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났지만 시차 때문에 피곤했다. 아직도 한국 시간에 맞춰 내 몸이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에 잤고 아침 7시쯤에 일어났으니, 겨우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은 것이다. 그래봐야 여기 시간으론 아직 새벽 4시밖에 되지 않았다(한국시간과 –3시간 차이).
▲ 교육원 창문에서 본 바깥 풍경. 만년설이 있는 천산산맥과 아파트가 보인다.
정신 승리란 없다
7시 30분에 기상하기로 했으니, 한참이나 더 잘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머리를 써가며 시차를 계산하다보니(핸드폰 시계가 한국 시간에 맞춰져 있음), 정신은 말짱해져 있었다. 몸은 피곤한데도 정신의 힘으로 피곤하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으며, 홀로 괴로움을 자처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축구팀 경기를 하는데 우리나라 선수의 기량이 딸릴 때, 해설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별 의문 없이 들었을 그 얘기, 바로 ‘정신승리’라는 이야기다. 실력의 차이는 엄연히 있되 정신의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 무한한 가능성을 극대화하면 실력의 차이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말 속에 담겨 있다. 과연 이 말은 옳은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옳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이 가진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노자老子가 말한 허虛를 무시하는 말임과 동시에 약동하는 생명력을 소비하며 이룩한 성과, 즉 소탐대실小貪大失하게 하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을 비비 꼬았지만 하나하나 풀어보면 별거 없다.
노자의 허 사상
노자는 허를 중시했다. 그건 간단히 말하면, ‘무언가 합격 여부를 가리는 시험을 볼 때, 100% 힘을 모두 써서 합격할 수 있는 사람보다 70% 정도의 힘을 써서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이 더 값지다’라는 것이다. 합격을 했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100% 힘을 모두 쓴 사람은 합격한 후에 기력이 쇠진하여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반면, 70% 힘만 쓴 사람은 30%의 허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창조적인 역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제대로 설 수 없고 크게 걷는 사람은 제대로 가지 못한다.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은 밝지 못하며 스스로 자만하는 사람은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 그 도에 있어서 이런 일은 음식찌꺼기와 군더더기 같은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老子』 24
▲ 直而不肆, 光而不燿. (노자 58). 노자의 시는 반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신선하다.
100%의 힘으로 합격한 사람은 발끝으로 서는 사람企者이며 크게 걷는 사람跨者이다. 한 순간 힘을 다하여 발끝으로 설 수는 있지만, 곧 쥐가 나서 오히려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건 정상적으로 서있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감히 ‘제대로 살려 하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무언가를 이룬 사람은, 그 후에 다가오는 시련에 꼬꾸라질 수밖에 없다. 이미 자신의 힘을 모두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모두 다 쏟아 부어야만 겨우 해낼 수 있는 일을 하며 힘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릇이 비어있어야만 무언가 채워질 수 있듯이, 자신 안에도 다하지 않는 여유가 있을 때 창조적인 역량이 샘솟든, 새로운 가능성이 어리든 할 수 있는 것이다.
▲ 빔은 가능성의 공간이고 여유의 공간이다.
영육이원론을 넘어
노자의 말이 힘의 역량에 관한 동양철학적인 이야기라면,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몸과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서양철학적인 이야기다. 정신이 몸을 이겨야만 평화가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철학의 논리다. 이를 일컬어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이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12절~14절)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영육이원론이 나타난다. 그러나 기실 초기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영육이원론이 기독교에 깊이 틈입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아마 이렇게 변색된 서양 사상이 근대화 이후 한국에도 깊이 파고들면서 ‘정신 승리’와 같이 몸과 정신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언어들이 자연스레 쓰였을 것이다. 정신이 이기려면 몸을 극도로 통제해야만 한다. 이때 몸은 어디까지나 정신을 방해하고 겁박하는 부정적인 기관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리스 사상의 영향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몸과 정신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도 예민해지며, 긴장될수록 몸도 딱딱해지기 때문이다. 그건 곧 몸과 정신이 하나임을 알려주는 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학대해선 안 된다. ‘정신 승리’는 약동하는 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소비하여 일시적으로 얻어낸 승리다. 그래서 짧은 시간, 짧은 기간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자면 그건 곧 ‘패망의 지름길’일 뿐이다. 삶은 지구전遲久戰이라 할 수 있는데, 생명력을 소모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몸에서 맘으로, 맘에서 몸으로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나 또한 정신이 이끄는 관성 때문에 몸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달라졌고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예전에 하던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몸은 몸대로 피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몸이 피곤하다고 느꼈다면, 마음을 내려놓아 몸이 편히 쉴 수 있게 놔두고 원기를 회복한 후 활동하는 게 맞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 시간의 시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여행 자체도 재밌어질 것이다. 몸을 정신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고, 삶을 계획이란 큰 틀에서 놓아주자.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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