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만의 외교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1814년 9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실로 오랜만의 외교 테이블이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이렇게 대규모의 국제회의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큰 전쟁이 끝났으니 당연히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어야 했다. 전후 질서와 논공행상, 그것이 빈 회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유럽의 상황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던 17세기 중반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영토 국가의 초창기였던 170년 전에는 일찍 영토의 중요성을 깨우친 나라들이 패전국들의 영토를 적당히 나누어 먹는 식으로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영토 문제라면 유럽의 어느 나라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판이었으므로 논공행상이 결코 쉽지 않았다.
빈 회의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대표가 모였지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의 네 나라가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의장을 맡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였는데, 당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의 수도에서 회의가 열리고 그 나라 대표가 의장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회의의 기본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회의는 처음부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자는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도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문제였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메테르니히는 연회와 무도회를 열고 막후 협상을 통해 타개하려 했지만(이 때문에 “회의는 춤춘다.”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회의는 계속 공전하면서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잠시 돌아오는 사건까지 겹쳐 회의는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1815년 6월에야 어렵사리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기본적인 합의 내용은 프랑스를 통제하고 강대국들 간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 어느 한 나라가 패권을 차지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틈바구니에 있는 스위스는 아예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북이탈리아와 벨기에는 각각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에 돌려주었다. 이로써 북이탈리아는 다시 예전과 같은 외국 지배의 상태로 되돌아갔고, 16세기 이래 공화국이던 네덜란드는 살림을 늘려 네덜란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또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러시아는 그 대가로 폴란드를 얻었으나 패권주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따라 일단 폴란드 왕국을 별도로 세우고 러시아의 관할에 맡겼다(그러나 폴란드의 왕위를 러시아 황제가 겸했으므로 폴란드는 아직 독립한 게 아니었다).
▲ 춤추는 회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회의는 그야말로 알맹이가 ‘빈 회의’였다. 그림에서처럼 회의는 사교장을 방불케 할 만큼 파티와 무도회가 이어지는 흥청망청한 분위기였다. 회의에 참석한 유럽의 군주와 재상 들은 서로 친목을 다지면서 ‘좋았던 옛날’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독일이다. 아무리 회의의 모토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해도 나폴레옹이 문을 닫은 신성 로마 제국까지 부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독일 지역에는 북부에 프로이센, 남부에 오스트리아라는 중심이 있으므로, 회의에서는 이 두 나라를 축으로 많은 소국가를 어느 정도 교통정리하기로 했다. 마침 18세기까지 독일 지역에 300여 개나 난립한 영방국가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서로 이합집산을 이룬 결과 10분의 1로 줄어들어 있어 통합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는 35개 영방국가와 4개 자유시를 승인하고 그들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한데 묶어 새로 독일연방‘을 구성하도록 했다. 비록 느슨한 연방체이긴 하지만 이제 비로소 ‘독일’ 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단일한 정치적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승전국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다투던 라인 강 유역의 중부와 작센을 얻어 가장 남는 장사를 했다. 비록 전통에서 밀려 오스트리아에 독일연방의 맹주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이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이 뭉치게 될 조짐은 이 무렵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만약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신경을 끊고 그 대신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전통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던 남독일에 더 욕심을 부렸다면, 오늘날 독일보다 오스트리아가 더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회의의 성과물은 4국동맹이다.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은 서로 속셈이 다르고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적어도 다시는 프랑스 같은 특출한 강대국이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향후 유럽의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로 합의하고 4국동맹을 맺었다(이렇게 단독의 패권을 부정하는 대신 복수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은 유럽 세계의 역사적 전통이다). 이 동맹은 나폴레옹이 완전히 실각한 뒤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5국동맹으로 확대되었으며, 빈 회의 이후 해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비록 동맹은 다섯 나라 간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라 강력한 결집체를 이루지도 못하고 큰 효과를 거두기도 못했지만, 강대국들이 국제 관계를 주도하는 유럽식 외교의 전범이 되었다【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각국 내부에서는 사라진 중세적 신분제가 국제 관계로 확장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4국동맹에 앞서 봉건 영주식의 서열화로 국제적 안정을 취하자는 신성동맹을 주장했다. 억지춘향 격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유럽의 군주들이 참여한 것을 보면 아직도 중세적 전통이 근절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민주적인 듯해도 실상은 강대국들이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 연합이나, 강대국들의 모임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G-X(G-7, G-20) 같은 오늘날의 국제기구들 역시 멀리 보면 중세적 신분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빈 회의가 낳은 빈 체제는 처음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혁명 이전의 상태에 모두가 만족해야 하고, 혁명 이후의 변화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지배층을 제외하면 각국의 국민 대다수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데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의 기간은 겨우 20여 년이었지만 그사이의 변화는 어느 시기보다도 컸다.
특히 국가의 주권이 왕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은 이미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빈 체제의 복고주의는 리더 격인 나라들에서조차 일관되게 통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5국동맹 내에서도 영국·프랑스의 서유럽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동유럽은 견해 차이가 심했다. 특히 새로이 연방으로 묶인 독일 지역에서는 자유주의 시민 세력이 성장하면서 보수적인 지배층과 갈등을 빚는 사태가 잇달았다.
전후의 리더로 떠오른 영국은 독일 지역이야 어차피 관할권이 아니니까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독일 자유주의 운동이 가혹하게 진압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가 옛 가톨릭권이자 보수의 한 축을 이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나폴리의 자유주의 운동까지 진압하려 들자 영국은 내정간섭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소극적 반대인 탓에 그 지역에서도 메테르니히의 무력 진압이 성공했지만, 뒤이어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의 물결이 일자 영국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독립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은 식민지 미국이 ‘세계 최강의 본국’과 싸워 승리한 데서 큰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유럽의 대서양 상선들을 타고 멀리 이곳까지 전해졌다. 유럽에서는 자유주의로 불리는 이념이지만 아직 국가조차 성립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자유주의가 곧장 독립과 건국의 이념으로 이어졌다. 사실 영국은 이미 국력으로는 세계 최강이면서도 유럽 대륙에 관한 한 맹주 격인 오스트리아에 양보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신대륙에 관한 문제에서는 더 이상 양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독립을 막기 위해 싸웠던 영국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는 묘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본국’인 에스파냐는 오래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했고, 메테르니히가 라틴아메리카에까지 무력간섭에 나서기에는 힘이 부쳤다. 게다가 신대륙의 맹주로 등장한 미국은 1823년 먼로 선언으로 신대륙과 유럽 간에 분명한 선을 그음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간접 지원했다(먼로 대통령은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에 개입하려는 것을 미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 (1816)를 필두로 칠레(1818), 콜롬비아(1819), 멕시코(1820), 브라질(1820), 페루(1821), 볼리비아(1825) 등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국가들이 이 무렵에 생겨났다【계속해서 1830년에는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분립되었고, 1838년에는 과테말라에서 코스타리카까지 이르는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멕시코에서 독립했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19세기 초반 20년 동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나라들이다. 이렇게 신생국이 대거 독립한 시대는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다시 보게 된다】.
사실 독립의 물결은 떨리 가야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신생국은 아니지만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서도 오랜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15세기 이후 동유럽의 주인 노릇을 한 오스만튀르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대프랑스 동맹에도 참여했지만, 서유럽 국가들은 이제 늙고 병든 튀르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새삼 이교도 국가와 행동을 같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300년 가까이 튀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그리스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유럽 국가들이 어디를 지원할 것인지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테르니히의 태도다. 이제까지 유럽의 국제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해 온 그가 그리스에 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자유주의를 극도로 혐오한 그는 심지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유럽의 일부가 유럽 문명권으로 되돌아오려는 것까지도 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이념적 뿌리는, 가까이는 르네상스이고 멀리는 그리스의 고전 문명이 아니던가? 특히 당시 유럽을 휩쓸던 낭만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일제히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하고 나섰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그리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영국의 시인 셸리(Percy Shelly, 1792~1822)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외친 것이라든가,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바이런(George Byron, 1788~1824)이 다리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 달려간 것은 오로지 그리스가 유럽 문명의 뿌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리스의 독립에 도움이 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동방정교의 적통이자 ‘제3의 로마’로 자처하던 러시아는 이교도를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부르짖었고, 종교로 포장한 러시아의 태도 이면에서 지중해 진출의 의도를 읽은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튀르크에 대한 합동 공격에 나섰다. 결국 1829년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세기 내내 제국은 발칸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으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 낭만주의 시대를 맞아 그리스의 독립전쟁에는 유럽의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 섬의 학살>이다. 키오스는 에게 해의 섬으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곳이 이교도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다는 게 유럽인들에게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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