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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변방의 성장: 러시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변방의 성장: 러시아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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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의 성장: 러시아

 

 

러시아 지식인들이 새로운 이념인 사회주의 사상을 특히 환영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해가던 19세기 초반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후진국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제국이라는 낡은 체제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 세계에서 제국은 오스만과 러시아 둘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후진국이었다. 이제 제국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이 점은 제국 체제가 수천 년간 존속해온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청 제국은 18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세기 초반부터는 서양 세력의 본격적인 침탈을 받게 되었다에다 여전히 중세적 신분제가 존속하고 있었다(농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냈고 빈 체제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종교에서도 이질적이고 정치체제도 낯선 러시아를 동류로 여기는 서유럽 국가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럽을 뒤흔든 자유주의의 물결은 러시아에도 흘러들었다. 사실 자유주의 세력의 무장봉기라면 프랑스보다 러시아가 먼저다. 182512월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뒤 정치적 혼란을 틈타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사병 3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을 데카브리스트(Dekabrist, ‘데카브리12월을 가리키는 러시아어다)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것은 물론 황족과 지주들을 대우하는 문제까지도 논의할 만큼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포괄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형보다 훨씬 반동적인 알렉산드르의 동생 니콜라이 1(Nikolai I, 1796~1855, 재위 1825~1855)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러시아 역사상 차리즘에 최초로 반기를 든 사건인 만큼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러시아 지식인(인텔리겐치아)들에게 한 가지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겼다. 러시아에서 자유주의 개혁, 즉 시민혁명이 가능한가? 러시아에는 서유럽에서 볼 수 없는 혹독한 전제 체제가 있는 반면 서유럽에서 볼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서유럽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에서는 뭔가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그 답은 바로 사회주의혁명이다. 서유럽 국가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반드시 사회주의적 요구가 튀어나온다. 어차피 러시아에는 자유주의 혁명을 주도할 세력이 없다면 그냥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곧 바로 최종 목표인 사회주의혁명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반역의 러시아 자유주의 장교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수백 년간 지속된 차리즘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거사했으나 봉기는 실패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시민혁명의 단계를 뛰어넘는 더욱 근본적인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각성한 것은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똑같았어도 차르 정부의 답안은 인텔리겐치아와 정반대였다. 니콜라이는 자유주의마저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르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상과 활동이 불법화되었고(물론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인텔리겐치아들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의 비밀 조직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은 차르의 수족인 비밀경찰이 맡았다. 16세기 후반 이반 4세가 발동을 건 러시아 차리즘은 니콜라이의 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물론 니콜라이도 러시아가 후진국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원인을 러시아 내부의 탓으로 돌리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을 뿐이다(그렇다면 차르 체제 자체가 문제될 테니까). 그래서 그는 문제의 해결책을 대외 팽창에서 찾았다. 1853년 그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의 빌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제공했다. 1852년 그는 튀르크에 압력을 가해 성지 예루살렘의 관리를 동방정교가 아닌 가톨릭 사제에게 맡기도록 했다. 15세기 이반 3세 이래로 동방정교의 수장을 자처해온 러시아 차르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게 프랑스의 농간이었으니 니콜라이로서는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다. 일단 오스만 측에 철회를 요구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체면 구긴 뒤 니콜라이는 전쟁으로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종교 문제 이외에 러시아의 흑해 진출이 걸려 있었고, 또 전쟁의 무대가 흑해의 크림 반도였으므로, 이 전쟁을 크림 전쟁이라고 부른다18세기 초 북방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러시아는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왜 흑해로 또 진출하려 했을까? 발트 해의 패자가 되었어도 러시아의 부동항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도를 보아도 확연히 드러나지만 러시아가 발트 해에 부동항을 얻는다 해도 어차피 영국이 버티고 있는 북해를 통과하지 않으면 세계로 진출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에 발트 해는 반쪽짜리 부동항이었던 셈이다.

 

니콜라이는 사실 튀르크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혹은 간과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프랑스야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만큼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개입하겠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만큼 상관하지 않으리라. 이게 니콜라이의 판단이었으나 그의 기대 섞인 예상과 달리 두 나라는 즉각 참전했고, 더욱이 언제 적대적이었냐는 듯이 서로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섰다.

 

이리하여 30년 전 그리스 독립을 위해 싸운 세 나라가 이제는 편을 갈라 튀르크의 영토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튀르크는 전장만 제공했을 뿐 전쟁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차피 붙은 전쟁이니, 니콜라이는 30년 전에 미처 뜻을 펴지 못한 흑해 진출을 이루겠다는 각오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백 년간 유럽인들의 눈엣가시로 남아 있는 튀르크를 응징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진을 가로막는다는 의도로 전쟁에 임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처음으로 유럽 국가들끼리 맞붙은 크림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수십 년 동안 각개약진을 통해 쌓은 유럽 열강의 힘을 점검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볼 때 크림 전쟁은 최악의 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동맹군은 선박으로 병사들을 직접 흑해의 세바스토폴 항구에 상륙시키려 했지만 수심이 너무 얕은 쪽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작전의 차질을 빚었다. 러시아나 동맹군 측이나 제대로 된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고, 보급망도 극도로 엉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3년이나 지속된 전쟁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크림 전쟁은 군사적으로 최악의 전쟁이나 다른 한편으로 천사의 전쟁이라 할 수도 있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크림 전쟁에서는 전투로 죽은 병사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 헌신적인 간호 활동을 펼쳤는데, 그녀의 영향은 이후 군대 의료단의 혁신과 더불어 간호학의 체계적인 발달로 이어졌다. 아울러 전 세계 어린이 위인전에 빠지지 않는 한 인물로 자리 잡은 것도 크림 전쟁의 성과(?)랄까? 또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도 전쟁의 참상과 나이팅게일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하게 되었다. 크림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가 저지되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요소들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스케치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를 일으켰다가 처형된 청년 장교들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푸슈킨은 정치시를 쓴 죄로 정부의 탄압을 받아 유배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문학적 재질을 보였으나 유배 생활 중에 러시아 역사를 공부해 재질과 의식을 겸비한 작가로 성장했다.

 

 

후진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가 서유럽의 두 강국을 상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최악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더욱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1856년 파리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의 중립을 약속하고 더 이상 남하를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내부 모순이 산적해 있는 러시아로서는 대외 진출을 통해 그 모순을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면 안에서 곪아터지는 길밖에 없었다.

 

전쟁 직후 죽은 니콜라이(패전에 좌절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에 이어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2(Aleksandr II, 1818~1881, 재위 1855~1881)는 아버지에 비해 훨씬 계몽된 군주였다. 최소한 그는 내부의 문제를 바깥으로 옮기려 한 니콜라이의 정책을 계승하지는 않았다. 1861년 그는 오랜 숙제인 농노제를 폐지하고, 근대식 의회인 젬스트보(zemstvo를 설립하고, 행정·사법·군사 제도에 관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이제 자유주의적 수술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러시아를 되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은 차르가 주도하는 개혁을 전혀 믿지 않았다.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인데, 차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는 개혁이었다. 차르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다면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고 판단한 인텔리겐치아들은 1881년 마침내 알렉산드르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는 다시금 강도 높은 차리즘이 들어섰으나 이제 그 차리즘이 종말을 고할 시기는 멀지 않았다.

 

 

현대전의 시작 전쟁사적으로 볼 때 크림 전쟁은 최초의 현대전으로 불린다. 사진은 대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세바스토폴 전투다. 무기가 발달함으로써 바야흐로 국제 전쟁은 대규모 살육전의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이 전선의 천사로 활약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빚은 참극의 절정은 다음 세기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200년 만의 외교

다시 온 혁명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변방의 성장: 러시아

변방의 성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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