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가져온 상처
전장이 프랑스였던 만큼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 기간 동안 고용한 용병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은 탓에 이들이 도적 떼로 변하면서 피해가 더욱 극심했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영국 역시 피해가 컸다. 우선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 위기를 맞았을 뿐 아니라 도버 해협 연안의 칼레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전부 잃었다(이것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령에 관한 두 나라 간의 분쟁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경제적으로는 피해가 막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계기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용병의 폐해를 막기 위해 참전 기사들을 위주로 상비군을 편성했는데, 영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왕을 중심으로 영주들이 뭉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샤를 7세 자신은 유약한 성품이었으나 그가 닦아놓은 기반을 밑천으로 삼아 이후 프랑스에 강력한 군주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장차 15세기에 절대주의가 성립하는 밑거름이 된다【사실 샤를 7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휴전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호전적인 영국의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1415년에 프랑스를 무찌르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당시 프랑스 왕자였던 샤를 7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그 대신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해 낳은 아들(헨리 6세)에게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의 공동 왕위를 잇게 한다는 것이었다. 1422년에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따라 죽으면서 영국 왕실에서 갓난아기인 헨리 6세를 공동 왕으로 삼으려 하자 프랑스 왕실에서는 반발했다. 이에 따라 부르고뉴 측은 영국과 결탁하고 오를레앙 측은 샤를 7세를 앞세워 백년전쟁의 후반전을 재개한 것이다(따라서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샤를이 즉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후 부르고뉴 문제는 프랑스가 영토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과제로 삼게 된다(2권, 112~114쪽 참조)】.
영국에서는 한 차례의 진통이 더 필요했다. 오랜 전쟁은 영국의 귀족들에게 서열화를 가져왔다(봉건적 전통이 약한 영국에서는 원래 대륙에서처럼 귀족들의 서열이 별로 없었다). 전쟁 시기 프랑스에서 용병이 주로 활약했다면,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사병 조직을 동원해 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중소 귀족들은 점차 대귀족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는 중에 이미 대귀족들의 발언권은 왕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왕위 계승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력은 이미 전쟁 중에 발휘되었다. 사실 1396년에 휴전이 이루어진 것은 양측이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양측의 왕실이 격심한 권력 다툼에 시달린 탓도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그는 형인 흑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귀족들을 무시하고 전제정치를 일삼다가 1399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이것으로 중세 영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플랜태저넷 왕조는 단절되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해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한 번 왕통이 구겨졌으니 누구라도 왕위를 노릴 것은 당연하다. 특히 에드워드 3세의 말 아들로 전공이 드높았던 흑태자의 후손들이 이룬 요크 가문은 억울함이 더했다. 흑태자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들이 영국의 왕가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1455년 랭커스터 가문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고, 6년 뒤에는 드디어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자기 가문의 에드워드 4세를 즉위시켜 요크 왕조를 열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권력을 빼앗긴 랭커스터 가문이 가만 있을 리 없다.
▲ 구세주를 얻은 샤를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맞이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아래 ‘la pucelle(처녀)’이라고 표기된 인물이 잔 다르크다. 여기서는 아직 몰랐겠지만, 나중에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샤를은 거의 잃었던 프랑스 왕위를 되찾게 되니, 샤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두 가문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여 년 동안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데, 둘 다 장미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으므로 이것을 장미전쟁이라고 부른다(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은 흰 장미였다). 이는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겨룬 것이라는 점에서는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국의 왕권이 그만큼 ‘먹음직스런 실세’로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가 승자가 되든 강력한 왕권을 누릴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승자는 랭커스터도, 요크도 아니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 3세는 형이 죽자 조카인 에드워드 5세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조카 형제를 런던탑에 가두어 죽였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 있었던 원판을 능가하는 ‘영국판 수양대군’이었다(1455년에 조선의 수양대군도 열네 살의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았다). 수양대군 세조는 10년 이상 재위하며 치적을 쌓아 그런대로 명예를 만회했지만 리처드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1485년 비정한 숙부는 조카들의 피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랭커스터 가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 헨리 튜더(Henry Tudor)에게 패하고 죽은 것이다. 죽은 에드워드 4세는 아들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그에게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동생(리처드 3세)을 죽인 범인이라고 비난해야 할까?
다소 지루하게 전개된 장미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오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모계만 랭커스터 가문이고 아버지는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였다. 헨리는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해 양가의 통합을 꾀했으나, 성씨가 바뀌었으니 왕조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헨리 7세부터 영국 왕조는 튜더 왕조(1485~1603)로 바뀌게 된다. 예상대로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크게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절대왕권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영국 절대주의의 시작이다.
이렇게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을 통해 왕권 강화라는 소득을 얻었지만, 전리품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두 나라의 국민 의식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백년전쟁은 양국의 봉건 영주들 간의 싸움이었으나, 워낙 오래 지속된 탓에 일반 국민들에게까지도 근대적 애국심이 자라났다. 특히 영국은 선진국 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를 벌인 덕분에 대륙에 대한 열등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백년전쟁은 신흥 세력인 영국과 전통의 강호 프랑스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다.
백년전쟁은 내내 파괴와 방화, 약탈을 일삼는 소모전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의 확고한 지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부분의 전쟁이 승리한 국가에조차 ‘상처뿐인 영광’을 가져왔다면 이 경우는 ‘영광뿐인 상처’랄까?
▲ 왕비의 야심 헨리 6세의 왕비 마거릿이 솔즈베리 백작에게서 책을 선물로 받는 장면이다. 남편이 정신병에 걸리는 바람에 요크 가문에서 섭정을 맡게 되자 마거릿은 불만을 드러냈다. 그뒤 아들을 낳은 그녀가 섭정을 바꾸면서 요크 가문을 자극한 게 장미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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