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에 접수된 폴리스 체제
쇠락해가던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힘은 외부에서 닥쳐왔다. 중심이 약해지면 주변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리스의 전성기 때는 오지나 다름없었던 그리스 북부에 새로운 구심점이 생겨났다. 이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앞서 말했듯이,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지 ‘야만인’이라는 의미는 크지 않다)라고 부르던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약화되는 것에 때맞추어 드디어 이곳에서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한복판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oppos, 기원전 382~336)가 있었다.
사실 페르시아 전쟁 때 정작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은 마케도니아였다. 고래 싸움판의 새우처럼,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군의 원정 도상에 있었던 탓에 심하게 유린당했다. 비록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패하고 다시 유럽 원정의 야망을 꾀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가 존속하는 한 언제고 그런 비극과 불명예를 겪을 가능성은 있었다. 귀족 가문들을 통합해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통일 국가로 만든 필리포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페르시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먼 동방 원정을 떠나려면 먼저 후방을 다지는 게 급선무다. 따라서 그리스를 복속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마침 상황도 좋았다. 아테네가 이끌던 당시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감히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따뜻한 남쪽’에 불과했다. 더구나 필리포스는 젊은 시절 테베에 볼모로 잡혀 있었을 당시에 명장 에파미논다스에게서 정치와 군사 전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스 반도의 사정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원전 338년, 드디어 그는 원대한 정복전의 서전에 나섰다.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급박해진 테베와 아테네는 연합군을 편성해 맞섰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손쉽게 그리스를 장악한 필리포스는 코린토스 의회에 각 폴리스의 정치가들을 모아놓고 페르시아를 정복해야만 그리스도, 마케도니아도 살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페르시아 원정을 조직하던 도중 그는 불행히 암살되고 만다. 이리하여 필리포스의 꿈은 자신이 일군 왕국과 함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상속되었다【그는 기원전 337년에 아버지 필리포스가 새 왕비를 얻자 어머니와 국외로 도망쳤다가 필리포스가 죽은 뒤에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는데, 필리포스의 암살에 알렉산드로스 모자가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
겨우 스무 살로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아직도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는 테베와 아테네를 응징했다. 테베는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아테네는 함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명맥만 유지하게 놔두었다. 이렇게 후방을 완전히 다진 다음, 기원전 334년에 그는 드디어 역사적인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벌써 숱한 전투 경험을 쌓은 ‘약관의 백전노장’인 데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정성껏 조련한 군대 조직을 물려받았다(필리포스는 뛰어난 전략가로서 조직적인 군대 편성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그리스 군대에 최초로 장교 계급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리스를 떠날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보병 3만 명, 기병 5000명, 함대 160척이었다. 멀고 긴 페르시아 원정을 감당하기에는 결코 대군이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그리스군은 폴리스들끼리 작은 전투를 벌인 것 이외에는 방어전만 경험했을 뿐 장거리 원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약관’의 혈기는 일단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나서 그다음 일을 구상하면 된다는 패기를 주었고, 아버지 밑에서 기병대를 지휘했던 ‘백전노장’의 경험은 기동력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다.
현실의 진행은 그의 의지를 앞질렀다. 최초의 전투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넌 마케도니아군이 그라니코스 강에 닿았을 때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을 너무도 손쉽게 무찔렀다. 기록에 따르면, 마케도니아군은 34명이 전사한 반면 페르시아군은 무려 2만 명이 넘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대승은 예상치 않은 부수 효과를 가져왔다. 페르시아가 대패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오니아와 프리지아를 관통하며 소아시아를 횡단하는 동안 마케도니아군은 거의 아무런 전투도 치르지 않고 무풍 행진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소아시아의 서쪽 절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그가 이긴 페르시아군은 적의 주력이 아니라 현지 부족과 그리스 용병을 꿰맞춘 임시 군대였을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는 아직 지중해의 해상권을 빼앗지 못해 언제라도 반격을 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333년, 드디어 페르시아의 대군이 원정군을 막아섰다. 다리우스 3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소스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 것이다. 하지만 적의 사기를 잔뜩 올려주고 나서 뒤늦게 정면 대결을 펼친 것은 전보다 더 중대한 패배를 불렀다. 이소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화의를 요청했으나 이미 승세를 확인한 알렉산드로스는 단번에 일축해버렸다. 이제 제해권만 확보한다면 페르시아는 끝장이다.
신중한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제국의 명맥을 끊으러 동쪽으로 행군하지 않고, 군대를 남하시켜 지중해에 면한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페르시아의 물자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중해의 페르시아 함대를 격리시키려는 것이다. 제국이 상처를 핥으며 웅크리고 있는 동안 페니키아와 이집트, 특히 페르시아의 주요 자금 창고인 다마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의 손에 들어갔다. 육군으로 해군을 차단한다는 알렉산드로스의 구도는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하고 육군이 약한 그리스였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으며,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잘 막아내고서도 제국의 정복을 꿈꾸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 두 영웅 페르시아 전쟁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이제 문명의 중심이 오리엔트에서 유럽으로 서진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왼쪽의 폼페이에서 출토된 이 모자이크 벽화는 이소스에서 맞선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을 그리고 있다(가로 폭이 5미터가 넘는 큰 벽화다), 위쪽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를 확대한 부분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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