 인종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금나라가 저절로 망하리라던 예언도 들어맞지 않은 데다 그의 장기인 풍수지리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평양 부근에 남아 있는 대화궁터인데, 이곳에 궁궐이 서 있었을 때에도 대화궁의 주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묘청(妙淸)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 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사실 그는 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개경의 리더인 김부식(金富軾)은 즉각 인종에게서 평서원수(平西元帥), 즉 서경을 평정하기 위한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고 토벌군을 조직한다. 맨먼저 그가 한 일은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그랬듯이 개경에 있는 서경의 스파이들을 잡아죽이는 일이다. 묘청이 급작스럽게 거사한 탓에 미처 서경으로 도피하지 못한 정지상(鄭知常)과 백수한은 김부식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만다. 이제 삼성은 일성(一聖)’으로 줄었다.

 

묘청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김부식이 이끄는 성자 토벌군은 서경으로 북상하면서 오히려 주변의 호응을 얻었다. 역시 묘청의 거사는 건국이 아닌 반란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경이 포위되자 묘청의 세력 내부에도 이반이 일어난다. 묘청의 심복이었던 조광(趙匡)이라는 자가 항복해서 자신의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묘청을 비롯한 수뇌부를 살해한 다음 그들의 머리를 관군 진영에 보낸 것이다. 건국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신생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격이다. 그러나 조광의 기대와는 달리 선물을 들려 보낸 그의 사신은 토벌군에게 잡혀 투옥되어 버린다. 뒤늦게 판단미스를 후회한 조광은 그때부터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그래도 1년이 넘도록 항전했으니 아마 수뇌부가 건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11362월 서경이 토벌군에게 함락되면서 사태는 막을 내렸다.

 

대위를 건국하면서 묘청(妙淸)은 칭제건원만이 아니라 북벌까지 주장했다. 이 점에서는, 고려 왕실보다 오히려 묘청이 서경을 중시하고 북방 이민족을 배척하라고 가르친 훈요 10조에 더 충실했던 셈이다. 아울러 그것은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 이념에도 부합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가리켜 조선 역사 1천년 동안 최대의 사건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과연 그럴까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대단히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사건으로 본 듯하다. 그는 이 사건을 낭불양가(郞佛兩家, 낭가郞家란 한반도의 토착 사상을 가리킨다) 대 유학 세력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 진보파 대 보수파의 대결이라고 규정하면서 묘청의 실패를 무척 아쉬워했다. 여기서 민족주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이후 한반도는 기나긴 사대주의의 터널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처음부터 사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반도의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짧게 잡아 648사대주의 원년부터 시작되며, 길게 잡으면 단군 이래, 즉 유사 이래로 지속되어온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대주의 자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한 입장일 것이다? 물론 묘청의 일정에 북벌이 올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어느 정도까지 진실로 볼 수 있을까? 의도가 있고 그 의도를 표방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묘청(妙淸)은 서경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니 북벌을 추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따라서 북벌은 다분히 그의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실은 북벌론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를 억압하는 금나라와 싸우겠다는 자세는 일단 민족적이고 애국적이며 진취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금나라가 동아시아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묘청이 그런 슬로건을 내걸 수 있었을까? 바꿔 말해서 중국의 한족 왕조인 송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다면 그가 그렇듯 자주적인입장을 취할 수 있었을까? 묘청이 북벌의 망상을 품은 데는 필경 송나라(북송)가 멸망하고 동아시아 지역이 오랑캐세상으로 바뀌었다는 현실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묘청의 입장은 결코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하권에서 보겠지만 이런 허망한 북벌론은 17세기에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한 뒤 조선 조정에서도 제기된다).

 

 

대화궁 터의 기와 조각 대화궁은 정전과 사당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의 명칭은 호방하게도 건룡전이었고, 사당은 불교와 도교가 결합된 팔성당이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전성기 코리아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북방의 새 주인

국왕의 쿠데타

북벌의 망상

삼국사기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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