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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과 중심의 대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7장 해체되는 중세, 변방과 중심의 대결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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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과 중심의 대결

 

 

프랑스와 영국의 분쟁은 사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이민족이 왕실의 주인이 되었으니 애초부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에 앙주 왕조가 들어선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키운 격이었다. 앙주 가문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륙 영토의 소유권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이 앙주의 것인가, 아니면 앙주의 프랑스 영토가 영국의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정복한 것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되찾은 것이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빼앗긴 것이었다. 일단 생 루이의 조정안으로 분쟁이 표면화되는 것은 넘겼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왕들은 가스코뉴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넘겨준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영국의 왕들은 그들대로 영국령이 가스코뉴만으로 국한된 데 대해 불만을 품었다. 파리 조약이 유효한 시기에도 양측의 대립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플랑드르의 주도권 다툼이라든가, 대공위 시대 독일 제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신경전이 그것이다. 이렇게 뿌리 깊은 문제는 결국 전쟁의 형태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발사되지 않듯이 전운이 감돈다고 해서 곧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근원은 영토 문제에 있었으나 방아쇠는 엉뚱한 곳에서 당겨졌다.

 

로마 교황마저 휘하에 거느린 일세의 효웅 필리프 4세는 불행히도 자손 복이 없었다. 세 아들이 모두 차례로 왕위에 올랐는데 자손 복이 없다니? 하지만 그의 세 아들, 루이 10, 필리프 5, 샤를 4세는 다 합쳐도 재위 기간이 14년에 불과한 데다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300년이 넘도록 존속해온 카페 왕조는 1328년 샤를 4세가 죽으면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프랑스의 귀족들이 새 왕조의 창건자로 선출한 인물은 샤를의 사촌형이자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였다. 그는 발루아(Valois) 백작이었으므로 이때부터의 프랑스 왕가를 발루아 왕조(1328~1589)라고 부른다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에서도 사촌이 왕위를 계승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는 아예 다른 성씨가 들어서지 않는 한 왕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반드시 직계가 아니더라도 왕가의 혈통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 반면 서유럽 봉건 왕조들은 동양식 왕조와는 달리 혈통에 못지않게 통치 지역을 중시했다. 필리프 6세는 카페 왕조의 혈통이지만 발루아의 봉건 귀족이었으므로 카페 왕조의 계승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동양식 승계에서 혈통과 친족의 개념이 훨씬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왕조 교체는 당연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죽었어도 딸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딸 이사벨라는 영국 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고 아들도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당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였다. 게르만법에 따라 딸은 왕이 될 수 없으므로 이사벨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위를 욕심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필리프 6세에 못지 않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영국의 왕이 프랑스의 왕위를 노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당시 영국 왕은 발루아 백작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봉건 영주 신분이었으니까).

 

사실 프랑스의 귀족들은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에드워드 3세를 제외한 것이었다(봉건 지배층에게서 국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까?). 에드워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 6세가 즉위한 이듬해에 충성 서약을 강요하자 에드워드는 일단 분노를 꾹 참고 명령에 따랐다. 신분이야 아무렴 어때, 실익이 중요하지. 그는 이런 심정이었지만, 머잖아 그 실익마저 문제가 될 것은 뻔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서열상으로만 에드워드를 굴복시키는 데 만족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양측의 충돌은 차츰 가시화되었다. 1330년부터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과연 필리프는 즉각 스코틀랜드의 지원에 나섰다.

 

이래저래 참을 수 없게 된 에드워드는 양측의 쟁탈지인 플랑드르로 건너가 프랑스의 왕을 자칭했다(마침 플랑드르 백작은 노동자와 수공업자 들이 부자 상인들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독일, 네덜란드의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해 공동전선을 펼쳤다. 이 노골적인 반역 행위에 필리프는 특단의 조치로 맞섰다. 마지막 남은 영국령인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전쟁이 100년이 넘도록 질질 끌어 후대에 백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1337년 필리프가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에드워드는 그를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라고 부르면서 이해부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1339년에는 플랑드르에서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고, 해상에서는 양측 함선들이 수시로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한 것은 1340년이었다. 따라서 1337, 1339, 1340년을 모두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잡을 수 있다.

 

 

전쟁을 통한 해결 14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은 가스코뉴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한 사건이지만, 분쟁의 씨앗은 200년 전 영국에 앙주 왕조가 성립할 때 생겨났다. 앙주 가문의 프랑스 내 영토는 원래 서프랑스 전역이었으나 12세기 이후 계속 줄어들어 가스코뉴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결국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의 방식을 택했다. 그런 점에서 백년전쟁은 전쟁을 통해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근대적 방식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백년전쟁은 1452년까지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지만, 실제로 이 기간 동안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고 상당 기간의 공식 휴전도 있었다. 그러나 싸움터는 줄곧 프랑스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 규모에서나 인구에서나 생활수준에서나 영국은 프랑스에 미치지 못했다(1328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호구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1300~1700만 정도로 추산되며, 영국은 약 35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실력으로 하는 승부, 막상 군사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고 무기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영국이 앞서는 형편이었다. 특히 영국이 자랑하는 무기는 긴 활이었다. 게다가 관료제가 발달하고 왕권이 느슨한 프랑스에 비해 영국에는 후발국 특유의 응집력이 있었다.

 

도버 해협에서 몇 차례 해상전을 벌이던 양국은 1346년 크레시에서 대규모 지상전으로 맞섰다. 여기서 영국은 탁월한 전술에다 긴 활이 큰 위력을 발휘한 덕분에 병력에서 우세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점을 올린 영국군은 이후 프랑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노르망디에서 아키텐에 이르는 프랑스 서부 영토를 거의 점령했다. 특히 검은 갑옷을 즐겨 입어 흑태자(Black Prince)라는 별명으로 불린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 에드워드는 프랑스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유린했다. 심지어 1356년 프랑스는 흑태자에게 왕까지 납치되는 수모를 겪었다(당시 프랑스의 왕은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였는데, 이로써 흑태자는 30년 전 필리프에게 굴복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

 

이후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며 양국 모두 국내 문제에 힘을 쓰다가 1396년에는 정식으로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유는 1347년부터 유럽 전역에 번져간 페스트 때문이었다. 형세가 불리했던 프랑스는 전염병의 덕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페스트는 서구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조연쯤은 된다. 중요한 갈림길, 특히 전쟁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왔는가 하면, 2세기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을 쇠퇴기에 접어들게 만드는 데도 일조했으며, 십자군도 괴롭혔다. 특히 백년전쟁 중에 퍼진 14세기의 페스트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서, 1347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후 1350년 북유럽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묘하게도 유럽에 퍼진 페스트는 모두 아시아에서 유입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그리스, 로마, 십자군의 경우는 모두 아시아의 군대에서 전염되었고 14세기의 페스트는 지중해 상인들을 거쳐 이탈리아로 전염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무섭고 불결한 곳으로 여긴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시아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 페스트균이 유럽에서 위력을 발휘한 이유는 사실 중세 유럽의 도시들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었던 탓이 더 크다(한 예로, 아시아와 달리 유럽에서는 인분을 거름으로 쓰지 않고 도시 외곽에 쌓아두었으므로 전염병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1415년에 재개된 후반전도 역시 영국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흑태자가 전반전의 영웅이었다면, 후반전의 최우수 선수는 프랑스의 처녀 장군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경~1431)였다. 후반전 초반 영국은 거세게 프랑스를 몰아붙여 거의 항복을 받아낼 즈음까지 이르렀으나, 1429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극적으로 격파하면서 전세를 반전시켰다. 오를레앙은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이곳을 함락시키면 전쟁 초반부터 점령하고 있던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연결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로서는 이곳을 빼앗기면 루아르 강 유역으로부터 훨씬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오를레앙 공방전은 전쟁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운명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지만, 이 전설은 오를레앙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이 사기를 회복하고 역전하게 된 탓에 이후 생겨난 이야기일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승리한 잔 다르크는 그녀의 공로를 시샘한 프랑스 귀족들과 영국 측의 공작으로 1431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만다. 그녀의 종교적 지위는 20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녀로 추서함으로써 500년 만에 복권되었다. 프랑스의 역전은 그 무렵부터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한 대포의 덕택이 컸다. 이후 프랑스군은 1437년에 파리를 탈환했고, 계속해서 영국 점령 하에 있던 성과 도시를 하나씩 수복하면서 1452년에는 마침내 가스코뉴를 손에 넣어 기적 같은 역전극을 엮어냈다.

 

 

죽음의 전염병 흑사병이라고도 부르는 페스트는 유럽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여러 차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페스트는 항상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지는 식이었는데, 이는 유럽의 도시들이 아시아의 그것들보다 불결했던 탓이 크다. 그림은 페스트로 죽은 시신들을 매장하는 장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변방: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

중심: 절대왕권의 시작

변방과 중심의 대결

영광을 가져온 상처

조연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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