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주운 페르시아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파괴와 정복은 무력만으로 가능하지만 건설과 발전은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시리아는 진정한 통일 제국의 자격이 부족했다【사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수천 년 간 문명의 중심은 이집트였다. 만약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의 충돌에서 이집트가 승리하고 그때 오리엔트의 통일을 이루었다면, 문명의 중심은 유럽으로 옮겨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회가 사라지고 군국주의 아시리아가 통일을 이룩한 데서 이미 오리엔트 문명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오로지 정복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이었던 아시리아는 막상 정복이 끝나니 더 이상 제국을 굴려갈 동력이 없었다. 엘람을 정복한 최후의 정복 군주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면서 아시리아는 출발했을 때처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통일을 이룬 지 불과 30년이 채 안 된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는 바빌론과 메디아의 연합 공격으로 불길에 휩싸였다. 공교롭게도 그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적군의 장수들은 바로 아시리아가 키우고 가르친 인물들이었다. 때 이른 군국주의의 한계였던 걸까?
이후 오리엔트 무대는 바빌론과 메디아, 그리고 부활한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리디아의 네 나라가 병립하는 형세를 이룬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문명의 빛은 오리엔트만을 비추지 않는다. 오리엔트는 이제 문명의 중심지가 아니라 한 부분일 따름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전혀 몰랐겠지만, 오히려 문명의 중심은 오리엔트를 떠나 서쪽의 지중해 세계로 서서히 옮겨가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리엔트의 통일은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 게다가 아시리아가 했다면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포스트 아시리아’ 시대의 첫 주자는 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였다(칼데아 왕조가 지배했으므로 칼데아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2대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세기 초반 이집트를 점령해 함무라비 시대 고바빌로니아의 명성을 되찾았다【당시 신바빌로니아의 군주들은 수백 년 전 고바빌로니아의 후예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기원전 12세기 고바빌로니아의 유명한 군주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자신이 존경하는 영웅의 이름을 그대로 따 썼을 것이다. 나라와 시대가 다르고 이름만 같은 두 사람을 1세와 2세로 구분한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다】. 아시리아에 나라를 빼앗긴 헤브라이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때문에 또 수난을 당한다. 기원전 597년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수천 명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그래도 저항운동이 계속되자 이집트 원정에 차질을 빚을까 염려한 네부카드네자르는 11년 뒤 예루살렘을 공격해 도시를 불사르고 또다시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빌론의 유수(幽囚)’다. 이를 계기로 민족적 자각심이 커진 헤브라이인들은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칭하며 유대교의 선민의식을 더욱 키워갔다.
▲ 고대의 메트로폴리탄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사진은 바빌론의 중앙 대로에 서 있던 이슈타르 문이다(이슈타르는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었다). 문을 장식하고 있는 사자, 용, 황소 등 각종 동물의 은 놀랍게도 법랑으로 되어 있다. 문 전체가 하나의 도자기인 셈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성세는 아시리아보다도 더 짧았다. 바빌로니아만이 아니라 셈족 문명권 자체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런 추세를 재촉하듯이, 과거에 오리엔트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히타이트에 이어 다시 한 번 인도 유럽계의 나라가 흥기했다. 바로 엘람이었다.
헤브라이 민족처럼 수천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강대국들에 눌려 지내던 엘람은 페르시아로 명패를 바꾸고 도약을 준비했다. 마침 페르시아에는 시대가 내린 영웅이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29)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엘람을 지배하던 북부의 메디아 왕위를 빼앗아 민족 독립을 이루었다. 곧이어 그는 기원전 547년에 서쪽의 리디아를 정복하고, 8년 뒤에는 바빌로니아마저 정복해 대제국의 기틀을 확립했다.
키루스의 정복 사업을 완성한 이는 고대 오리엔트의 마지막 위대한 군주인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1~기원전 486)였다. 그는 무장 출신이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해 아버지의 위업을 잇는가 했으나 제왕의 풍모를 갖춘 아버지의 선정까지 계승하지는 못했다. 폭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그가 죽자 6개월 동안 제국은 반란과 음모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황제의 친위 대장이던 다리우스는 이때 쿠데타를 성공시켜 제위를 차지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된 다리우스에게 무엇보다 급선무는 신생권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원정해 에게 해 동부의 사모스 섬을 정복한 뒤 동쪽의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이제 페르시아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반석 위에 올랐다. 아시리아에 이어 다시 한 번, 그리고 아시리아보다 더욱 확고한 오리엔트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왜 단명한 통일 제국에 그치고 말았는지 잘 아는 다리우스는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정복이라면 그 방향은 어딜까? 새로운 문명의 빛이 보이는 서쪽이다. 서방 정복을 위해 그는 먼저 동쪽의 인더스 지역을 점령하고 북쪽의 스키타이를 멀리 내쫓아 후방을 다졌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서부 변방으로 가서 기원전 513년에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그리스 반도 북부)를 복속시켰다. 내친 김에 아프리카의 리비아마저 병합해 페르시아는 일찍이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세계 최대,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다【당시 사람들은 세계가 유럽과 소아시아, 이집트, 리비아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므로, 다리우스 시대의 페르시아는 사실상 전 세계를 통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다리우스는 예전의 정복 군주들과 달리 내치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전까지 페르시아는 정복지마다 별도의 왕을 둔 느슨한 연합체였으나, 다리우스는 천하‘를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총독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화한 것에 발 맞추어 행정망과 통신망, 그리고 도로망도 건설했다. 또한 화폐제도와 세금제도를 새로 정비해 ‘천하’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여러모로 볼 때, 정복 제국으로서는 아시리아가 최초지만 제국이라는 명칭에 가장 어울리는 나라는 페르시아가 최초였으며, 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군주 역시 다리우스가 최초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혹은 예측했다 해도 과소평가했겠지만, 다리우스가 소아시아를 넘어 그리스까지 건드린 것은 실책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사실 그들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라고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리스는 문명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오리엔트에 못지않았다. 이때부터 오리엔트의 역사는 그리스의 역사와 맞물리게 된다.
▲ 긴 수염의 병사들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격상시킨 황제 다리우스 1세의 친위대 병사들의 모습이다.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인데, 황제가 제사장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같은 시대 그리스 병사들과는 달리 오리엔트 병사들은 하나같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2부 뿌리① - 개요 (0) | 2022.01.01 |
---|---|
서양사, 1부 씨앗 -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0) | 2022.01.01 |
서양사, 1부 씨앗 -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0) | 2022.01.01 |
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0) | 2022.01.01 |
서양사, 1부 씨앗 - 3장 새로운 판 짜기,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0) | 2022.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