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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불세출의 정복 군주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불세출의 정복 군주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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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세출의 정복 군주

 

12세기 후반까지 몽골은 금의 지배 아래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 초원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통일의 중심은 일찍이 부족들 간의 다툼에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이라는 청년이었다. 테무진은 먼저 자신의 부족인 보르지기드족을 통합한 뒤 케레이트족의 왕칸, 같은 부족의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예상보다 빠르게 테무진이 세력을 키운 데 놀란 왕칸과 자무카가 등을 돌리자 그들도 통일의 적이 되었다. 결국 케레이트족을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키는 것으로 몽골 초원의 주인은 정해졌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몽골족의 부족 연맹 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황제)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 칸(1162~1227)이다칭기즈 칸은 대칸, 즉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다(한자로는 成吉思汗이라 쓰는데, 뜻과는 무관하게 발음만 한자로 옮긴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칸, , 한 등은 왕이나 수장을 뜻하는 말이었다. Khazar(하자르, 카자르), kazakh(카자흐, 카자크), Bach(바흐, 바크) 같은 명칭에서 보듯이 k음과 h음은 원래 서로 통하므로 칸, , 한은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 고대사에서도 부족의 왕이나 수장을 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왕명인 거서간, 마립간의 도 모두 같은 말이다. 나아가 이사금의 이나 단군왕검의 ’, 임금의 도 간과 같은 어원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칭기즈 칸은 그저 몽골 초원의 주인이었을 뿐이며, 기껏해야 장차 금을 대신해 중국 북부를 장악할 군주로만 보였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행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일했는데도 고삐를 늦추기는커녕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우선 그는 몽골의 전통적인 부족 조직과 연합체를 모두 해체하고 천호(千戶), 백호(百戶), 십호(十戶)라는 군사 조직으로 개편했다(이것을 천호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천호와 백호의 책임자인 천호장과 백호장의 자제들로 케시크테이(怯薛)라는 친위대를 편성했다. 이런 식으로 절대 권력을 구축한 점에서 몽골 제국은 부족 연합체를 기반으로 했던 예전의 돌궐이나 위구르 제국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성격이 다르니 활동도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제도를 군대화하고 모든 권력을 대칸에게로 결집시킨 칭기즈 칸은 곧이어 활발한 정복 사업에 나섰다. 그는 먼저 북방의 오이라트와 키르기스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말머리를 서하로 향했다. 서하는 일찍이 북송에서도 조공을 받았던 강국이다(4장 참조). 그러나 칭기즈 칸의 군대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가 수도를 접수할 즈음에 이르자 서하는 즉각 자세를 낮추고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서하는 중국 북서부, 중앙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서하를 제압했다면 당연히 그다음에는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갔어야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211년부터 숙적이던 여진의 금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 따로 없다. 4년 만에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금은 남쪽으로 달아나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내친 김에 아예 여진족의 뿌리를 도려내려 할 때 서쪽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칭기즈 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쪽으로 도망가서 서요(西遼)의 왕위를 빼앗고 그 일대에서 무역을 독점해 떵떵거리며 잘산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1218년 칭기즈 칸은 맹장인 제베를 보내 서요를 멸망시킨다.

 

 

몽골족의 슈퍼스타 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의 세계 제국을 이룩한 칭기즈 칸. 그는 원래 중국 대륙보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당시 성업 중이던 동서 무역을 독점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중원이 천하의 중심이라 여긴 한족 왕조의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비해 훨씬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시야를 가졌던 셈이다.

 

 

사실 칭기즈 칸은 원래부터 서역, 즉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컸다. 금을 공격한 것은 몽골족의 숙원을 이루는 동시에 후방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정작으로 그의 관심은 당시 중국에 미지의 세계인 서역과 교역하려는 데 있었다한족의 역대 중화 제국들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한 이후 대외적인 관심이 오히려 점점 더 퇴보했다. 송으로 갈수록 안방 제국으로 전락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에 비해 북방의 강성한 유목민족들은 고대부터 서역과 교역했고 중화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화 제국들이 안으로 수그러들수록 그들은 바깥으로 향했다. 그 정점이 몽골 제국이다. 몽골은 갑자기 정복 국가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오랜 북방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에 진출해 동서 무역의 요지들을 손에 넣어야 했다.

 

기다리던 칭기즈 칸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보낸 450명의 대상들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에서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219년 그는 직접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의 응징에 나섰다. 호라즘은 무려 40만 대군으로 맞섰지만 용병들이 주축이었다. 충성심이 약한 용병들이 대칸의 명령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용맹한 몽골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고, 호라즘의 왕인 무함마드 샤는 카스피 해까지 도망치다 병사했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토로 거느렸던 대국 호라즘을 정복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1225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정벌을 끝으로 일단 정복 사업을 중단하고 몽골로 귀환했다. 이제 몽골 제국은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동쪽으로 북중국과 만주, 몽골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으니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규모였다. 그러므로 나중에 권력의 승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기 전에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는 일이 시급했다. 몽골의 관습은 막내아들이 재산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막내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주고, 맏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 해 북쪽의 킵차크, 둘째 차가타이에게는 서요가 있는 지역,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를 주었다.

 

이렇게 아들들에게 영토 분봉을 마친 다음 칭기즈 칸은 재차 정복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처음 정복에 나설 때와 사정이 다른 만큼 전략도 달라졌다. 이제는 영토를 확장하는 일보다 기존의 영토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이 필요하다. 몽골의 강역 내에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서하와 금이다. 칭기즈 칸은 먼저 서하를 정벌하기로 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정복을 눈앞에 둔 1227년 그는 예기치 않게 병사하고 말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슈퍼스타의 등장

불세출의 정복 군주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중국식으로 살자

동서 문화의 교류

깨어나라, 한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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