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들의 사정
왕실에서는 절대주의가 성장하고 일반 백성들에게서는 국민 의식이 싹텄다면, 이미 중세 봉건국가의 특성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는 프랑스와 영국에 불과했다. 그럼 이 두 주인공을 제외한 서유럽 세계의 나머지 조연들에서는 중세의 해체가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조연인 독일은 대공위 시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가 새로 들어섰어도 통일은커녕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실제로 당시 독일 지역의 판도에서는 오늘날 통일 국가인 독일의 모습을 전혀 읽어낼 수 없다. 남부인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대는 대체로 황제 직할령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방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으며, 발트 해와 북해에 면한 북부의 도시들은 14세기 중반부터 한자동맹(Hansibund)이라는 동맹 체제를 구축했다. 영방국가들은 서로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영방국가의 제후들은 사실상 독립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를 선출한다거나 공동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는 함께 모여 논의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그 밖에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미 왕위 세습제가 뿌리를 내렸지만, 독일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껍데기와 영방국가 체제라는 알맹이가 어울린 특수한 상황에서 여전히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물론 각 영방국가 내에서는 왕위가 세습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각각의 영방국가는 규모는 작아도 프랑스나 영국 같은 단위의 나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역사를 아우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인데도 은연중에 일국적인 통합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합적인 시각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는 ‘오늘’과 연관 지어 살펴봐야 한다. 오늘날 이 지역은 독일이라는 단일한 나라로 통합되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독일의 역사’가 중요하다. 둘째, 영방국가들은 비록 약하게나마 ‘독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느슨한 울타리로 묶여 있었고, 어느 정도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했다】. 한때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제위를 세습한 것은 다른 나라 같으면 정상적인 일이었겠지만 독일에서는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대공위 시대는 그 점을 분명하게 입증한 셈이다.
물론 제후들도 서열이 있었으므로 모든 제후가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 선출권을 가진 제후들을 선제후(選帝侯)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유력한 영방국가의 제후(세속제후)와 대주교(성직제후) 들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점차 왕권이 강화되는 데 경계심을 품은 선제후들은 독일에서도 황제 선출 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독일은 그 나라들처럼 세습제를 채택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선출제라도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선제후들의 생각이었다.
특히 대공위 시대 이후 특정한 왕조도 없이 이 가문, 저 가문에서 황제가 마구 배출되는 현상은 그들에게 더욱 위기감을 조성했다. 그들은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분열되면 프랑스나 영국에 얕잡아 보일 테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합리적 선출제란 그때까지 관습적으로 인정되어오던 선제후를 법으로 확정하는 것이었다. 1356년 그들은 그런 내용을 합의하고 금인칙서로 제정했다(황금으로 된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플랑드르의 번영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 항로에 숨통이 트이자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더불어 지중해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았다. 그림은 플랑드르의 항구에서 배에 물건을 선적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세가 해체의 조짐을 보이자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한자동맹이라는 기구를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무장까지 갖추었다.
칙서는 선제후의 자격과 특권을 명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선제후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세 명에다 작센 공작, 라인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 등 일곱 명으로 한정되었으며, 황제는 이들이 다수결로 선출하기로 정했다(보헤미아왕은 독립 군주였으므로 황제의 선출에는 참여했으나 제국의 내정을 결정하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또한 선제후들은 자기 영지에서 독립적인 사법권, 징세권, 화폐 주조권 등을 보장받았다.
물론 칙서의 내용은 예전부터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관습과 공식적인 제도는 성격이 크게 다른 법이다. 100년 전 프리드리히 2세가 영방국가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을 때 그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영방국가는 그것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마찬가지로, 선제후 역시 13세기에 생겨났으나 금인칙서를 계기로 공식성을 획득함으로써 지위와 특권이 더욱 공고해졌다. 선제후를 통한 황제 선출 방식이 문서로 추인됨으로써 이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반대로 향하는 독일의 분권화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또 다른 조연인 스칸디나비아의 역사는 독일의 역사와 맞물려 전개된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은 마치 영국과 프랑스처럼 후발주자가 대륙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는 관계에 있었다(엄밀하게 말하면 스칸디나비아가 교류한 것은 독일이라기보다 한자동맹의 도시들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가 본받은 서유럽의 봉건제도 바로 독일의 봉건제였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독일의 특수성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으므로 스칸디나비아는 독일을 모델로 삼았음에도 대륙의 보편적인 봉건제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대륙의 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자 스칸디나비아도 역시 대륙이 앓는 몸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기나긴 전쟁을 준비하던 14세기 초반 덴마크(노르웨이 포함)와 스웨덴에서도 왕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둘 중 먼저 안정을 찾은 것은 덴마크였다. 1340년 발데마르 4세는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오랜만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이런 경우 정작 그 혜택을 보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가 그 주인공이었다. 1353년 겨우 열 살의 나이에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와 결혼한 그녀는 1375년 아버지가 죽자 일단 자신의 어린 아들 올라프에게 덴마크의 왕위를 잇게 한 다음 5년 뒤 남편이 죽자 자신이 직접 노르웨이의 여왕이 되었다【앞서(426~427쪽) 노르웨이가 19세기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는데, 마르그레테가 노르웨이 여왕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비록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그 지배란 서유럽의 봉건 왕조가 으레 그렇듯이 왕들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일 뿐 두 나라가 완전히 한 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마르그레테 이전까지 노르웨이는 종속된 상황에서도 별도의 왕실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와 나라 간에 은 지어져도 어느 한나라로 완전히 통합되지는 않는 게 서구 역사의 특징이다】.
1387년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은 그녀에게 사적인 불행이었지만 동시에 공적인 행운이기도 했다. 상국(上國)인 덴마크의 왕위마저도 그녀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키 걸’ 마르그레테의 행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1389년 왕과 갈등을 벌이던 스웨덴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격이다. 마르그레테는 이것을 기회로 스웨덴 왕 알브레히트를 추방하고 스웨덴마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칸디나비아는 2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 깨어나는 스칸디나비아 중세의 해체는 실상 유럽 문명권의 확대였다. 14세기에 이르러 유럽 문명은 북쪽의 스칸디나비아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사진은 스웨덴의 칼마르 성인데, 이곳에서 스칸디나비아 3국의 원형을 확립한 칼마르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바야흐로 중세 후기를 맞아 서유럽의 각국이 개별 국가의 확립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완전한 통합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애써 이룬 통합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마르그레테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 방식을 생각해냈다(독일의 영방국가 체제가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1397년 그녀는 스웨덴 남부의 항구도시인 칼마르에 세 나라의 귀족들을 불러 모으고, 여기서 언니의 외손자인 에리크를 공동의 왕으로 추대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군주 연합체가 칼마르 동맹이다.
마르그레테의 심정이야 당연히 자신의 친정이자 사실상의 맹주인 덴마크가 동맹을 주도하기를 바랐지만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은 나름대로 불만이었고, 특히 독립국이다가 느닷없이 ‘주권‘을 상실한 스웨덴 귀족들은 더욱 박탈감이 심했다(그럼에도 그들이 칼마르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라이벌인 한자동맹의 도시들이 북해와 발트 해의 무역을 독점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삐걱거린 칼마르 동맹은 1448년 덴마크에 올덴부르크 왕조가 성립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칼마르 동맹은 겨우 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으나 수배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스칸디나비아를 한때나마 재통합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이 통합의 경험으로 이후의 역사에서 북유럽 3국은 지속적인 연대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웨덴의 귀족들이 자립권을 빼앗긴 것에 입이 부었다지만 그들이 그 동쪽의 러시아를 보았다면 칼마르 동맹에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유럽 세계의 또 다른 조연인 러시아는 그 무렵 자립은커녕 막대한 조공을 바치느라 등골이 휠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공이라면 속국이 제국에 바치는 것이다. 제국의 시대가 간 지 오랜데 러시아는 어디에 조공을 바쳤을까?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 이래 제국다운 제국이 없었지만 동양에서는 당시 제국의 시대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조공을 받은 제국은 바로 동양의 몽골 제국이었다.
▲ 정규군과 농민군의 차이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일패도지한 것은 몽골군이 워낙 막강한 탓도 있었지만 군대의 주력이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역할은 기사들이 맡았지만 농민군으로 몽골의 정규군, 그것도 원정대로 선발된 정예군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림은 당시의 오합지졸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13세기 초반 중국 북쪽의 드넓은 초원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몽골은 순식간에 중국 대륙의 금과 송을 정복하고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뛰어난 정복 군주 칭기즈 칸(1162~1227)은 그전까지 간헐적으로 중국 대륙을 정복했던 여느 북방 민족들과 달리 애초부터 중국에 마음이 있지 않았다. 서역(중앙아시아)을 차지해 동서무역을 독점하려는 게 그의 원대한 구상이었던 것이다. 서역 정복을 눈앞에 두고 그가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의 꿈을 실현했으나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자 그 서쪽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1235년 서역보다 더 서쪽, 즉 유럽을 정복하기로 결정한다.
불과 20만 명의 몽골 원정군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삽시간에 러시아 남서부인 킵차크(볼가 강 상류)에 이르렀고, 이어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등 러시아의 주요 공국들을 손쉽게 정복했다. 도망치는 러시아의 왕들은 자연스럽게 몽골군을 러시아의 중심인 키예프로 ‘안내’했고, 키예프마저 무너지자 비잔티움의 발칸을 제외한 동유럽 전역이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1241년 발슈타트 전투에서 슐레지엔과 폴란드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참패하는 것을 본 서유럽의 귀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폴란드가 정복되면 그다음은 독일의 심장부인 작센일 테고, 작센이 무너지면 서유럽 전체가 야만인‘의 세상으로 바뀔 게 뻔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서유럽 세계를 구한 것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이었다. 대칸(황제)이 죽자 칸위 계승에 발언권이 있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가 말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마터면 씨가 마를 뻔한 서유럽의 왕과 귀족 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러시아의 비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은 킵차크에 칸국을 두고 러시아의 공국들을 계속 지배하기로 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몽골의 식민지가 되어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다. 말썽 많은 학급을 휘어잡으려면 반장을 잘 정해야 한다. 몽골은 모스크바 공국으로 반장을 삼고 러시아 지역의 조공을 거두어들였다. 모스크바는 이 반장 역할을 통해 러시아의 중심적 위치로 성장했으니, 이후 서유럽 귀족들의 멸시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서유럽인들은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을 가리켜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타타르란 사실 몽골족이 정복한 부족이었지만 서유럽인들은 몽골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 러시아로 옮겨간 제국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공국을 제국으로 격상시켰고(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 생겨나는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그 자신도 대공에서 황제로 고속 승진했다. 이것이 러시아 차르의 시작이다. 황제가 종교의 수반도 겸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도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이반은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출세한 인물일 것이다. 사진은 이반이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빙해 지은 우스펜스키 성당이다.
러시아가 오랜 몽골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다. 반장이었던 모스크바는 몽골이 몰락하자 그 틈을 타 선생님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1472년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Ivan Ⅲ, 1440~1505)는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해 비잔티움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공에서 졸지에 황제가 되었으니 새 호칭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지은 호칭이 바로 차르(Tzar)였는데, 이것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된다【차르는 고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세기 독일 황제의 호칭이 된다. 카이사르의 독일식 이름은 카이저(Kaiser)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이름은 오늘날 ‘제왕절개 수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제외한다 해도 무려 2000년 이상이나 살아남았다】. 곧이어 1480년에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 로스토프 등 주요 공국들을 통합하고 힘을 키워 마침내 킵차크 칸국을 멸망시키고 오랜 ‘타타르인의 멍에’를 벗었다.
이반 3세의 성공은 모스크바 대주교에게도 커다란 영광을 안겨주었다. 모스크바 교회는 비잔티움 정교회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정교회가 됨으로써 동방교회의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이다【서방교회의 교황에 해당하는 동방교회 수장의 지위는 러시아 황제, 즉 차르가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시작된 동방교회의 전통이다. 오늘날 그 지위는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비잔티움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니, 그보다도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왜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황제가 되었을까?
1261년 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8세는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을 간신히 물리치고 새로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열었다(결국 이 왕조가 제국 최후의 왕조가 된다). 그러나 그 무렵 비잔티움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 반도 정도만을 영토로 지배하고 있었을 뿐, 제국의 옛 영광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때는 제국이 아니라 서유럽의 보통 왕국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처지였다【어쩌면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염두에 두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계속 유지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즉 동로마 제국이 건재한 한 서로마 제국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비잔티움 제국이 12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도 로마 교황은 동방교회에 대한 경쟁심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제국의 시대는 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원래부터 무늬만 제국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도 제국에 필수적인 속국을 거의 잃었으므로 제국의 면모는 없었다. 그렇다면 중세에 동유럽과 서유럽에 하나씩 남아 있던 제국은 모양채를 갖추기 위한 의미에 불과했을까?】. 이 굳이 서유럽 세계와 비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서쪽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언제 제국의 속국이었나 싶게 환골탈태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니까(그러나 이 나라들도 몽골 침략을 겪은 뒤에는 국력이 크게 약화된다).
▲ 쇠퇴하는 제국 동방제국은 전형적인 ‘무늬만의 제국’이었다. 서쪽에서는 중부 유럽을 로마 교회에 빼앗기고 동쪽에서는 강성한 이슬람의 침략에 시달려 제국은 나날이 약화되었다. 지도는 13세기 중반과 14세기 중반의 제국 영토를 비교해 보여준다.
게다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상인들에게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겨 국가 재정이 끊임없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고질적인 권력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나마 소아시아라도 제국의 영토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시리아를 이슬람에 잃은 것은 이미 과거지사,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소아시아만은 유지하던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자 앞에 동방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수사자가 도전해왔다. 바로 튀르크의 오스만 제국이었다. 셀주크튀르크가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서 생겨난 힘의 공백을 틈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튀르크는 1326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바로 코앞에 있는 부르사를 수도로 삼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도전해온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침략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는 생각이었을까? 쇠약해진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으로 오스만 제국은 직접 공략에 나서지 않고 우회 전략을 택했다. 먼저 졸개들을 제압하고 나서 우두머리와 한판 붙겠다는 것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까지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를, 니코폴리스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르나에서 불가리아를 각각 물리쳤다. 이어 비잔티움 제국의 텃밭인 그리스마저 점령하니 이제 비잔티움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오스만 세력이 사방을 포위해올 때 비잔티움 황실에서는 서둘러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는 아비뇽 교황청 시절이었으므로 교황도 제 코가 석 자였다. 비잔티움 황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그것은 300년 전에나 관심을 끌 법한 조건이었다【당시 서유럽에서는 이미 한물간 동서 교회의 통합보다는 그리스도교권이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뇽의 교황은 실권을 잃었고, 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의 와중에다 페스트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지원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설령 여력이 있었다 해도 비잔티움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동서 교회의 분열은 1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다른 종교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 국가의 황제) 메메드 2세(Mchined II, 1432~1481)는 이윽고 비잔티움의 명맥을 끊기로 결심하고 총공격에 나섰다. 수비 측과 공격 측의 병력 비율은 1대 10, 결코 행운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예상대로 콘스탄티노플은 얼마 버티지 못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11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동방정교회에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나 아무래도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것만은 못했을 것이다. 모스크바가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뒤이어 제3의 로마가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울러 오늘날 이스탄불이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도시로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라면, 콘스탄티노플보다는 못해도 한 군데가 더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그라나다가 그곳이다. 14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는 아라곤ㆍ카스티야ㅣ포르투갈의 그리스도교권 세 왕국과 반도 남단 그라나다의 이슬람 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서유럽 중심지에서 일어난 중세 해체의 물결은 이곳에도 점차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성과는 이 지역의 쌍두마차에 해당하는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이었다.
1469년 이베리아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그냥 선남선녀의 결혼식이라면 별일 아니었겠지만 신랑과 신부는 각각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Fernando, 1452~1516)와 이사벨(isabel, 1451~1504)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가 되었고, 다시 5년 뒤 페르난도는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부부였으므로 함께 살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통합을 이루었다【나중에 보겠지만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결혼은 서유럽 여러 왕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딸 후아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을 가서 나중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하게 되며, 또 다른 딸 캐서린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어 영국 국교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로써 국가로서의 에스파냐가 출범했다(그전까지 에스파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부르던 지역 명칭에 불과했다).
새로 탄생한 에스파냐 왕국은 건국 기념행사로 레콘키스타의 마무리를 택했다. 1492년 에스파냐는 마지막으로 남은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800년에 이르는 이베리아의 이슬람 역사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런데 1492년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당시 에스파냐에 연감이 있었다면 ‘올해의 사건’ 1위는 당연히 레콘키스타의 종료였겠지만, 세계사적으로 보면 1위는 따로 있다. 그해 봄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기쁜 나머지 이사벨은 몇 년 전부터 한 선원이 끈질기게 지원을 요청하던 계획을 허가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그 선원은 그해 가을 대서양으로 출발해 70일간 항해한 끝에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였다.
신대륙(서양의 입장에서만 신대륙이지만)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유럽의 중세는 완전히 끝났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전통적 항로인 지중해를 대체하는 대서양 항로를 개발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서유럽의 후발 주자에서 일약 ‘세계화’의 선두 주자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이제 그 과정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먼저 10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서양 문명의 줄기, 중세의 사회와 문화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 무너지는 콘스탄티노플 오스만튀르크의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고 있다. 1100여 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천연의 항구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마침내 장구한 역사를 뒤로하고 이교도의 손에 함락되었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어 이름도 오늘날과 같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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