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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3부, 4장 팍스 로마나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3부, 4장 팍스 로마나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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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팍스 로마나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이 뛰어났고, 45년이나 재위할 만큼 건강도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자질보다도 더욱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제정을 이루면서 로마 제국도 평화를 되찾고 번영을 구가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재산이 불어나는 속도는 제국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특히 이집트의 정복으로, 그렇잖아도 로마 최대의 부자인 그는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이렇게 황제를 최대의 부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로마 황제와 비슷한 시기 중국 황제의 차이를 말해준다. 중국 황제는 제국 전체의 주인이었고, 천자라는 칭호처럼 하늘의 아들이었으므로, 부자라는 용어 자체를 쓸 수 없다. 그에 비해 로마 황제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서열 1위 시민이라는 신분이었고, 중국 황제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중국 황제는 정치적 권위와 권력만으로도 제국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로마의 황제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권력을 지니기 위해 늘 개인 재산을 소유해야했다. 오늘날의 용어로 비유하면, 중국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었고, 로마 황제는 제국의 최고 경영자였다.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정복한 지역이므로 황제의 개인 재산이 된 것이다(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계승자라는 신분으로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 밖에 로마 속주들 가운데서도 황제 직속 관할로 편입된 곳에서는 모든 세금이 황제의 몫이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신분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이 점을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원로원이었다제정하에서도 로마 원로원은 사라지지 않고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다. 집정관, 법무관, 정무관, 호민관 등 공화정 시대의 주요 관직들도 마찬가지로 제정시대에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시대에 정치의 주체였던 원로원은 제정 시대에 들어 황제의 통치 도구로 위상이 하락했다.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직도 거의 세습되면서 로마 제국의 고위직 관료를 충원하는 주요 기관이 되었다. 그를 황제로 만들어준 대가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여러 차례 부탁해 국가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얻어내곤 했던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기꺼이 사재를 출연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시절의 상당 기간을 속주들의 순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수많은 로마 병사가 뼈를 묻은 파르티아부터 쳤을 것이다. 시리아까지 간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파르티아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모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판단한 그는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국경을 다지는 데 만족했다.

 

 

그런 아우구스투스가 유일하게 욕심을 낸 지역은 북쪽이었다. 갈리아까지는 이미 로마의 속주였으나 그는 거기서 조금 더 동쪽, 라인 강 너머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만들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인 강이 아닌 엘베 강을 경계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기원전 13년 그는 제위에 오른 뒤 처음으로 원정군을 북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저항은 완강했다. 개전 초기 연승을 거두면서 게르마니아의 삼림지대를 거쳐 엘베 강까지 진군한 로마군은 대장인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죽으면서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

 

그 뒤부터 로마는 계속 북벌을 준비했으나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와 일리리쿰에서의 반란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 9년에는 오히려 라인 강 주둔군이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3개 군단이 전멸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그제야 비로소 제국은 북벌을 포기했다.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는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므로, 만약 당시 로마가 엘베 강 유역까지 손에 넣었다면 프랑스만이 아니라 독일도 라틴 문화권에 속했을지도 모른다(언어적으로도 프랑스어는 라틴어족이지만 독일어는 게르만어족으로 분류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군이 갈리아를 정복하던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군보다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게르만족의 저항이 갈리아인보다 강했던 탓일까? 그보다는 황제의 정복 의지가 카이사르보다 약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로마의 영토는 확정되었다. 로마 제국이 최대 영토에 이르는 시기는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이미 로마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쳐(아울러 브리타니아 섬의 절반까지) 지중해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다로마 영토가 지중해를 한 바퀴 돌게 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주요한 정복들을 정리해보자. 기원전 272년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룬 로마는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서부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에스파냐는 자연히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카르타고 서쪽의 북아프리카도 로마의 영향권에 들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를 정벌하고 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소아시아에서 이집트 동부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했다. 마지막 남은 지중해 세계의 한 곳인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기원전 52년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해 영토 팽창에 한몫 거들었다). 이제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내실 다지기

 

 

약관의 나이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되었고 서른이 채 못 되어 제위에 오른 뒤 45년을 최고 권력자이자 재산가로 살았던 복 많은 사나이 아우구스투스는 14,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꿈인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라는 내용을 유서로 남기고 죽었다.

 

정복이 끝났으니 이제 로마는 어떻게 될까? 원래 로마는 정복이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유년기일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의 로마는 힘도 약했고, 곳곳에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장성했고, 주변의 적들을 모조리 물리쳐 이제부터는 정복이 없어도 제국을 유지할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다.

 

덩치만 크다고 어른이 아니듯이 영토만 넓다고 제국인 것은 아니다. 무늬만 제국이 아니려면 제국 내의 모든 영토에 단일한 행정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은 아우구스투스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로서의 로마는 청년기였어도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유년기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영토가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인구, 특히 로마 본토의 인구는 적다는 점이었다. 우선 사람이 있어야 행정을 하는 무엇을 하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적극적인 인구 증가 정책을 실시했다. 결혼을 장려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것을 아예 법으로 정했다. 독신자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조치였고, 결혼을 해도 자식이 없으면 큰 불이익을 받았다. 반면 자식의 수가 많은 부모에게는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심지어 오늘날 대다수 서구 국가들에서는 폐지된 간통 금지법이 제정된 것도 그 무렵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역점을 둔 또 하나의 개혁은 군대였다. 사실 공화정 시대에 군대는 상비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술라나 폼페이우스 등 군사령관들이 권력에 다가설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로마의 군대가 국민군이라기보다는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위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황제도 사병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제의 사병은 근위대나 친위대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다.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1000명씩의 병력으로 9개 부대의 친위대를 구성한 다음, 본격적인 군대 개혁에 나섰다.

 

 

또 한 명의 황제 신생 제국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신생 황제가 차츰 권력을 안정시켜갈 즈음인 기원전 4년 무렵, 제국의 동쪽 끝에서 또 한 명의 황제가 태어났다. 그는 황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더러운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세속의 황제가 아니라 신성의 황제이니 당연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리스도교의 황제, 이 두 황제는 이후 서양의 중세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된다.

 

 

정복 전쟁이 끝난 이상 군대의 임무도 달라져야 했다. 이제부터 군대는 속주의 치안을 유지하고 국경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이때부터 로마 시에는 군대의 주둔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각 속주에는 속주민들로 충원한 별도의 군대가 창설되었다. 게르마니아 정복에 나섰던 갈리아 군단이 대표적인 예다. 로마 병사들은 봉급도 대폭 인상되었다. 하지만 복무 기간이 무려 16년이었고, 나중에는 20년으로 더 늘어났다.

 

이제 제국으로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중요한 과제로는 하나가 남았다. 바로 제위의 승계 문제다.

 

가족법을 제정해 인구 증가를 꾀한 아우구스투스는 일흔여섯 살까지 살면서도 자기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당연히 후계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쉰 살이 넘으면서 후계 문제에 부심한 그는 점찍어 놓은 후보들이 하나같이 일찍 죽는 바람에 후계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조카 마르켈루스,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전 남편의 아들 드루수스, 친구인 아그리파와 딸인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두 외손자가 모두 창창한 젊은 나이에 죽었다.

 

갓 태어난 로마 제국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제위의 첫 번째 승계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후계자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신도 영 마뜩잖게 여기던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 기원전 42~기원후 37)가 후계자가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마흔다섯 살이나 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선포했다(자신과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로마 황제는 중국 황제만큼 혈연적인 세습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번영의 준비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에 정치적 안정만이 아니라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평화도 가져왔다. 그림은 초기 제국 시대 폼페이 부근의 평화스런 농촌 생활을 그린 벽화다. 염소와 사람 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은 장차 다가올 로마의 평화를 예고하고 있다.

 

 

 초기 황제들

 

 

쉰다섯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는 애초부터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카리스마를 이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가 친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정치를 맡긴 채 나폴리 앞바다의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생선을 잘 관리할 리는 만무하다. 세야누스의 전횡으로 로마 정치는 엉망이 되었으며, 그 욕은 티베리우스가 고스란히 얻어먹었다. 덕분에 황제가 죽자 로마 시민들은 환호를 올렸고, 타키투스(Cornelius Tatitus, 56년경~120년경)를 비롯해 후대의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에 대한 혹평에 열을 올렸다.

 

티베리우스에 뒤이어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Gaius, 12~41)가 잠시 제위를 계승했지만 그는 정신 질환에 걸려 잔혹한 짓을 일삼다가 암살당함으로써 황제가 암살되는 전통의 첫 희생자로 기록되었다(그는 칼리굴라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숙부로서 제위를 이은 클라우디우스(Claudius, 기원전 10~기원후 54) 때에 이르러 비로소 아우구스투스의 전통이 다시 회복된다.

 

다리를 절고 말을 더듬는 장애를 가진 데다 작고 깡마르고 볼품 없는 노인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재를 펼쳤으나 대외적으로는 사뭇 진취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도 포기했던 영토 확장 정책을 재개한 그런 예다. 그는 동쪽으로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흑해 연안까지 영토화했으며,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지금의 모로코 북부와 알제리 중서부에 해당함)를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업적은 브리타니아 정복이다. 카이사르가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브리타니아에 발을 디딘 이후 100년이 넘도록 로마는 브리타니아를 방치해두고 있었다 (40년에 가이우스가 갈리아로 가서 브리타니아 공격을 준비하다가 중단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43년에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을 받은 플라우티우스가 이끄는 4만 명의 로마군은 브리타니아의 여러 부족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면서 템스 강에 이르렀다. 클라우디우스는 직접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독전했다. 황제의 왕림에 사기를 얻은 로마군은 콜체스터까지 밀고 올라가 100년 전처럼 다시 브리타니아 남부를 장악하고 속주를 설치했다. 브리타니아가 로마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아울러 영국의 알려진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도 이때부터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였으나 내치에서 황제의 업적은 눈부셨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많은 도로와 수도, 항만 시설 등을 건설했을 뿐 아니라 행정에 에퀴테스 층을 적극 참여시켜 행정력을 강화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갈리아, 그리스, 에스파냐 등지로 대폭 확대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갈리아와 에스파냐의 로마화는 훨씬 지연되었을 테고, 이후 이 지역이 라틴 문화권으로 통합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보다 어려운 게 제가(齊家)일까? 10여 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제국화를 공고히 다졌던 클라우디우스도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가정 문제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슬하에 아들도 없었지만 더 큰 문제는 아내들이었다.

 

그의 아내 메살리나는 야심이 크고 방탕한 여자였다. 야심과 방탕이 합쳐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녀는 자신의 정부와 손잡고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결국 음모가 탄로나 처형되고 말았으나 클라우디우스의 처복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다음 아내인 아그리피나는 자기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황제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사필귀정일까?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 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려던 아그리피나는 결국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 아들이 바로 악명 높은 네로(Nero, 37~68). 아들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던 아그리피나는 네로에게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기원후 65)세네카는 부자(父子)가 모두 철학자이름을 날렸는데, 네로의 스승이 된 세네카는 아들, 즉 소()세네카다. 그는 인생론과 도덕론에 관한 책을 후대에 남겼지만 황제-제자인 네로에게만은 인생과 도덕을 가르칠 수 없었다. 어린 네로에게는 잠시 그의 가르침이 먹혔으나 이내 네로는 스승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세네카는 반역을 꾀했다가 탄로가 나 자살하고 말았다를 스승으로 붙였다. 그러나 열여섯 살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역대 최연소 황제 네로는 누구의 간섭도 귀찮을 따름이었다. 어머니에 이어 아내까지 살해한 그는 64년 또 하나의 중범죄를 저질렀다.

 

로마 시에 큰 화재가 났을 때 그리스도교도들을 방화범으로 꾸며 탄압한 것이다(당시 그리스도교는 불법이었다). 수백 년 뒤 그리스도교가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그가 알 수 있었을까? 그 때문에 가뜩이나 평판이 좋지 않았던 네로는 이후 수천 년 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에게서 폭군의 대명사로 불렸다. 반면 그가 예술적 재능과 감각이 뛰어났으며, 노래와 하프 연주 솜씨가 탁월한 예술가 황제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폭군 네로 네로 황제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으나 특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것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더욱 나쁜 평점을 받았다. 그림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있는 모자이크화인데,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와 바울을 네로에게 고발하는 장면이다. 시몬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이단으로 불리는 그노시스파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평화와 번영의 준비

 

 

제정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그 기간 중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워낙 길었고 그의 업적이 워낙 화려했던 탓에, 후대의 황제들은 그 빛에 가려 강력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황제라 해도 시민들의 인기를 잃으면 제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네로의 운명은 뻔했다. 다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 운명이 닥쳤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68년 참다못한 군대가 그에게 반항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원로원이 황제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했다. 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전 황제들처럼 살해당하기 전에 자살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네로의 죽음은 다시 로마의 제위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그전까지의 황제들은 카이사르와 클라우디우스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황제의 계보가 끊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위는 다시 처음처럼 힘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네로가 죽은 이듬해인 69년은 무려 황제로 자처하는 인물이 네 명이나 등장한 탓에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린다.

 

원래 대권 후보로 나선 군벌은 세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실각하고 다른 한 명이 나섰기 때문에 네 명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 후보의 세력 근거지는 어디일까? 알기 어렵지 않다. 당시 가장 중요한 속주들이었던 에스파냐, 갈리아, 이집트다. 세 후보는 각자 자기 지역에서 후보 등록을 하고 황제로 자처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 시에서 그들은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 일어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9~79)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플라우티우스와 더불어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친 바 있었으니 로마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의 승리가 다행스런 일이었다. 다만 힘으로 제위를 얻은 전례가 생긴 것은 장차 로마의 앞날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에퀴테스 층의 평범한 가문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는 과연 평민의 후손답게 성실하고 검소한 인물이었다. 최고 부자인 로마 황제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치세 내내 긴축재정을 유지했으며, 황실의 경비도 대폭 감축했다. 가끔씩 이런 황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로마는 일찌감치 재정난에 허덕였을 것이다.

 

 

마사다의 비극 수난의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로마 시대에도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한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자 그들은 사진에 보이는 마사다(지금의 이스라엘 사해 서안) 요새로 가서 2년 동안 저항하다가 끝내 전원 자살했다. 당시 이 천연의 요새에는 거대한 저수조와 곡물창고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은 안정되었어도 변방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중앙 권력이 불안한 것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변방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잇달았다. 갈리아의 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하자 이번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은 바빌론의 유수 이래 또다시 성서에 기록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로마군의 포위 속에서 예루살렘을 139일 동안 사수하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부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2년 동안 항전하다 로마군의 총공격을 앞두고 960명 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이후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져 살았다.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르는데, ‘분산이라는 뜻의 유대어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흩어졌으나 자신들의 신앙과 관습을 늘 유지했다. 그랬기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온갖 박해와 설움을 받기도 했다(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이 선민의식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력히 보존하는 것을 싫어 했으며, 더구나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유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탄압했다). 19세기부터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로 단결했고, 그 성과로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을 세웠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불운은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2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재난을 겪어야 했다(이때까지의 로마 황제들 중 아버지의 제위를 아들이 잇는 정상적인 제위 세습은 티투스가 처음

이다). 화려한 상업 도시 폼페이를 매몰시킨 유명한 베수비우스 화산의 대폭발이 발생했던 것이다.

 

티투스의 동생으로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51~96)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원로원을 약화시키고 전제정치를 확립하려 했다. 전제정치가 공포정치로 바뀐 계기는 88년에 일어난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수많은 귀족을 처형했는데, 결국 그 화살은 그에게로 돌아왔다. 자기 궁전에서 원로원의 하수인에게 암살되고 만 것이다.

 

황제의 혈통은 또다시 단절되었다. 원로원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권력을 쥐게 된 것이지만 제정의 시대에 원로원은 이미 설 자리가 없었다. 전제라도 막으려고 원로원은 의원들 중 원로이자 무난하고 원만한 성품의 노인인 네르바(Marcus Coccelius Nerva, 30~98)를 황제로 앉혔으나, 아무래도 임시변통의 성격이 강했다. 네르바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2년 만에 성실하고 유능한 군인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트라야누스(Marcus lipius Trajanus, 53~117).

 

 

빵장수 부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슬픈 비극이었지만, 798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통째로 매몰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로마인들의 생활상은 훨씬 적어졌을 것이다. 폼페이는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8세기 중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림은 폼페이에 살았던 어느 빵장수 부부의 초상이다.

 

 

 로마의 평화

 

 

네르바의 치세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흔히 ‘5현제(五賢帝) 시대라고 부른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이어 다스렸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유명한 말을 낳은 시대이기도 하다. 그 한복판에 트라야누스가 있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출신인데, 속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속주의 운영과 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다. 그의 치하에 속주들은 로마 본토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속주가 발달해야 제국의 면모가 제대로 선다는 점에서 트라야누스는 진정한 로마 제국을 성립시킨 황제였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속주 경영에만 힘썼다면 로마 시민들은 섭섭했을 것이다. 그는 시민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겼다. 그것은 알리멘타(alimenta)라고 불린 사회복지 프로그램이었다. 이 계획으로 로마의 빈민들과 소년·소녀 가장들은 오늘날 복지국가의 수준에 뒤지지 않는 혜택을 누렸다. 더구나 과도한 사회복지 정책으로 국가 재정이 취약해지는 오늘날 복지국가들의 골치 아픈 문제도 없었다. 국가가 농민들에게 빌려준 토지에 대해 농민들이 내는 이자를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답지 않게 트라야누스는 제국 전체의 경제와 속주들의 재정을 꼼꼼하게 감독하고 통제했다. 속주에는 정기적으로 황제 직속 감사관을 보내 철저한 회계 감사를 실시했다.

 

이렇게 대내적으로 뛰어난 행정관의 면모를 보였는가 하면, 대외적으로는 군인다운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로마 제국은 한동안 끊겼던 정복의 고삐를 다시금 거머쥐었다. 도미티아누스 때부터 로마에 저항한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를 정복한 사실은 유명한 트라야누스의 기둥에 조각으로 상세히 전해진다. 더 큰 군사적 업적은 파르티아 정벌이었다.

 

파르티아라면 일찍이 150년 전 크라수스가 군기를 빼앗기고 전사한 뒤부터 로마가 복수의 칼을 갈던 곳이다. 트라야누스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 페르시아 만까지 적을 밀어냈다(그래도 파르티아는 멸망하지 않았고 3세기 초반에 유럽의 로마가 아니라 아시아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다. 당대 세계 최강 로마를 끊임없이 괴롭힌 로마의 숙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동방 진출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잠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꿈을 꾼 것까지는 좋았으나 트라야누스는 개인의 운명조차 대왕을 따르고 말았다.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소아시아에서 죽은 것이다.

 

황제가 급사했어도 제위 계승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 이유는 양자 상속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황제의 혈통이 자주 끊어지는 것을 보았고, 혈통을 따른다고 해서 늘 현명한 군주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양자 상속제 덕분이 컸다(같은 시기 중국인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로마의 황제들은 아들이 없어 제위 계승에 애를 먹었지만, 중국의 황제들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많아 제위 계승이 혼란스러웠다. 맏아들이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평상시에는 순탄했으나 언제든지 제위를 놓고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런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6세기 말 당 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이나, 15세기 초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즉위한 게 그런 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도 로마의 양자 상속제에 못지 않게 현명한 제위 계승 제도가 출현한 적이 있다. 18세기 초 청의 옹정제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는 제도를 만든다. 미리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고 평소에 점찍어두었던 아들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밀봉해두고 황제가 죽은 뒤 개봉하는 방식이다. 양자 상속제보다는 제한적이지만 혈통과 장자 상속을 크게 중시한 중국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한족 왕조가 아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최대의 영토 트라야누스는 중앙 권력을 안정시킨 뒤 북부의 정복에 나섰다. 이 정복의 과정은 현재 로마에 높이 40미터, 지름 4미터의 거대한 트라야누스 기둥의 벽면에 조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은 그 일부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자랑한다.

 

 

트라야누스의 제위는 그와 동향 사람인 하드리아누스(Pablius Aelius Hadrianus, 76~138)가 이었다. 트라야누스가 행정관의 풍모를 지녔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서민적 풍모에 가까웠다. 그는 군대와 함께할 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먹고 잤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대내 정책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대외적 정책은 정반대로 바꾸었다. 즉 속주의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더 이상의 정복 활동은 하지 않았다(그는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많이 속주를 순방한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였다. 삼킬 수 없는 것은 모조리 버린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파르티아 정벌은 완전히 포기했다. 또한 브리타니아 섬을 전부 손에 넣겠다는 해묵은 꿈도 버렸다. 그는 기존의 브리타니아 속주(지금의 잉글랜드)만을 온전히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와의 경계선에 길이 120킬로미터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당시 브리타니아 남부에서 쫓겨난 켈트족은 북부 칼레도니아와 아일랜드로 이주해 있었다). 이것을 하드리아누스 장성이라 부르는데, 오랜 기간 동안 석재가 다른 건축물에 이용되어 지금은 높이가 1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는 온화한 성품에다 대부호이면서도 근검절약에 힘쓴 황제였으나 다른 4현제에 비해 업적은 다소 처진다. 그러나 23년의 치세 동안 덩치 큰 제국을 무사히 이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선정을 펼쳤다는 이야기다. 전임 황제처럼 안토니누스도 브리타니아에 장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70킬로미터로 더 짧았지만 위치는 10킬로미터나 더 북쪽이었다. 이 안토니누스 장성 덕분에 브리타니아 속주의 영토는 섬의 8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로마는 끝내 섬 전체를 식민지화하지는 못했다. 황제가 죽었을 때 원로원은 그의 높은 덕을 기려 경건(Pius)’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뒤에 붙여주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칭송하며 기념비와 신전을 건축했다.

 

 

영국의 만리장성 트라야누스의 정복 사업은 하드리아누스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브리타니아의 절반을 정복하여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다란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이후 영국의 중세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장성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길이도 훨씬 짧고 높이도 4.5미터로 만리장성의 절반 정도다.

 

 

결과를 놓고 말한다면 안토니누스의 최대 업적은 후계자 선정일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로마의 모든 황제 중 최고로 꼽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가 바로 그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실은 하드리아누스가 이미 마르쿠스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안토니누스에게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황제로서, 명상록(tôn eis heauton diblia)의 지은이로서 유명하지만, 마르쿠스는 사실 걸출한 정복 군주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명상록도 궁전에서 한가로이 명상하면서 쓴 책이 아니라 전쟁터의 막사에서 썼다).

 

파르티아가 다시 변방을 공략하자 아우렐리우스는 즉각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참에 아예 파르티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로마의 손에 멸망하지 않을 운명이었다. 뜻하지 않은 파르티아의 구원군이 온 것이다. 그 구원군은 아주 작았으나 무시무시했다 바로 페스트였다. 앞서 본 페리클레스의 죽음처럼(137쪽 참조) 서양사의 물줄기를 여러 차례 바꾼 페스트는 철군하는 로마군의 몸에 실려 이탈리아까지 퍼졌다(일부 역사가들은 이 페스트가 로마 제국의 쇠퇴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경 북쪽의 중부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이 대거 제국을 침략했다.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였으나 호전적인 아우렐리우스는 오히려 그것을 북벌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로마의 국경을 다시 엘베 강까지로 넓힐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언제나처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전장에서 병사했다. 당시 그의 북벌이 성공했더라면, 로마는 5세기 말에 적어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 세계 팍스 로마나 시대 지중해를 한 바퀴 두른 로마 제국의 영토다. 오늘날 유럽 세계의 원시적 형태를 보는 듯하다. 오늘날의 지명과 같은 곳도 있고 다른 곳도 있는데, 한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서양 문명의 뿌리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로마는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정복의 중단을 유언으로 남겼을 무렵, 이미 로마는 더 이상의 정복이 필요 없는 제국이 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은 밀린 숙제를 해결한 것일 뿐 예전처럼 정복의 절실한 필요성에서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로마는 정복하지 않아도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하나의 예가 라티푼디움이다. 노예 노동으로 경작하던 라티푼디움은 처음 생겨날 때만 해도 정복이 계속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노예는 주로 정복에서 획득한 전쟁 포로들로 충원했기 때문이다. 정복이 줄어듦에 따라 노예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수시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럼 라티푼디움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일했어도, 제국을 이루었어도 여전히 농업 국가였으며(이 점이 그리스와 큰 차이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라티푼디움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 라티푼디움을 존속하게 해준 잇몸은 콜로나투스(colonatus, 소작제)였다. 노예가 줄어들면서 지주들은 콜로누스(colonus,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소작료를 받아먹는 것으로 경영 방식을 전환했다. 이것이 나중에 중세 장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한 가지, 로마 제국에서 중세를 예감하게 해주는 것은 에퀴테스다. 정복을 끝내고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에 가장 필요한 인력은 군대보다 행정 관리였다. 소수의 원로원 귀족들이나 라티푼디움을 경영하는 지주들이 담당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에퀴테스 계층이 관리 인력으로 충원되었다. 제정이 성립하면서 에퀴테스는 공식적으로 제2의 계층임을 인정받았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인 소유인 이집트 속주의 총독으로 에퀴테스를 임명했을 만큼 에퀴테스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황제인 그로서는 정치가 보다는 행정가가 더 필요했을 터이므로 귀족보다 에퀴테스를 더 신임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이 나중에 중세의 주요 신분 가운데 하나인 기사 신분을 이루게 된다.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로마 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라틴 문화권을 형성했다. 지중해는 로마의 앞바다가 되었고(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와 속주들, 그리고 속주와 속주를 잇는 방대한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교통망의 발달은 무역의 증대를 가져왔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지만 속주들은 다양했다. 특히 그리스와 아시아 속주들의 전통적인 무역 활동은 로마 제국이 단일한 문화권을 이룬 덕분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아라비아 대상(隊商) 무역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낙타를 이용해 동방의 물품들을 부지런히 지중해 세계로 실어 날랐다. 특히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료는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신비한 동양의 이미지를 심었다. 이때 향료를 처음 맛본 유럽인들은 1000여 년 뒤에 향료를 찾아 동양으로 활발히 진출하게 된다.

 

로마 세계에는 약 7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수백 개의 민족들을 이루어 살고 있었지만, 그 다양성의 근저에는 제국의 통합성이 흐르고 있었다. 우선 로마어(라틴어)만 알면 로마 세계 어느 곳이든 다닐 수 있었다(문명의 전통이 오랜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가 많이 쓰였지만 그래도 라틴어면 다 통했다). 또한 통화 체계나 법률, 무역 관습도 어디서나 동일했다.

 

단 한 가지, 종교만은 예외였다. 로마의 전통 종교는 어느 속주에도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종교의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제국의 중앙정부 역시 로마의 종교를 굳이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고 대체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탄압을 받은 종교는 드루이드교, 유대교, 그리스도교뿐이었다. 드루이드는 켈트족의 사제를 말하는데, 자연신을 믿는 그들은 사람의 머리를 신에게 바쳤으므로 문명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특유의 배타성 때문에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차 제국의 말기에 그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명맥을 쥐고 흔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틴 문화권의 통일성은 특히 도시의 발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유럽과 아시아 속주의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 이전 시대부터 있었지만, 서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 시대에 창건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일찍부터 로마의 식민시로 출발한 독일의 쾰른을 비롯해 프랑스의 파리 랭스 아비뇽 보르도 스트라스부르, 스위스의 제네바,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콜체스터, 링컨, 요크, 세인트올번스, 에스파냐의 사라고사, 톨레도 코르도바 등 현대 유럽의 많은 주요 도시가 모두 로마 속주의 도시로 출발했다(독일의 도시들이 적은 이유는 게르만족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로마 국경이 엘베 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 사회 체계, 산업, 관습, 문화, 도시 등 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에서 로마는 그리스에 이어 서양 문명의 두 번째 뿌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로 대변되는 뿌리의 성숙기를 지나자마자 로마 제국은 기초공사가 부실한 건물처럼 일거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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