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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대학과 학문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대학과 학문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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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과 학문

 

 

탁발수도회는 중세 사람들에게 심신의 위안을 주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선물을 주었다. 바로 학문의 발달에 수도사들이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종교계의 재야였던 만큼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의 두 수도회는 종교의 개혁에만 공헌한 게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보나벤투라,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오컴 등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였으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중세 최대의 석학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년경~1274)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다. 사실 탁발수도회가 대학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대학은 수도원에서 창설했고, 당시의 학문이란 곧 신학이었으니까.

 

중세의 대학은 동직조합, 즉 길드(guild)에서 출발했다. 길드는 원래 수공업자들이 결성한 직업적 단체였다. 그 길드에서 내용을 빼고 형식만을 취해 수공업자를 교사와 학생으로 대체하면 대학이 된다. 즉 대학은 교사와 학생 간, 교사들 간, 학생들 간에 결성된 일종의 교육 조합으로 출발했던 것이다universitymaster 등 오늘날 대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길드에서 비롯된 게 많이 남아 있다. 또한 art라는 단어가 예술, 학문, 기술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게 된 것도 길드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지금도 같은 용어를 쓰지만, 당시 문학 학사는 bachelor of arts(BA)였고, 문학 석사는 master of arts(MA)였다. 그리고 수학, 천문학, 음악 등 오늘날 순수 학문에 해당하는 교양과목은 liberal arts라고 불렀다. 이 말은 지금 인문학을 뜻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실용성과 거리가 있는 학문, 기술(art)답지 않은 학문,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을 정부에서 설치하고 운영했지만, 서양 역사에서 대학은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설립한 게 아니라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알려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비롯해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등은 모두 당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자생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 곧 대학이었으므로 사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디냐라든가, ‘옥스퍼드 대학이 정확히 언제 생겨났는가하는 따위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점은 탄생 시기와 목적이 처음부터 분명한 동양의 대학(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과 구분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고대의 대학에 해당하는 국학과 태학, 고려와 조선의 국자감과 성균관 등은 모두 국가가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에 해당하며, 따라서 국가가 학교의 운영과 교육 내용까지도 일일이 정했고, 등록금과 학비도 물론 무료였다. 그러나 서양 중세의 대학은 교사와 학생 서로 간의 필요에 의해 설립된 사립대학이며, 교육 과정과 내용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했다(심지어 대학을 설립할 때 군주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관이 주도한 동양 사회와 민간이 주도한 서양 사회의 차이는 대학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대학의 수가 증가하자 대학의 종류도 늘었다. 개중에는 교육의 필요성 때문에 생겨났으나 고등교육기관에 걸맞은 시설을 갖추지는 못한 대학들도 생겨났다.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라면 무엇보다 학교 건물이다. 재정이 없거나 소규모로 운영되는 대학의 경우에는 따로 건물을 마련하지 않고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숙사 대학인 칼리지(college)인데, 13세기에 생긴 파리의 소르본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이 부설한 머턴 칼리지가 대표적이다(원래 칼리지는 학생들의 숙박 시설에서 연유했으나 오늘날에는 단과대학이라는 의미로 변경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체계적인 학문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자 갓 생겨난 대학은 순식간에 서유럽 여러 지역으로 널리 퍼졌다. 15세기까지 독일, 에스파냐, 포르투갈, 북유럽 등지에 일제히 대학이 탄생하면서 서유럽의 대학은 약 80개로 증가했다(그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대학이 인기를 끌자 군주나 도시 자치정부 들도 대학을 설립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들은 대학을 관료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간주하고 앞다투어 설립했다(이것들은 탄생에서나 목적에서나 관 주도의 동양식 대학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학의 발달을 군주들보다 더 반긴 것은 로마 교황청이었다. 대학에서 가장 중시한 과목은 바로 신학이었으니까.

 

사실 대학이 생기기 이전부터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나름대로 교육기관을 운영해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스콜라(schola)라고 불렀다스콜라에서 스쿨(school, 학교)이라는 말이 나왔다. 스콜라는 원래 샤를마뉴가 제국 곳곳에 세운 신학원의 교수를 뜻하는 ‘doctores scholastici’에서 비롯되었다. 샤를마뉴가 중세의 건설자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스콜라에서는 당연히 신학 연구를 전문적으로 했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자 중심이었으며, 오늘날에 그런 역할을 차지하는 철학은 당시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었다(고대 그리스에 철학이 이미 탄생하지 않았다면 중세에는 철학이라는 이름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콜라에서 이루어진 중세 신학, 곧 중세 철학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의 원류, 그러니까 중세 초반의 철학은 교부(敎父)철학이었다. 교부철학은 로마 시대인 2~3세기에 생겨난 신학이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연혁이 짧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면 그리스 철학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플라톤 철학을 원용해 교부철학을 완성했다(교부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이바지한 로마 말기에서 중세 초기의 신학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교부의 저작은 성서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졌다).

 

완성은 곧 정체를 낳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성을 이룬 이후로 철학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이 시기는 로마 문명과 게르만 문명이 합쳐 새로운 중세의 그리스도교 문명을 이루어가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종교회의가 모든 철학적 논의를 대신했다. 어찌 보면 철학의 후퇴일 수도 있지만, 신학이 곧 철학이라고 본다면 철학의 발전이 반드시 정체되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의 대학생들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학은 중세 후기 수도회 운동의 소산으로 생겨났으므로 대학생들의 옷차림도 수도사 복장이다. 대학이 점차 발달하면서 교과 과정도 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다가 실로 오랜만에 11세기 말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영국의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신학상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문을 열었다. 그의 고민은 인간 이성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였다. 사실 이것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쉽게 말하면 신을 무조건 믿을 것이냐, 알고 믿을 것이냐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을 이성의 차원에서 논하는 자세였으니 당대의 주교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안셀무스만큼 아우구스티누스에 통달하고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안셀무스는 자신이 던진 난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해 보여주었다. 그의 결론은 신앙이 지식보다 먼저이며 신앙을 깊게 하기 위해 지식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교부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론이었으나 안셀무스의 생각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결론은 결국 신앙으로 회귀했지만, 이제 신앙을 말하는 데도 이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새삼 부각된 것이다.

 

이렇게 종교를 이성으로,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스콜라 철학의 자세는 곧이어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12세기 초에 제기된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의 대립인데, 흔히 보편논쟁이라고 불린다. 실재론은 실체나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책상의 실체, 삼각형의 실체가 개별 책상이나 삼각형과 별도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유명론은 실체라는 것은 이름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논쟁이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내세웠던 이데아 개념을 둘러싼 논쟁과 닮은 게 아니던가? 세상 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이데아다. 플라톤 철학은 이런 내용이었다. 이것을 인정하면 실재론이고 부정하면 유명론이다.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렇게 그의 철학적 쟁점이 200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새로 제기된다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의 문제를 달리 해결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문제가 제기된 양태가 닮은 꼴이라면 답을 내는 과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은 누가 맡았을까?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바탕으로 교부철학을 완성한 이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것은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였다. 그리스도교권처럼 학문적 배타성이 없었던 이슬람 세계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편견 없이 풍부하게 연구되었다. 특히 신학과 친화력이 있는 플라톤의 사상에 비해 과학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이슬람 신학과 별로 상충하지 않았다. 이 연구 성과가 에스파냐를 거쳐 서유럽에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신학자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는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보편논쟁을 해결했다. 그의 결론은,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만 개별적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며, 개별자는 보편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무라는 실체가 존재해야만 내 집 마당의 감나무가 존재할 수 있지만, 나무의 실체는 별도로 존재한다기보다 바로 내 집 마당의 감나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론과 유명론의 절묘한 절충인데, 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와 형상의 관계(154쪽 참조)를 연장하고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었다면 서양 철학이 가능했을까?

 

 

이렇게 전개된 스콜라 철학의 성과들을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다앞서(146쪽의 주)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와 중국에서 각각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의 뿌리가 형성되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아퀴나스가 등장한 시기도 마치 우연이 아닌 것처럼 동양 사상의 발전 시기와 겹친다. 아퀴나스보다 약간 앞서는 시기에 중국 송나라(남송)에서는 주희(朱熹, 朱子, 1130~1200)가 그때까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사서(四書)를 유학의 기본 교과서로 확정했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교 철학의 새로운 단계를 이룬 인물로 평가되듯이, 주희 역시 유학이 발생한 이래 최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서양의 대표 사상인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대표 사상인 유학이 거의 동시에 재무장을 이룬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방대한 저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ne)은 교부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나아가 이슬람 철학과 유대 철학까지 총동원해 그때까지의 신학적·철학적 논의를 문제 제기와 쟁점 토론의 형식으로 총정리하고 있다. 토론 형식을 취한 것은 그가 당시 태동하던 대학(파리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토마스의 사상도 다분히 절충적이다. 그전까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도 쟁점에 포함된다. 그는 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갔는데, 모든 것을 통합해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가 앞섰으니 아무래도 약간의 억지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자연의 진리(과학)와 초자연의 진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아직 신의 경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다.

 

종교를 근간으로 삼은 해결책이지만 어쨌든 토마스의 노력 덕분에 세속 학문의 길이 열렸다. 토마스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신학으로, 자연에 관한 학문을 자연신학으로 분류했는데, 자연신학이 곧 신학에서 벗어난 학문의 영역이다. 이로써 중세 내내 신성의 영역에 완전히 짓눌려 있던 세속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이성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곧이어 닥쳐올 인간 이성의 해방, 르네상스를 예고한다. 하지만 토마스의 시대에는 이미 세속 군주들이 교회의 품을 떠나고 있었으니, 사상이 현실을 이끌었는지 현실이 사상의 변화를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유럽의 주희 공교롭게도 13세기는 기원전 5세기에 이어 또 한 차례 동양과 서양에서 함께 학문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중국에서 주희가 유학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했다면, 유럽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림은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에 있는 작품인데, 한가운데 높이 앉은 인물이 아퀴나스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세계의 중심은 교회

대학과 학문

중세 경제를 돌린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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