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말
예수는 당대 아람어(Aramaic)라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 다른, 속화된 토속말(vernacular)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페니키아 알파벳(the Phoenician alphabet)으로 표기되었다. 요번에 발견된 쿰란문서에도 아람어 텍스트가 많이 나왔다.
아람어는 원래 히브리어와 계보를 달리하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였는데(아브라함도 아람어를 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 26:5),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속어로서 자리잡았다. 그것은 특히 갈릴리지방의 흔한 일상구어였다. 그러나 유대지방에서는 일상구어로서 히브리말이 통용되었다. 예수는 히브리말을 몰랐을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일반군중들은 물론(막 10:51) 베드로(막 9:5, 11:21)나 유다(막 14:45) 같은 제자까지도 그를 ‘랍비’(rabbi)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서기관계급(the class of scribes)에 맞먹는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이며 랍비문학의 소양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그가 구약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을 보아도 그는 당대의 유대인으로서는 고등한 학문을 소유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가 율법에 관하여 그토록 강력한 발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율법에 정통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예수는 히브리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고, 히브리말로 된 유대교성경에도 정통했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시편 22:1을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인용하며 운명하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그에게는 역시 갈릴리 토속어인 아람어가 가장 몸에 배어있는 자기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예수님 말씀에 대한 기록은 모두 희랍어로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곧 ‘번역’이라는 문제와 ‘시차’라는 문제가 당초부터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상기의 요한복음 장면에서 예수가 무엇인가 땅에 썼다면 그것은 주변에 모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이 간음한 여자를(아마도 결혼한 여자였을 것이다) 쳐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라의 구절(레 20:10, 신 22:21)이나 혹은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히브리성경의 명구를 썼을지도 모른다. 나이 많이 먹은 원로들부터 하나씩 자리를 떴다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의 말씀이나 판단이 자기들의 섣부른 율법적용의 상식적 범주를 뛰어넘는 어떤 권위를 그들에게 느끼게 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원래 요한복음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코우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와 같은 권위있는 희랍어 고판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번역 고판본에는 이 부분(요 7:53~8:11)이 없다. 그냥 요한복음과는 독립된 전승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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