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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변방의 성장: 미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변방의 성장: 미국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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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의 성장: 미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가 농노 해방령을 내린 1861년에 멀리 대서양 서쪽에서도 노예해방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노예해방을 내세우는 북부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미국의 역사는 마치 유럽의 근대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독립을 이룬 미국은 이제 유럽 각국과 동등한 선상에서 근대국가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 각국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 종교전쟁과 같은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유럽에서 종교전쟁은 각개약진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했을 뿐이고 본격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필요했듯이, 미국도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또 한 차례 진통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남북전쟁(Civil War)이다. 미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통해 불과 한 세기 만에 유럽 각국이 거친 역사 과정을 따라잡고, 어느 유럽 국가에도 못지않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된다.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뒤 미국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유럽 대륙보다 훨씬 넓은 땅(독립 당시의 13개 주만 해도 서유럽과 맞먹는 면적이다)에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도 없어 모든 게 마음대로였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소부족 문화로는 유럽인들의 조직적인 공략을 당해낼 수 없었으므로 서쪽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초반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다만 그 방법은 비열한 데가 있었다. 유럽 강대국이 소유한 땅은 매입하고, 신생국 멕시코나 원주민들의 땅은 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알래스카는 각각 프랑스, 에스파냐, 러시아에서 사들였고특히 알래스카를 매입한 것은 큰 논란을 불렀다. 1867년 미국의 국무장관 슈어드는 720만 달러의 헐값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는데, 당시에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겼고 심지어 미국 언론은 알래스카 매입을 슈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훗날 그 용어는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뒤 알래스카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나중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각종 광물 자원도 발견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알래스카를 팔아넘긴 게 러시아의 바보짓이라고 알려져 있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 서부의 주들은 멕시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여 빼앗았다.

 

문제는 새로 얻은 땅에 어떻게 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냐인데, 이것도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미국이 독립하면서 유럽 각국에서의 이민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기존의 토지 소유주와 경쟁하지 않기 위해 말뚝만 박으면 내 땅인 서부로 떠났다. 독립한 지 70년 만에 미국의 인구는 여덟 배로 늘어 3000만 명을 넘어섰다. 19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금광들이 잇달아 발견된 것도 서부 개척을 부추겼다. 1849년에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든 포티나이너스 10ers’ 덕분에 드디어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경계선은 태평양에 이르게 되었다.

 

 

49ers 서부에는 노다지가 있다! 미국 정부에서는 그렇잖아도 서부 개척을 장려해야 할 판인데,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림은 샌프란시스코의 개천가에서 사금을 줍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20세기 중반에 인기를 끈 미국 서부영화의 등장인물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샌프란시스코 프로 축구팀의 이름(포티나이너스)이 되었다.

 

 

때마침 유럽에서 불어닥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미국은 영토만이 아니라 공업도 크게 발달했다. 미국의 철도와 운하, 각종 공업은 단기간에 크게 성장했다. 막상 산업혁명의 주역인 영국은 혜택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그 혜택만 누렸다. 후발 주자의 이득이었을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풍부한 노동력이 없으면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북부의 산업 노동력은 유럽 이주민들이 충당했지만, 남부의 넓은 평야를 경작하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노동 수요를 충당해준 것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였다. 이들은 남부의 대농장에서 식량 생산과 면화 재배에 투입되었는데,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북부의 공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인 노예들을 제외한다면 당시 모든 게 풍요로운 미국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은 극소수였으리라. 그러나 북부와 남부의 협력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의 사회체제는 갈수록 차이가 심해졌다. 북부는 서유럽식 자본주의를 취했고, 남부는 아래쪽의 라틴아메리카처럼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대농장 중심 체제였다이런 차이는 오늘날 미국의 주 이름에도 흔적을 남겼다. 네바다·콜로라도·뉴멕시코·플로리다 등 남부의 주들은 라틴 계통의 이름이고, 펜실베이니아·뉴욕·버지니아 등 북부의 주들은 영어권 이름이다. 참고로, 그 밖의 주 이름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어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오리건 다코타·와이오밍·미네소타·미시간 등).

 

북부와 남부의 차이가 심화되면서 양측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새로 개척된 서부의 땅을 놓고도 북부는 조그만 구획으로 나누어 이주민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것은 남부 대농장 소유주의 반발을 샀다. 새로 생긴 서부의 주마다 두 명의 상원의원이 배정되었으므로 남부는 정치적으로 계속 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세 문제에서도 양측의 이해관계가 대립했다. 북부는 국내 공업의 보호를 위해 관세를 높이려 했으나 남부는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낮은 관세를 주장했다.

 

두 나라로 갈라선다면 모를까, 더 이상 한 나라로 아우르기가 어려워졌다. 적어도 남부는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차라리 갈라서기를 원했다. 미국이 생겨난 이후 최대의 위기, 그러나 남부에 비해 인구도 두 배인 데다(더욱이 남부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노예였다) 철도, 광산은 물론 산업체의 9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북부는 남부의 분립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성장한 인도주의라는 외피가 씌워지면서 북부는 남부에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400만 명의 노예를 거느린 남부에서는 노예가 없으면 당장 모든 게 마비될 형편이었다. 그런대로 북부의 요구를 버텨내던 남부에 드디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제 북부의 요구는 인도주의처럼 비공식적인 게 아니라 정식 국가 정책으로 구현될 것이다.

 

사실 링컨은 노예 문제를 과격하게 해결하려는 입장이 아니었고, 다만 장기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온건파였다. 그에게는 노예제보다 연방제가 깨지는 것, 즉 미국이 둘로 갈라서는 게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럴 만큼 남부의 반발은 거셌다. 과연 링컨의 바람과는 반대로 일찍부터 분립을 준비하고 있던 남부는 즉각 홀로서기에 나섰다. 1862년 남부의 7개 주는 연방을 탈퇴해 독자적으로 아메리카 연방을 구성했고, 헌법도 별도로 제정했으며, 대통령으로 제퍼슨 데이비스를 선출했다미국의 헌법은 독립 당시 제정된 것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공화국 앞에 번호를 매겨 구분하는 프랑스나 한국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제1공화국인 셈이다). 시대에 따라 변화된 사항은 수정헌법이라는 명칭으로 추가된다. 그래서 독립 당시 정해진 주()의 탈퇴권이 지금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텍사스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하려면 연방정부의 동의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주민 투표로도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다만 주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따름이다. 남북전쟁 무렵 남부는 바로 헌법에 보장된 탈퇴권을 행사하려 한 것이었으므로 북부가 법적으로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전쟁은 남부가 시작했어도 북부가 연방을 깨지 않기 위해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했더라면 연방이 분해되고 미국이 여러 나라로 분립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세계사 전체로 볼 때 훗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예무역 노예를 거꾸로 매달고 값을 흥정하는 모습이다. 수세기 동안 서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수송한 노예의 수는 최대 4000만 명에 달했다.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병에 걸리거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무려 3분의 1이 사망했다. 품목으로 보나 과정으로 보나 노예무역은 가장 참혹한 무역이었다.

 

 

이제 미국은 두 개의 국호·헌법·대통령이 존재하는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석에 몰렸다고 생각한 남부가 먼저 도발했다. 1861년 남군이 섬터에 주둔하던 북군의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측의 전력으로 보면 이 전쟁의 승부는 보나 마나 뻔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북부는 남부의 도발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전황은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미리 전쟁을 준비해 온 남부는 리(Robert Lee)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조직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반면 북부는 애초부터 남부를 얕잡아본 데다 수시로 총사령관이 바뀌는 등 지리멸렬했다. 처음에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던 북부는 그제야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2년 가까이 균형을 이루던 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이었다. 그해 1월 링컨은 일방적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남부의 노예들이 즉각 환영의 봉기라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의 내전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럽의 여론이 전쟁의 선악을 판단하고 방향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남부가 내심으로 바라던 영국의 개입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부터 북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해군력이었다. 북부는 모든 전력에서 앞서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해군은 절대적 우위였다. 남부에는 해군이라 할 만한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함선들이 남부의 해안을 완전히 봉쇄함에 따라 남부는 면화 수출로가 막혀버렸다. 더욱이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해안에서 수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제해권을 빼앗긴 것은 전략적으로도 남부에 치명적이었다.

 

걸핏하면 여론에 밀려 갈아치우던 북군 총사령관도 붙박이가 생겨났다. 북부의 그랜트(Ulysses Grant)1863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부의 승리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남부는 2년 가까이 더 버티다가 1865년에 마침내 항복했다.

 

링컨은 전쟁이 끝난 직후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그렇게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실상 노예해방에 그다지 투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 아닐뿐더러 정치적 리더십도 그리 강력하지 못했다. 설령 그가 살아남아 계속 집권했다 해도, 그가 이야기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에서 흑인과 여성은 그 국민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된 흑인과 여성이 선거권과 시민권을 가지려면 상당한 기간이 더 필요했다(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 남부는 미국 민주당의 아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공화당에 비해 인종 문제에서 다소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민주당은 원래 노예제의 남부를 기반으로 출범했다).

 

전쟁이 가져온 상처는 컸으나, 이주와 독립 당시부터 모두가 고향을 떠나온 똑같은 처지에서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온 미국인들의 전통은 충분히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국민국가의 성립을 위해 불가피한 진통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유럽을 얼룩지게 만든 나폴레옹 전쟁에 비해 성공적인 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인 진통을 겪은 뒤 미국은 이후 최단기간에 유럽 열강에 못지않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다. 이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다남북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가 급증했다. 전쟁 전인 1845년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으로 아일랜드계가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데 이어, 전후에는 유럽 각지에서 독일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유대계 등 수많은 유럽인이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미국의 번영에 기여한 덕분에 훗날 미국은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 같은 별명을 얻었다.

 

 

순수한 내전 미국의 남북전쟁은 미국이 유럽과 같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홍역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에서였다면 당연히 여러 나라가 개입되는 국제전이 되었겠지만, 당시 유럽 세계는 대서양 건너편의 사건까지 개입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 덕분에 남북전쟁은 순수한 내전으로 전개되었으며, 영어로도 그냥 Civil War(내전)라고 불린다. 그림은 북군과 남군 15만 명이 교전을 벌여 28000명의 사상자를 낸 최대의 격전 게티즈버그 전투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200년 만의 외교

다시 온 혁명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변방의 성장: 러시아

변방의 성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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