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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언어게임과 ‘인식론’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5부 언어학과 철학 ‘혁명’ : 근대와 탈근대 사이 - 4.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언어게임과 ‘인식론’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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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과 인식론

 

 

여기서 실천이란 어떤 것이든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규칙이 관습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아니면 단지 언어적인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역시 이런 규칙에 따른 것입니다. 물건을 사는 데 사용되는 언어사용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런 행동을 훔치는 행동과 구별해 주는 행동 규칙이 있을 것입니다. 이 규칙은 모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겁니다. 이 규칙은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마다 고유한 생활방식’(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을 빌면 생활형태’)을 보여줍니다. 어떤 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바로 이 규칙들이 모여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 즉 행동이나 실천의 형태인데, 이는 대개 언어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Sprachspiel)이란 개념을 제시합니다. 특정한 규칙에 따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이 서로 교차되는 영역이 바로 언어게임이라고 합니다. 즉 언어게임이란 언어와 행동의 결합체요, 언어적 활동과 비언어적 활동이 교차되는 지점입니다. 언어게임은 언어적 활동이나 비언어적 활동 모두가 따라야 할 규칙들의 집합이며, 또한 그 규칙에 따른 행동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유독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말을 하는 행위가 더 큰 행위의 일부분임을 표시하기 위해, 즉 생활형태의 일부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언어게임은 의미나 행동을 이해하거나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맥락(context)을 제공합니다. 앞서 water란 말이 저토록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그토록 상이한 맥락 속에서, 즉 다양한 언어게임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맥락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있으며, 또한 그대로 따라하거나 응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수많은 실수가 거기에 따르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언어게임은 동의나 합의, 실천이나 이해, 의사소통에 기준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언어게임이 다르다는 말은 언어적 실천이나 비언어적 실천이 기준으로 삼는 규칙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며, 이 경우 합의나 동의, 또는 공통된 실천은 힘들어지고, 이해나 소통은 곤란하게 됩니다. 예컨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문법이나 사전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생활형태(흔히 문화라고 부르지요)를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사용되는 규칙(언어게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한편 언어사용 규칙을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랑그처럼 완결되고 불변적인 체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활형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 만큼, 아니 생활형태의 일부분인 만큼 가변적입니다. 즉 규칙이 불변적인 전체로 있고, 그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란 겁니다. 강의실에서 사용하는 언어사용 규칙과 술집에서 사용하는 규칙, 혹은 어린애와 놀면서 사용하는 규칙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과 문법 간에 매우 다양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언어든 언어에는 얼마나 많은 예외가 있는지!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구조언어학과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의미를 단지 기호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입장과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이를 흔히 화용론(話用論)’이라고 하는데, 영국의 오스틴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언어 게임은 생활형태에 따라 가변적이며, 그 말은 언어사용 규칙까지도 가변적임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전 여기서 생활형태라는 개념이 맑스의 생활양식’(Lebensweise, 독일 이데올로기)이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는 실천이란 개념을 가지고 언어나 철학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려는 두 사람의 공통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유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동일한 하나의 단어도 생활형태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맑스식으로 해석해 봅시다.

 

일하다란 낱말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노예제에서 이 말은 말하는 도구인 노예가 채찍과 족쇄, 제도 등에 의해 강제로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한 대가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지요.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자기가 사장과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 자의로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의 대가는 임금으로 받고 말이지요. 싫으면 안 해도 그만입니다. 비록 생계를 유지할 돈은 구할 수 없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에게 하듯 채찍을 들고 강제로 일을 시킨다면, 혹은 노예들에게 자발적으로 좀 일해하면서 일을 시킨다면 전자는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고, 후자는 우스운 말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이 대개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데, 만약 그런 주부들이 노동에 대해 대가를 요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지요. 심지어 남편조차도 아내인 주부와 생활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즉 자신이 사무실에 앉아 하는 것만을 노동으로 알기 때문에 그 요구를 묵살할 것입니다. 사실은 사무실에서 하는 노동은 임금을 지불받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되고, 가사노동은 지불받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러한 생활형태의 차이 때문에 언어게임 사이에 싸움이 나타난다고 합니다(확실성에 관하여), 공동의 상황에서 언어를 상충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일은 자주 접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흔히 나타나는 언어게임의 싸움, 상이한 의미들이 충돌하는 사태는 생활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싸움에서 공통의 실천 혹은 상황의 공유가 가능하다면 의미나 규칙을 확인하고 수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평등같은 단어들에 대해서는 합의에 도달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상반되게 사용하는 두 집단의 생활형태는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공통의 실천이 존재하기 힘들고, 이로 인해 공통의 의미를 형성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충돌과 대립이 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진리나 지식에 대해서도, 진리를 요소명제의 함수로 정의하던(쉽게 말해 진리값을 계산하려던) 초기의 입장을 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에 섭니다. 그에 따르면 무얼 안다는 것은 안다는 믿음이고, 진리란 확실하다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데카르트처럼 끝없이 의심하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의심 끝에 뭔가 확실한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있을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이라는 것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 즉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정당화란 자신이 옳다는 근거를 세우려는 노력인데, 그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옳다고 생각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와 연루시킴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와 일치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정당화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즉 정당화에는 이 있다는 거지요. 그럼 그 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동(activity)이요 실천입니다. 요컨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에서 믿음은 출발하며, 이 믿음에서 모든 지식은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리의 개념 역시 언어게임과 생활형태란 개념 속에서 다시 파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천이란 특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기에, 어떠한 실천도 규칙을 제공하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게임이 생활형태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실천이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이해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결국 진리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같은 말이지만 특정한 언어게임 속에서 정의되는 실천을 위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고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정당화되는 믿음이 진리의 출발점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해 다시 이렇게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요? 진리란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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