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경제를 굴린 도시
대학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도시가 발달한 덕분이기도 했다. 도시가 없었다면 교사와 학생의 조합이 생겨날 수 없으므로 대학의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런데 도시는 인류 문명이 탄생할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닌가?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예리코는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만 해도 1500년 전에 생겼으니, 도시라면 중세에 새로 생긴 게 결코 아니다.
하지만 중세의 도시는 다르다. 중세에는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도시도 있었지만, 중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상공업 도시다. 서양 고대의 도시나 동양의 도시는 대부분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세워졌다. 그에 비해 서양 중세의 도시는 처음부터 민간의 상공업 활동을 위해 탄생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시민의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물론 중세의 도시들 중에는 전통적인 도시처럼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도 있었다. 영주의 장원이 있는 성채도시나 교구 획정에 따라 생겨난 주교도시가 그런 것들인데, 이것들이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사회가 안정기와 성숙기에 들어갈 무렵인 10세기부터는 점차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상인과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도시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중세 도시를 ‘생산자 도시’라고 부른다. 성채도시와 주교도시는 경제적으로 소비도시였을 뿐이니까.
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한 법이다. 초기의 생산자 도시는 영주의 성곽이 있는 주변에 터를 잡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영주의 장원을 벗어나면 곧장 황무지이므로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다(앞서 말한 시토회 수도사들의 황무지 개간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이든 처음 만들기가 어렵지, 일단 만든 다음에는 쉽다. 선구적인 개척자들로 도시의 원형이 조그맣게 형성되고 나면 그 소문을 듣고 주변의 상인과 수공업자가 점차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도시의 재정이 증대하자 시민들은 직접 성을 쌓고 자체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다(한자동맹의 도시들처럼 자체 군대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도시는 종전처럼 영주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차츰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미천한 것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봉건 영주들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자 대뜸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놔둘 이, 지배할 것이냐? 그대로 놔둔다면 영주가 사는 행정의 중심 도시보다 규모가 커질지도 모른다. 반면 도시를 손에 넣는다면 거기서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선택에서 전자를 택할 바보는 없다. 영주들은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 도시에 검은 마수를 뻗쳤다.
시민들은 물론 영주의 정치적 지배와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으나 영주의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하나는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유를 사는 것, 다른 하나는 힘으로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물론 평화로운 제3의 길도 있었다. 시민과 영주가 서로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평화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이다. 영주의 정치적 권력이 비교적 약한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제3의 길이 대체로 통했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이탈리아에서도 로마 부근의 주교도시들에서는 주교와 시민층의 투쟁이 격렬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납고 힘센 영주라 해도 시대의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3세기 무렵에 이르면 대부분의 도시들이 영주에게서 상당한 폭의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농촌에서는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일단 도시로 나오면 신분상의 제약 같은 것은 없었다(자기의 미천한 신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익명의 자유’도 컸을 것이다). 정치권력에서 해방된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평등성에 기반을 둔 행정 체제와 사법권을 확립했으며, 심지어 중세 최대의 권력체인 교회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장원마다 관습이자 의무로 세워졌던 교회는,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세우는 말든 하기 나름이었다. 시민들이 내는 세금은 곧 시민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었으므로 납세의 의무는 시 당국에서 구호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다【이 점에서 서양의 도시는 동양의 도시와 다르다. 동양의 도시는 주로 중앙권력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중심의 기능을 수행했으나, 서양의 도시는 (영주의 장원이 도시로 발전한 경우를 빼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었고, 주로 경제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그런 탓에 세금의 의미도 크게 다르다. 서양의 시민들은 납세를 의무인 동시에 권리로 여겼으나, 동양의 시민들은 나라님의 땅을 갈아먹고 사는 한 세금은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식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동양의 시민들은 세금을 의무로만 여길 뿐 권리로서 생각하지는 않는 게 보통이다】.
중세 도시의 규모는 아직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인구를 보면 5000명 정도가 보통이었고 그 이하인 경우도 많았다. 가장 큰 도시라야 인구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 14세기 무렵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들은 베네치아·파리·팔레르모 피렌체·제노바 밀라노 바르셀로나·쾰른 런던 등으로 인구 5~10만 명가량이었고, 볼로냐·파도바·뉘른베르크ㆍ스트라스부르 뤼베크·루앙·브뤼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대도시들의 면모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 도시들은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공통점을 찾으면 알 수 있다. 우선 정치권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이 지역들은 프랑스와 영국, 독일처럼 강력한 왕국이 들어선 것도 아니었고, 에스파냐처럼 소규모 왕국들로 나뉘어 있지도 않았으며, 자체적으로 통일 왕국이 생기기에도 부적당했으므로 시민들의 자치도시가 형성되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해상무역의 요지였다는 점이다. 북이탈리아는 지중해에 접해 있고 플랑드르는 북해와 면해 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은 서유럽 해상무역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여기에 한 가지 선물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의 부산물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 무역을 서유럽이 장악하게 되면서 특히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플랑드르에서는 항구도시들이 한자동맹을 결성해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공국들, 스칸디나비아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번영의 정도는 비슷했을지라도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역사적 비중에서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에 미치지 못했다. 이슬람과 비잔티움 제국을 제치고 지중해 무역을 독점한 북이탈리아 상인들은 그 재력을 밑천으로 아무도 꿈꾸지 못한 세계사적 과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서양 역사의 꽃‘이라 할 르네상스다.
▲ 활기찬 도시 생활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의 신분제 굴레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 도시의 행정과 운영을 담당해 자치도시를 이루었다(그들은 세금을 내는 게 결코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자신들을 위해 쓰이는 돈이니까), 우리는 20세기에서야 지방자치제를 도입하게 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그림은 자치도시의 시장 풍경인데, 약국, 양복점, 이발소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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