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의 세계화
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원래 나라를 처음 세운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우리의 조선조 역사에서는 이를 ‘왕자의 난’이라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사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개국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건국자 왕건이 죽고 나서는 그의 배다른 아들들이 각자 자기 어머니의 외척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 다툼을 벌였으며, 조선의 이성계는 살아 있는 동안에 정권 다툼의 와중에 한 아들(이방원)이 두 아들(방석과 방번)과 개국공신(정도전)을 죽이는 비극을 목격했다.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즉위하게 했는가 하면, 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었을 때는 여태후가 집권해 황제를 멋대로 갈아치웠다. 당의 건국자 이연(李淵)이 조선의 이성계와 같은 비극을 당한 것은 앞에서(151쪽 그림 설명) 본 바 있다. 절대 권력자인 건국자가 죽고 새로운 권위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개국 초기 증후군’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다행스런 점은 앞서 말했듯이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즉위한 당의 태종, 조선의 태종, 명의 영락제가 모두 유혈로 집권한 뒤에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태조는 26명에 이르는 아들들을 모두 중앙에서 멀리 내쫓아 변방의 요지를 지키는 번왕(藩王)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방법은 제위 계승 분쟁의 씨앗을 없애는 한편 국경 수비를 도모하고 변방의 반란도 제어한다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 권력이 강할 때만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왕들은 국경 수비를 담당했으므로 언제든 부릴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태조가 죽자 즉각 폭탄이 터졌다. 원래 태자가 일찍 죽은 탓에 주원장(朱元璋)은 손자를 태자로 책봉해두었는데, 일단은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해 그의 구상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죽었으니 건문제의 삼촌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과연 그 삼촌들 중 가장 강력한 연왕(燕王, 연경의 번왕)이 군대를 몰고 난징으로 쳐들어왔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국경 수비대는 강하다. 북쪽으로 먼 연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린 연왕은 이미 인근의 몽골 잔당을 물리쳐 전공이 드높았다. 조카를 손쉽게 제압하고 제위를 차지한 연왕이 바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로 더 잘 알려진 영락제, 즉 성조(成祖, 1360~1424)다【명대부터는 연호를 묘호(廟號)와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 태조의 연호는 홍무(洪武)였으므로 홍무제라도 불린다】.
▲ 위풍당당 영락제 영락제는 한 무제, 당 태종에 버금가는 중국 역사상 걸출한 군주였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신생국인 명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로 명의 황제들은 모두 쭉정이였으므로 그의 치세는 아직 건국 초기였음에도 제국의 최전성기이자 쇠락의 시작이었다.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몽골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것도 있었으나 여기에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뜻도 있었다. 1420년 궁성(지금의 쯔진청紫禁城)이 완성되자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 수도인 금릉(金陵)은 난징(南京)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편의상 베이징과 난징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왔지만 실은 영락제가 처음으로 만든 이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집권한 영락제는 대외 정책에서도 태조와 어긋났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찍이 송 태조 조광윤은 전대(당말오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북방을 포기하면서까지 내적 안정을 꾀했고, 그보다 오래도록 큰 혼란(이민족 왕조)을 겪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도 조광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오히려 북방을 평정하는 것만이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그의 판단은 옳았다. 당시 몽골 초원에는 오이라트(Oyrat Oirat, 瓦剌)족이 강성해지면서 호시탐탐 중국 북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도 지긋지긋한 몽골 치하에 있지 않았던가? It‘s now or never!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영락제는 1410년부터 15년에 걸쳐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섯 차례나 출정한 끝에 마침내 북방을 평정했다. 이제 한동안은 북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역대 한족 제국의 황제로서 직접 고비 사막을 넘은 것은 그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의 한족 제국인 탓에 건국 직후 변방을 다지는 일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북방만큼 걱정할 것은 아니었으나 변방은 남방에도 있었다. 영락제는 먼저 베트남 지역을 복속시켰으나 더 이상 나아가려면 육로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정화(鄭和, 1371~1435년경)에게 군대와 함선을 주고 역사적인 남해 원정을 명했다【정화는 이슬람교도로 일찍부터 영락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환관이었는데, 원래 이슬람교도로 마(馬)씨였다. 무함마드에서 음차한 성일 것이다. 색목인은 이미 몽골 시대에 정부에 중용되었으므로 영락제에게는 어릴 때부터 그 혈통이 친숙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지만 몽골 제국의 유산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 웅장한 궁성 주원장(朱元璋)이 언제까지 강남의 난징을 수도로 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아들 영락제는 연경(베이징)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 쯔진청(紫禁城)을 짓고 수도를 연경으로 옮겼다. 쯔진청(자금성)이라는 이름은 북극성과 그 주변의 별을 가리키는 자휘원(紫微垣)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천자를 북극성에 비유한 고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맥을 따르고 있다.
1405년에 시작된 정화의 원정은 이후 1433년까지 일곱 차례나 진행되었다. 주로 가까운 남중국해 일대를 순회했으나 때로는 멀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까지 가기도 했다. 1차 원정대는 62척의 큰 배와 2만 8700명의 병사들, 의사, 통역관, 목수, 사무원까지 거느렸으니 규모로만 보아도 얼마나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원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더라면 유럽보다 조금 앞서 중국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국책으로 장려되기는 했지만 주로 민간 상인들이 일선에서 뛰었고 무역 활동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 중국의 남해 원정은 전적으로 정부가 기획하고 추진했으며, 새로운 통일 제국 명(明)의 위용을 만방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 때마침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한다는 의도도 있었고, 일설에 따르면 행방불명된 조카 건문제를 찾기 위해 원정대를 파견했다고도 한다. 사실 중국은 유럽 세계처럼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처럼 경쟁적으로 지리상의 발견에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원정의 의도와 외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당시 유럽과 중국은 차이가 컸다.
그래도 원정의 효과는 꽤 컸다. 우선 남방의 여러 나라와 국제 관계(중국 측 말로는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부차적인 목적인 무역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특히 원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보가 강남 지방의 중국인들에게 전해져 이들이 남방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살고 있는 화교(華僑)들은 바로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 남방 원정선 정화의 남방 원정대는 화물선을 개조해 만든 함선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워낙 대규모인 데다, 무력을 앞세운 원정이 아니라 신생국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해외 사절단’의 임무를 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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