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예수관
예수의 사도로서 글을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민족의 말인 히브리말에도 정통했으며 당대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인 희랍어(당대의 영어)에 통달했으며 로마시민권 소유자였으며 그레코ㆍ로망 수사학과 문학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이나 말씀에 관하여 일체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직전제자들을 만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기자료를 수집할 꿈도 꾸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역사적 색신(色身)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일 뿐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의 계시를 통해 직접 해후했을 뿐이다(고전 15:8). 그의 관심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 은혜(grace)와 믿음(faith)과 사랑(love)과 정의(justification)의 예수였다. 따라서 그의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예수였다.
물론 바울은 예수의 지상선교의 핵심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바울의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의 이방전파였다. 그 역시 행위자였지 논술자가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거나 교리를 문헌화하거나 경전을 논술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개종이후 죽을 때까지 줄곧 전도만 했을 뿐이다. 따라서 바울시대에도 교회에 고정된 경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바울이 남긴 것은 경전이 아니라 전도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쓸 수 밖에 없었던 아주 구체적이고도 일상적인 편지였다. 그의 편지는 주로 그가 설립한 교회들에서 분파적 내분이 생기거나 교리상의 혼란이 생기거나 기금을 모집해야 할 필요가 생기거나 인적사항이나 기타사항에 관해 부탁할 일이 있거나 조직운영에 문제가 있거나 할 때 틈틈이 쓴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예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의 이론적 해설이요, 그 말씀의 전파과정에서 파생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포폄적 해명이었다. 사실 그러한 개인편지들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바울의 전도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밝히는 대목이 없다. 그만큼 그의 편지쓰는 행위가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편지를 쓴 사실은 오직 그의 편지 속에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고전 5:9~10, 고후 2:4, 7:8~12 등).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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