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사상의 창시자로
마침내 BC 502년, 공산불뇨(公山弗擾)라는 사람이 노나라 실권자인 계손씨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때 공산불뇨는 공자를 초빙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공산불뇨의 반란 행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반란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평생 지켜왔던 예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공자는 예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매번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이 좌절될 때마다. 그가 돌아보았던 것은 바로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와 지금까지 함께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공자는 인간적으로 몹시 미안했겠지요. 우리는 당시 공자의 심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공산불뇨가 자신을 부른 것입니다. 공자는 분명 순간적으로나마 유혹에 빠졌을 것입니다. 공산불뇨의 반란에 참여하면, 자신이 꿈꾸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 아울러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정치에 등용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공자를 극구 만류합니다. 이때 공자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어찌 부질없이 그러겠는가?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동방의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夫召我者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부소아자이기도재? 여유용아자, 오기위동주호.
고민 끝에 공자는 공산불뇨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아니,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의 간청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예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현실적으로 날아가버렸습니다. 예가 실현된 새로운 동방의 주나라를 만들려고 한 그의 정치적 야심도 덧없는 꿈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공자는 현실 정치가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교육자로서 또는 철학자로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뒷사람들에게 남겨줄 준비를 서서히 갖춰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바로 이런 정치적 좌절을 겪었기에 공자는 비로소 유학 사상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해서 예를 현실적인 정치 원리로 복원시켰다면, 아마 우리는 『논어』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논어’가 만들어졌겠지요. 지금 전해오는 『논어』는 공자의 원대한 이상과 정치적 좌절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입니다. 또 이 책은 제자들에게 공자가 전해주려고 했던 유학의 정신에 대한 철학적 기록이기도 합니다. 『논어』를 읽고 외우면서 공자 이후의 모든 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공자의 꿈과 희망을 마치 자신들의 꿈과 희망인 것처럼 익히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공자와는 달리 유학 사상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공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유학 사상이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꿈처럼 머물고 말까요?
▲ 행단예악(杏壇禮樂)
살구나무 강단에서 예와 악을 가르침. 제자를 가르치고 문헌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함. 제자의 숫자가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인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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