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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

건방진방랑자 2022. 1. 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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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

 

 

중세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교회다. 그만큼 중세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지대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학문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모든 영역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자적인 사법권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조직이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000년간 전개된 중세의 역사는 분권화를 향한 끊임없는 흐름이었다. 제국이라는 지역적 중심은 사라졌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가 잠시 제국 체제를 부활시키려 하나 곧 실패했고, 동유럽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계속 존재하나 전성기인 11세기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사실상 왕국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에서 어떻게든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으려 한 로마 교황의 노력으로 10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했지만, 이 기묘한 이름만의 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제국 체제를 지닌 적이 없었다(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이 제국의 간판마저 내리게 되는 것은 훨씬 이후인 19세기 초의 일이다).

 

이처럼 분권화를 향하는 시대의 추세에 서유럽의 지역적 정체성과 통합성을 유지해준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교회의 힘이었다. 봉건 영주들이 서로 다투고 분열할 때도 그들의 장원에 있는 교회의 주교들은 한통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영주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세력이 막강한 영주는 자기 지역의 교회를 장악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 중세 전체를 통틀어 로마 교황이나 대주교들의 권력이 세속 군주들을 압도할 만큼 컸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봉건 군주들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강력한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정치권력은 아니지만 일종의 중앙집권적 성격이다). 분권화를 향한 세속 군주들의 움직임이 원심력이라면 교회는 구심력이었다. 중세가 서양 문명의 튼튼한 줄기로 자라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원심력과 구심력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수도사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액턴의 말이지만 중세 교회에도 해당한다. 권력의 정점에 이른 뒤부터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그 타락은 곧 중세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림은 가정에 초대받은 수도사가 바깥주인이 기도하는 틈을 타 안주인과 밀애를 나누는 장면이다.

 

 

정치 세력도 그렇듯이 교회도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던 만큼 제도권재야가 있었다. 제도권이 교회라면 재야는 수도원이다. 하지만 세속의 재야와 달리 수도원은 제도권의 교회처럼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았다. 클뤼니 수도원이 교황의 계보까지 이은 데서 알 수 있듯이(382쪽 참조) 교회와 수도원은 대립적인 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존재였다. 특히 수도원은 교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했다.

 

한때 교회 개혁의 기수였던 클뤼니 수도원이 쇠퇴하자 개혁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시토 수도회(Cistercian)였다. 11세기 말에 창설된 시토회는 금욕과 청빈의 생활을 강조하고, 수도회의 창시자인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갈 것을 가르쳤다. 여기까지는 여느 수도회의 성격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시토회는 기도에 못지않게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심지어 이들은 세속 군주들이 기부하는 토지마저 받지 않고 직접 황무지를 개간해 수도회의 재정을 꾸릴 정도였다. 영국 요크셔의 황무지를 광대한 방목지로 개간해 요크셔를 랭커셔의 면직물 산업에 맞서는 모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만든 것은 바로 시토회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요크셔의 중심 도시는 요크였고 랭커셔의 중심 도시는 랭커스터였으니, 시토회 수도사들이 요크셔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장미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절정기에 타락하기 시작한다고 했던가? 교회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하던 13세기 초 두 개의 중요한 수도회가 창설되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와 도미니쿠스 수도회(Dominican Order)가 그것이었다. 시토회에서 가르치는 청빈과 금욕은 이미 수도회의 기본이 되었으므로 이들 수도회는 아예 명칭부터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는 정식 명칭에 어울리게 프란체스코회는 일체의 재산과 소유를 포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회칙을 정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봉사와 포교 활동을 벌였다. 프란체스코회가 사회 개혁에 충실했다면, 도미니쿠스회는 그보다 더 종교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다. 이들은 민간에 퍼진 이단을 바로잡고 종교재판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중세의 빈민들은 이 두 수도회 덕분에 삶의 주름을 다소 펼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회는 그들의 육신을 편케 했고, 도미니쿠스회는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주었으니.

 

 

교회의 소금 중세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교회를 되살린 것은 수도회였다. 그림은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 치마부에가 그린 프란체스코의 초상이다. 치마부에는 프란체스코의 바로 한 세대 아래 사람이니까 그림에 나타나는 수수한 옷차림과 사려 깊은 표정은 실제의 인물과 닮았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세계의 중심은 교회

대학과 학문

중세 경제를 돌린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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