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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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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1830년의 7월 혁명이 그랬듯이, 18482월 혁명도 프랑스보다는 인접한 이웃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 혁명이 수출된 곳은 독일이다.

 

빈 체제가 들어선 이래 오스트리아가 힘에도 부치는 유럽 세계의 조정자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프로이센은 착실히 영토와 세력을 확장해 남독일까지 아우르면서 명실상부한 독일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남독일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지역보다 중부 유럽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더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 세계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주된 투자 지역은 그쪽이 아니라 북쪽의 독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오스트리아는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종교적인 데 있었을 것이다. 신교로 개종한 북독일에 가까운 지역보다는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 보헤미아와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서는 더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낡은 종교 문제를 여전히 외교의 초점으로 삼은 데서 오스트리아가 왜 보수의 총 본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계속 끌어안는 바람에 19세기 내내 다민족 국가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빈 회의가 가져다준 느슨한 정치적 연계를 진일보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1834년에 관세동맹을 체결했는데,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것은 이미 독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독일연방에는 프랑스와 똑같은 변화가 닥치고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의 물결이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독일의 부르주아지 역시 경제적 힘은 쥐고 있으면서도 그에 맞는 정치적 새 옷(공화제)은 입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3월 초, 독일연방의 두 중심인 빈과 베를린에서도 봉기가 터졌다. 빈의 자유주의 지식인과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군대가 진압에 나서자 313일부터 무장투쟁으로 맞섰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며칠을 가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민중의 힘 앞에 굴복했다. 황제 페르디난트는 빈 체제의 산파이자 보수의 상징인 메테르니히를 해임하고 헌법의 제정을 약속했다. 빈의 소식은 민중 집회가 며칠째 열리고 있던 베를린으로 금세 전해지면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Friedrich Wilhelm IV, 1795~1861, 재위 1840~1861)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았다. 결국 그도 헌법 제정과 의회 소집을 약속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사태의 진행은 비슷했어도 독일의 경우는 프랑스와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독일의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세력은 프랑스에 비해 힘이 약하고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독일은 프랑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갖춘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아직까지 느슨한 연방 체제에 머물러 있었다.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3월 혁명은 프랑스의 2월 혁명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우선 경험 부족의 독일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성공했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또 연방 체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의 통일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이 독일의 통일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고, 5월에는 각 연방 대표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독일 역사상 첫 의회인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혁명의 일차적 성공 뒤에는 반혁명이 온다는 역사적 경험을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민 산업혁명 초기에는 영국이라는 국가만 부유해졌을 뿐 영국의 국민들은 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자본론에는 여섯 살짜리 아이가 하루 16시간이나 노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은 굶주린 아이들이 돼지 여물통을 뒤지는 장면이다.

 

 

6월에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가 패배한 것은 독일 영방군주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었다. 그다음 10월에 오스트리아에서 2차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반혁명 세력에게 이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일정대로 이듬해 3월에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격상시켰으나, 사태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영악하게도 의회를 인정할 수 없으니 제위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그는 로마 교황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황제도 아닌 일개 의회따위가 황제를 임명하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제관을 받는다면 의회에 굴복하는 게 되니까). 이것을 신호탄으로 영방군주들은 혁명 시기에 자유주의 세력에게 내주었던 양보를 일제히 철회했다. 마침내 12월 국민의회가 해산됨으로써 독일 사상 첫 시민혁명은 무산되고 말았다나중에 보겠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는 시민혁명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유럽의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시비꾼역할을 하게 된다(20세기 들어 두 나라에 파시즘이 들어서는 것 역시 시민혁명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실상 유럽에서도 시민혁명을 제대로 겪은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뿐이다. 그런데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시민혁명만이 유독 문제시되는 이유는 두 나라가 가진 힘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나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 시민혁명이 없었다는 것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랬다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러나 독일의 3월 혁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장차 중요성을 더해갈 한 가지 성과를 낳았다.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18482, 파리에서는 40쪽도 안 되는 조그만 책자 한 권이 출간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라는 두 독일 청년이 함께 작성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라는 책자였다. 바로 전해에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정치조직의 강령이었는데,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었으므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책자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 유럽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부분은 바로 1848년의 혁명을 뜻한다.

 

1843년 프로이센 정부의 출판 검열을 피해 파리로 온 마르크스는 당시 파리에 망명 중인 혁명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당시 파리는 전 유럽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평생의 동료가 될 엥겔스를 만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시대 지식인들의 화두인 자유주의 시민혁명과는 다른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다. 두 사람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수에서나 힘에서나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임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혁명을 주도하는 것도 당연히 노동자들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독일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독일이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최적의 무대라고 여기고 독일로 돌아가 <신라인 신문>을 발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은커녕 자유주의 시민혁명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파리로 망명했고, 여기서도 프로이센 정부의 집요한 공작으로 추방되자 엥겔스가 있는 런던으로 간 뒤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런던에서 그는 최초의 사회주의 정치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1인터내셔널)를 창립하고 시민혁명의 단계를 뛰어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의 이론과 노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더 큰 업적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1867년에 1권이 간행되고 그의 사후에 엥겔스가 그의 노트를 정리해 2권과 3권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달한 현장인 영국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운동 법칙을 탁월하게 분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몰랐지만, 그는 학문적 성과 이외에도 장차 20세기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자라나게 될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 이미 그의 사상과 이론을 추종하는 혁명 세력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는데(마르크스는 그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들 중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0세기 벽두에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혁명의 단계 2월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파리에서는 엥겔스(왼쪽)와 마르크스(오른쪽)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자를 발표했다. “유럽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 세계를 휩쓴 혁명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는 달리 아직 유럽의 혁명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와 공화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200년 만의 외교

다시 온 혁명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변방의 성장: 러시아

변방의 성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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