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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사대주의 원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사대주의 원년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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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주의 원년

 

 

예나 지금이나 무장은 좋은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 연개소문은 개인적 권력욕만이 아니라 국가적 야망도 지닌 인물이었고 당나라의 총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영웅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라의 경영은 군사적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나라 이전에 집안의 경영에도 실패했다. 665년 그가 죽자마자 그의 세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맏이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당나라에 투항해서 고구려 토벌의 앞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그의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 전적으로 연개소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의 진정한 잘못은 고구려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노선을 잘못 결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는 대중국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보다는 당나라와 타협하면서 전통적인 남진정책으로 복귀했어야 했다. 단지 결과론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비록 이세민과 같은 폭력적 쿠데타로 집권한 탓에 특히 이세민의 미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적극적인 대중국 외교에 나섰더라면 애초에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그 적극적인 외교가 실은 최대한의 저자세일 수밖에 없다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더욱이 중국 귀족들의 의견은 원정 반대였으니 연개소문의 처신에 따라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에게 잃은 영토를 일단 포기하는 아픔이 뒤따라야 했겠지만, 그렇게나마 사직과 국력을 보존했더라면 아마 중국적 질서 아래 고구려는 신라 대신 한반도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어차피 신라의 삼국통일도 중국적 질서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까 다를 바 없다).

 

그 점에서 연개소문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은 바로 김춘추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648년에 그는 직접 중국 외교길에 오른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거절한 직후에 갔어야 했겠지만 당과 고구려 사이의 전쟁으로 6년이나 늦춰진 셈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의 외교는 절묘한 적시타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그에게는 운이 따랐던 모양이다. 좌절과 분노에 가득 찬 당 태종에게 신라의 사신은 상심을 달래줄 애완견이나 다름없었다아닌 게 아니라 바로 몇 개월 전에 온 신라 사신 한질허(邯帙許)에게 당 태종신라는 대조(大朝, )를 섬기면서 왜 연호를 따로 쓰느냐?”고 호통을 친 일이 있다. 더럭 겁이 난 한질허는 법흥왕 때부터 모르고 한 짓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장 고치겠다고 했다. 당 태종으로선 고구려에게 뺨 맞고 신라에게 화풀이한 격이지만 어쨌든 그 대답에 기분이 좋았을 법하다. 결국 신라는 그때부터 두 번 다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초기 잠깐을 제외하고 한반도 왕조들은 항상 중국의 연호를 썼다). 더욱이 사실상 신라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김춘추가 온 것은 그 전까지 국왕이 직접 입조한 경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당 태종에게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한껏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완견이 주인에게 먼저 의사 표시를 할 수는 없다. 당의 수도 장안에 간 김춘추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고 한동안 국자감을 둘러본다든가 강연을 듣는다든가 하며 짐짓 한가로이 지낸다. 이윽고 주인이 개를 불렀고 그제서야 개는 짖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니까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신라는 오래 전부터 천조를 섬겨왔는데, 교활한 백제가 괴롭히고 입조의 길을 막으니 어서 천병(天兵, 당나라 군)을 보내 백제를 멸해주소서.” 주인에게서 그만한 노력을 부탁하려면 아양떠는 것이외에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개는 주인의 모든 것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제 새끼들 중 두 마리를 주인의 곁에 머물게 한다(장남인 김법민金法敏은 왕위계승권자였으므로 신라에 남았고 다른 아들들이 당나라에 남아 관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648(진덕여왕 2)은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사대주의 원년이 되었다. 신라인들은 중국의 의복을 입게 되었고, 100년 동안 써온 독자 연호를 포기하고 중국의 연호와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군사가 어서 빨리 와서 한반도를 평정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세 가지 소원중 첫째는 이듬해인 649년에 이루어졌고 (여자의 경우는 664년부터 중국 복식을 입었다), 둘째는 650년 영휘(永徽)라는 중국 연호를 쓰면서 이루어졌으며, 셋째는 당 태종649년에 죽는 바람에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그래서 태종의 연호인 정관대신 고종의 연호인 영휘가 사용된 것이다) 결국에는 이루어졌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김춘추의 외교를 잘못되었다거나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김춘추는 신라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인 방식, 어쩌면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수단을 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식이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그 무렵에 한반도 왕조와 백성들에게 중국은 분명한 외세로 인식되고 있었다. 비록 실패한 노선이었지만 연개소문이 대중국 강경 자세를 취한 것은 그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신라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진 이래로 백제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늘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당시 신라의 상태가 존망의 위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고 김품석을 성주로 기용한 자신의 정치적 실수를 해소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김춘추의 중국 외교로 이제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가닥이 잡혔다. 중국은 고구려 정벌을 원하고 신라는 백제의 정벌을 원한다. 때마침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 체제에 있으니 전선은 뚜렷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통일, 신라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부의 통일이 목표다. 이렇게 해서 양측의 통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리는 것뿐이다.

 

 

중국 복장의 신라 사신 당나라 장회태자묘에 그려진 각국 사절단의 그림인데, 오른편에서 두 번째 깃털모자를 쓴 사람이 신라 사신이다. 7세기 후반의 벽화니까 사대주의 원년인 648년 이후의 작품이다. 과연 신라 사신은 모자에 깃털을 꽂은 것만 제외하면 중국 관리들(왼쪽의 세 사람)과 전혀 차이가 없는 복장이다. 바로 옆의 서역 사신이 토착 복식을 한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동북아 네 나리의 입장

신라의 성장통

중국의 낙점

새로운 동맹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사대주의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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