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절대왕권의 시작
유럽의 변방에서 새로운 정치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대륙의 중심 프랑스에서는 카페 왕조의 권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앙주를 접수해 프랑스를 강국으로 만든 필리프 2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고 카페 왕조의 세습제를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 조치가 빛을 본 것은 그의 손자 시대였다. 아버지인 루이 8세가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죽자 왕위를 계승한 루이 9세(재위 1226~1270)의 시대에 카페 왕조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카페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 그는 별명도 그럴듯하게 성왕(聖王), 즉 생 루이(saint Louis)였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전성시대라고 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 프리드리히 1세와 2세가 독일을 강국으로 만들었다면, 프랑스에는 필리프 2세와 그 손자인 생 루이가 있었다. 그러나 조손간에 손발이 더 잘 들어맞은 것은 프랑스였다. 둘 다 정복 군주인 독일의 조손에 비해 프랑스의 조손은 자연스런 분업을 이루었으니까. 할아버지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는 대외적 성과를 올렸고, 손자 생 루이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대내적 안정을 취했던 것이다.
외형만 성장한 불안정한 왕국의 내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권의 확립이다. 생 루이는 왕실 내에 법 전문가를 두고 직접 재판소를 운영했다【근대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행정관(왕이나 지방의 수령)이 사법 업무도 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점은 동양과 서양이 마찬가지다(조선 사회에서도 관찰사에서 현감에 이르기까지 행정관이 지방의 행정과 재판을 함께 담당했다). 다만 입법의 권한은 왕이나 고위 귀족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 공화정의 이념을 제시한 존 로크는 입법부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의 권력을 일차로 위임받은 기관이 입법부이고, 입법부의 권력을 위임받은 기관이 행정부라고 규정했다(초기의 의회는 상설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정부에 권력을 위임해야 했다). 공화정이 외부로부터 이식된 우리의 경우에도 1948년 5월 총선을 통해 의회가 먼저 구성되고 여기서 정부조직법이 제정됨으로써 행정부의 구성이 가능했다. 하지만 보통 8월의 정부 수립은 잘 알아도 의회가 먼저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오랜 왕정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정의롭고 현명한 판결이 이름을 떨치자 프랑스 전역에서 지역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항소 사건이 중앙으로 몰렸다. 밀려닥치는 소송 사건들을 소화하기 위해 생 루이는 파리에 아예 항구적인 법정인 고등법원을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의회가 탄생했다면 프랑스에서는 법원이 탄생한 것이다(어찌 보면 옛 로마의 공화정이 브리타니아의 의회로, 로마의 법정이 갈리아의 법원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생 루이의 법적 정의와 균형 감각은 프랑스의 내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외 분야에서도 발휘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황제가 벌이고 있던 패권 다툼, 영국에서 헨리 3세와 귀족들이 맞선 분쟁에도 그는 일일이 개입해 현명한 중재를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이득을 얻어냈다. 가장 큰 이득은 툴루즈, 랑그도크, 프로방스 등의 남프랑스를 획득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종교적 이단이 많았는데, 십자군 시대에는 알비파가 툴루즈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연히 로마 교황으로서는 눈엣가시였으므로 12009년 인도 켄티우스 3세는 프랑스의 귀족들에게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을 명령했다. 곧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었고, 이때부터 이 지역은 또 다른 ‘작은 십자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지루하게 끌어오던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생 루이였다. 그는 툴루즈 백작과 극적인 타협을 이루고 남프랑스 일대를 프랑스 왕국에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생 루이는 이미 깊은 신앙심으로 교황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사태를 쉽게 해결한 데는 교황이 독일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미처 이 지역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던 덕분이 크다). 이로써 로마 시대부터 북프랑스와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던 남프랑스는 처음으로 북프랑스와 한 몸이 되었다. 생 루이가 아니었더라면 이 지역은 오늘날 독립국이 되었거나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 루이는 영국 왕실과의 오랜 갈등도 해결했다. 1259년 영국 왕 헨리 3세와 파리 조약을 맺어 아키텐의 일부인 가스코뉴를 영국령으로 내주는 것과 동시에 헨리 3세에게서 충성의 서약을 받아낸 것이다. 이 성과로 그는 카페 왕조만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 포함해, 즉 프랑스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왕이 되었다.
왕의 업적은 왕권의 강화와 직결된다. 생 루이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둘 다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했다. 맏아들 필리프 3세(재위 1270~1285)는 ‘용담왕’이라는 별명답게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 툴루즈와 푸아투에 국부적으로 남아 있던 영국령을 하나씩 접수했다(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은 가스코뉴만 남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대외 정책을 계승했다면, 그의 동생인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아버지의 대내 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 아버지가 설치한 법원에 이어 그는 근대를 예감케 하는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든다. 그것은 바로 삼부회(三部會, États-Généraux)였다.
‘미남왕’이라는 필리프 4세의 별명은 혹시 그의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말해주는 게 아니었을까? 그는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왕권에 대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 내에서 자신은 황제라고 선언함으로써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비위를 거슬렀다(미우나 고우나 교황은 교황청에서 임명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황제라는 직함을 허용하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영토 확장에 나선 그는 플랑드르【영국 동화 『플랜더스(플랑드르의 영어명)의 개』로 유명한 플랑드르는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에는 독자적인 플랑드르 백국(伯國)이라는 영방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은 상업과 무역, 모직물 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일찍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의 대결은 그 예고편이고, 본편은 14세기에 벌어지는 백년전쟁이다. 특히 영국 왕실의 입장에서는 플랑드르가 더욱 절실히 필요했다. 플랑드르의 양모 수출 관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영국 왕이 사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와 아키텐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싸웠다. 기백은 좋았으나 문제는 돈이었다. 전비가 달리자 그는 화폐를 새로 주조하고(위조화폐라는 설도 있다)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정책으로 재정난을 극복하려 했는데, 그것이 교황과 충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전란의 프로방스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는 로마 속주 프로빈키아에서 나온 명칭이며, 로마 시대부터 중북부 프랑스와는 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따라서 알비파가 준동한 것은 오히려 프랑스가 남프랑스를 합병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이때 합병하지 않았다면 ‘남프랑스’라는 말을 쓸 수도 없겠지만). 그림은 루이 8세가 프로방스를 점령하는 장면이다.
교황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를 다스려야 했다. 비록 십자군 전쟁 이후 많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로마 교황은 서유럽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맞수에게서 한 수 배운 걸까?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모델 의회를 창설한 지 7년 뒤인 1302년에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와 같은 목적과 같은 구성을 지닌 삼부회를 소집했다. 모델 의회처럼 삼부회도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해 소집되었고, 성직자·귀족·도시 대표들의 세 가지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목적과 구성이 같았으니 그 성과도 모델 의회와 다르지 않았다. 삼부회는 필리프 4세의 의도대로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영국과 프랑스에서 초기 의회가 왕권 강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달리 보면 강력한 왕들이기에 그런 제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필리프는 교황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그런데 그가 취한 방법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담한 것이었다. 교황을 납치하는 것이었으니까. 1303년 그는 측근인 노가레를 보내 갈등을 빚고 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납치한 다음 이단자로 몰아 아나니의 교황 별장에 가두었다(아나니는 보니 파키우스의 별장이 있는 곳이자 그의 고향이었으니 교황은 자기 고향, 자기 집에 갇힌 셈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노가레는 교황의 뺨까지 때렸으니 필리프가 교황의 권위를 어떻게 봤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비운의 교황 보니파키우스는 원래 프랑스로 납치될 예정이었으나 시민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 만에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최대의 난적을 제거한 필리프는 프랑스인으로 다음 교황(클레멘스 5세)을 세우고(물론 추기경들의 선출이라는 형식은 유지했다) 1309년에는 교황청마저 프로방스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것이 아비뇽 교황청의 시작이다【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친다면 1000년이 넘도록 교황청은 로마에 있었는데, 이것을 옮겼으니 필리프 4세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루이 9세가 성왕으로 불릴 만큼 신앙심이 깊고 덕이 큰 인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필리프의 성격과 행동은 훨씬 더 파격적이다. 사실 그가 교황 납치극을 시도한 데는 교황의 자극도 한몫했다. 필리프가 삼부회를 소집하자 보니파키우스는 1302년 우남 상크탐이라는 교서를 내려 모든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필리프의 사적ㆍ공적 원한이 얽혀 시작된 아비뇽 교황청은 1377년에 잠시 로마로 복귀했으나 곧 또다시 아비뇽으로 와서 1423년까지 유지된다. 로마 교황청 측에서는 이 시기를 옛 바빌론의 유수(253쪽 참조)에 비유해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른다】.
십자군 전쟁 기간 하늘을 찌를 듯했던 교황권은 땅에 떨어졌고, 영국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왕권은 전에 없이 강력해졌다. 문제는 이제 두 나라가 모두 눈치를 볼 대상이 없 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밀린 숙제를 할 차례다. 플랑드르와 아키텐 문제가 바로 그 숙제다.
▲ 아비뇽 시대 교황청이 설치된 것은 조그만 소도시인 아비뇽이 크게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아비뇽은 종교와 행정에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가 모여들어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은 아비뇽 교황청이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아비뇽 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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