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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오고타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오고타이)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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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불세출의 정복 군주 칭기즈 칸이 죽었으니 정복 사업은 끝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사실 그는 역사적 명성에서만 아버지에게 뒤질 뿐 실상은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정복 군주였다. 보통 칭기즈 칸을 대칸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름의 뜻이 위대한 칸이었을 뿐이고, 칭기즈 칸 본인도 대칸이라는 직위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스스로 대칸이라고 자처했으니 그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오고타이는 즉위하자마자 쿠릴타이를 열어 칭기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던 주변 국가, 특히 금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기다린 몽골군은 즉시 중원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오고타이는 곧바로 정복 사업을 재개하지 않고 먼저 국내 정비에 힘썼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카라코룸(지금의 울란바토르 서쪽)을 정해 그곳에 궁성을 짓고 여기에 연결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또 예법과 의식을 만들고 화폐제도와 조세제도를 정비했다. 중국의 여느 왕조였다면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마치고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고타이에게는 즉위할 때의 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는 게 더 중요했다.

 

대내 정비는 대외 정복을 위한 발판이었다. 이 발판을 튼튼히 굳힌 뒤 오고타이는 다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먼저 고려를 복속시키고(고려는 30년 가까이 항쟁하다 1260년에 정복된다), 1234년에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금을 완전히 멸망시켜 아버지의 숙원을 이루었다. 이때 몽골의 요청으로 남송의 군대가 협력했는데, 중국의 역대 한족 왕조들이 즐겨 쓰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몽골이 거꾸로 구사한 격이다. 6장에서 보았듯이, 이 전략은 이후 일본 침략에도 사용되었다.

 

 

정복 군주의 대물림 오고타이 칸이 쿠릴타이에서 대칸에 추대되는 장면이다. 중국 역사에서 뛰어난 군주가 연속되는 경우는 드문데, 칭기즈 칸의 아들 오고타이는 내치를 안정시키고 유럽 정복에 나서는 등 유명세만 떨어질 뿐 아버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을 남겼다.

 

 

금을 정복한 것으로 몽골의 정복 활동은 끝났어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 몽골족을 억압한 여진족을 무너뜨렸으니 더 이상 군대를 앞세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것처럼 칭기즈 칸은 개인적인 집착이나 욕심 때문에 영토를 늘린 게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복 사업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문이 생겼다.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의 세계가 궁금해진 것이다. 서쪽에는 어떤 세계가 있기에 오래전부터 서역과 활발하게 교역했던 걸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중앙아시아까지였던 정복의 목표는 더 서쪽으로 연장되었다.

 

1235년 오고타이는 새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유럽 원정이다. 칭기즈 칸에게 제베가 있었다면 오고타이에게는 바투가 있다. 그는 조카(그의 형 주치의 아들)인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수부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20만 명의 대군으로 유럽 원정군을 편성했다.

 

말을 이용한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성은 대단했다. 이듬해 봄 바투의 원정군은 남러시아의 볼가 강 상류에 있는 킵차크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이어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공국 등을 차례로 공략했다. 그렇게 계속 북진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말머리를 남쪽 후방으로 돌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 근처의 카프카스를 정복했다. 그러고는 다시 서쪽의 키예프로 향했다. 좌충우돌이요 무인지경이었다. 무시무시한 몽골군을 피해 킵차크와 러시아의 왕들이 헝가리 방면으로 도망치자 몽골군은 그들을 추격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동유럽의 관문인 키예프에서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북쪽의 폴란드와 남쪽의 헝가리를 동시에 공격했다. 북군은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손쉽게 함락시킨 뒤 독일 접경 지역의 슐레지엔까지 밀고 들어갔다. 여기서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다. 위기에 처한 유럽 세계를 구하기 위해 슐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가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을 조직해 발슈타트에서 맞선 것이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손가락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군은, 가벼운 무장을 갖추고 한 손으로 능숙하게 말을 몰면서 다른 손으로 가볍고 강력한 활을 다루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 발슈타트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하인리히마저 전사했다. 몽골이 유럽 원정에 나선 지 불과 6년 만의 일이었다.

 

 

유럽의 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수백 년 전 훈족의 아틸라 대왕을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했던 조상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저승사자가 아니라 염라대왕이었다. 유럽의 군대는 단 한 차례도 몽골군을 이기지 못했다. 그림은 몽골군이 유럽의 성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유럽의 그림인 탓에 양측의 복색이 비슷한데, 성 바깥의 병사들이 몽골군이다.

 

 

한편 헝가리로 진입한 남쪽의 몽골군도 헝가리의 반격을 무찌르고 수도 부다페스트를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함락으로 동유럽이 몽골의 손에 들어가자 이제 서유럽마저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이 되었다. 더욱이 당시 유럽 세계는 십자군의 실패로 로마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어 분열 상태에 있는 데다 몽골의 진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몽골군은 서유럽까지 정복할 계획이었는데, 만약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이후 세계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서유럽의 아름다운 성이나 문화재를 구경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몽골군은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까고려를 정복할 때 몽골군은 신라시대에 건립된 고찰인 황룡사와 동양 최대의 목탑인 황룡사탑을 불태워버렸다(지금은 넓은 탑의 터만 황량하게 남아 있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전한다(그 이전의 거란 침략 때 제작한 대장경은 몽골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외적의 침략으로 한 가지 문화유산을 잃고 한 가지 문화유산을 만든 셈이다. 남아 있는 터로 미루어볼 때 높이가 80미터는 되었을 황룡사탑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일본의 35미터짜리 호류지 목탑이 현재 동양 최대의 목탑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서유럽의 구세주는 몽골 제국의 내분이었다. 희대의 정복 군주 오고타이가 사망한 것이다. 칸위의 계승을 둘러싸고 세력 다툼이 일어나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헝가리에서 회군해 1244년 카라코룸에 개선했다(바투는 주치의 아들로 황족이었으므로 후임 칸을 선정하는 문제에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의 황실에서는 몇 년 동안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다가 1251년 바투의 지지를 등에 업은 툴루이의 아들 몽케 칸이 즉위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이 불만을 품고 자기 영지에서 제각기 독립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기동성의 차이 왼쪽은 몽골군의 군장이고, 오른쪽은 유럽군의 군장이다. 몽골 병사는 말을 타고 활만 지닌 경장 차림인 데 비해, 유럽의 병사는 얼굴은 물론 손가락에까지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말의 몸도 쇠로 둘렀다. 자신을 보호하는 데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차림으로는 몽골군의 뛰어난 기동성을 감당할 없었다. 장거리 원정군치고는 비교적 소수였던 몽골군에 대해 유럽인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슈퍼스타의 등장

불세출의 정복 군주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중국식으로 살자

동서 문화의 교류

깨어나라, 한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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