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베가스의 세자매
보드베가스의 아침 겸 점심은 날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ㆍ국ㆍ김치였다. 너무도 단순한 식단이었지만, 너무도 행복한 식단이었다. 남군은 여행동안 보플거리는 남방의 알랑미를 아주 못견뎌 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기름기 없는 쌀의 묘미를 잘 안다. 그런데 남군은 계속 선 밥을 먹으니까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보드베가스의 딸들에게 쌀 물을 좀 많이 넣고 오래 푹 삶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알랑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쌀밥처럼 푹 익은 쌀밥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남군은 좀 진 듯한 밥을 먹으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나는 좀 게짐짐했지만 미역국을 실컷 들이키면서 목젖의 카랑한 기운을 쫓아내느라고 안깐힘을 썼다.
보드베가스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도여행 매니아들의 조직체인 ‘친구따라 인도가기’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곳인 모양이었다. 값싸게 한국음식을 먹고 또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은 곳인 듯 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어여쁜 세 자매가 있었다. 열여섯살 큰딸 이름이 샬라(Shahla)고, 열네살 둘째딸 이름이 샤바(Shaba)고, 열두살 막내딸 이름이 샤니아(Shania)인데 샤니아에게는 진달레이(Jindalley)라는 어여쁜 한국꽃 이름의 별명이 붙어있다. 샤니아는 한국말을 잘 했고, 한국음식 간을 잘 맞추었다. 이 세 자매가 자기집 옥상에서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왼쪽으로부터 샤바, 샬라, 진달레이. 세딸은 옥상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고,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는 일없이 『꾸란』만 암송하고 있는 듯했다.
보드베가스 옥상과 붙은 옆집의 옥상에는 어린 인도아동들이 가득 있었다. 왠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옆집 옥상이 학교라는 것이다. 인도의 학교는 대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조그마한 한 건물에 다 들어가 있다. 선생님도 한 명에서 많아야 세 명 정도다. 그리고 그들은 옥외에서 조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암송을 많이 한다. 바라문의 전통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수업도중인데도 나 같은 침입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일본에서 본 『니쥬우욘노 히토미』(二十四の瞳)라는 아름다운 영화를 상기해냈다. 그 제목은 ‘24개의 눈동자’라는 뜻인데 전전(戰前) 일본 시코쿠 어느 시골의 12명의 학생을 거느린 한 교사의 생애를 그린 명화였다.
▲ 보드베가스 옆집 옥상의 학교, 아침조례시간.
세 자매 보고 학교다닐 나인데 학교는 안 가냐고 물었더니 집에 손님이 많이 오면 학교에 안 가고 손님이 적으면 번갈아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지식보다 삶이 우선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학교를 다녀도 그들은 일체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세 자매의 모습은 너무도 보기 좋았다. 자매들이 협심해서 노동하고 자력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나라 어디에서 지금 볼 수 있단 말인가? 모두 입시 스트레스에 쩔은 아파트의 공주님들밖에 더 있는가?
나는 보드베가스에서 목을 축이고 난 후, 새로운 거처를 찾았다. 수자타호텔 값이 환불 안될 것이 뻔한 마당엔 그냥 포기하고 돈을 새로 주고서라도, 난 돌의 한기로부터는 피신을 해야만 했다. 비싼 집부터 싼 집까지 보드가야 시내 호텔ㆍ여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마땅한 방이 없었다. 남향은 오히려 가리는 방향으로 모두 설계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만만한 방은 모두 예약완료였다. 그러던 중, 바로 수자타호텔 옆에 샨띠 게스트 하우스(Shanti Guest House)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층에 허름한 남향방이 있었고 다 낡아 빠졌지만 양탄자가 깔려있어 한기를 막아주었다. 하루 350루피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만원 정도였다. 오케이! 나는 수자타호텔의 좋은 담요들을 몰래 들고 나왔다. 그리고 샨띠 게스트 하우스의 양광이 비쳐들어오는 여인숙방에서 낮잠을 실컷 잤다. 오후 3시경, 남군의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자고만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티벹궁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드디어 미스타 타클라(Mr. Tenzin Taklha)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타클라는 달라이라마의 바로 윗형 롭상 삼텐(Lobsang Samten)의 아들이었다. 롭상 삼텐은 달라이라마보다 세살 위의 형이었는데 달라이라마보다 앞서 그들의 고향 탁처(Taktser)에서 멀지 않은 쿰붐(Kumbum) 사원으로 출가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환속을 했고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고난의 동반자로서 활약하다가 인도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54세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매우 훌륭한 인품의 여인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 중에서 누굴 가장 좋아했냐고 여쭈었더니 롭상 삼텐이었다고 말하셨다는 것이다【달라이라마의 어머니는 1981년에 돌아가셨다. 달라이라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이 이야기는 달라이라마의 자서전에 실려있다. Freedom in Exile, p.239.】.
타클라는 매우 늠름한 청년이었다. 이목구비가 정말 잘생긴 티벹청년이었다. 그는 인도와 미국에서 공부했다 하는데, 현재 달라이라마의 개인비서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타클라로부터 우리는 달라이라마의 도착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 타클라는 자툴 대사의 전갈을 받았고 우리의 만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내일 10시에 다시 와달라고 했다.
▲ 초전법륜지에서 야외법회 중인 티벹스님들, 동네 개도 법회에 참석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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