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한 정치가
공자(孔子, BC 551 ~BC 479)의 고민은 매우 컸습니다. 자신을 믿고 하나 둘씩 몰려드는 제자의 수는 늘어만 가는데, 이들의 잠재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뾰족한 방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의 제자들은 공자가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전통적 가르침, 다시 말해 주나라의 예(禮)인 주례(周禮)에 정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공자 당시 예라는 것은 간단한 예의나 예절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기록되어 있는 양공(襄公) 13년 때의 다음 이야기는 공자가 왜 주례를 혼란한 정치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는 원리라고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군자들은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에게 양보하고, 소인들은 농사일에 열중하여 윗사람을 섬겼다. 이 때문에 상ㆍ하 모두가 예를 잘 지켰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멀리 쫓겨났으니, 이것은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君子尙能而讓其下, 小人農力以事其上. 是以上下有禮, 而讒慝黜遠, 由不爭也.
군자상능이양기하, 소인농력이사기상. 시이상하유례, 이참특출원, 유부쟁야.
공자는 바로 이런 예의 정신을 배웠고 이것을 실현하려고 했던 사상가입니다. 그에게 예란 전체 공동체에서 군주와 신하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 행동을 규정하는 원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공자의 예는 기본적으로 조화로운 사회를 달성하려는 정치 원리였다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상·하 모두에게 예가 있게 되었다는 말도 결국 군주와 신하 사이에 다툼이 종식되고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런 측면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공자에게서 예를 배우려고 했다는 것은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 예를 익힌 다음 관료로서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자가 객경(客卿)으로 정치를 담당하게 될 때, 스승과 함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지요.
당시 공자가 살고 있던 노(魯)나라 지역의 정치적 실권은 계손씨(季孫氏)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노나라의 왕이 유명무실했음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공자는 이 상황을 ‘무도(無道)’ 또는 ‘무례(無禮)’라고 규정했습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기 때문에 노나라는 국가로서의 올바른 기능을 전혀 담당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노나라의 무례한 상황은, 공자 본인이 열정적으로 배웠고 또한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던 주례를 매우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주례의 권위자였던 공자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지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례를 다시 한 번 현실 정치 속에서 살려내려던 그의 생각이 백일몽처럼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안영저봉(晏嬰沮封)
경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공자에게 니계(尼谿)의 땅을 떼어주고 중용(重用)하려 하였으나 안영(晏嬰) 등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자 이에 경공도 의심을 품고 결국 등용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마침내 제(齊)나라를 떠나 다시 노(魯)나라로 돌아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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