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의 논리학, 논리학의 문법
지금까지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말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재미있는,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언어적 규칙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보았지요? 언어적 규칙을 대략 ‘문법’이란 말로 대표해서 씁시다. 그러면 문법적 규칙이 달라지면 사고 규칙도, 사고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점을 잊고 데카르트처럼 문법적 규칙에 불과한 것을 자명하고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법의 환상에 빠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학에 대해서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경우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사고의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리학 역시 문법적 규칙과 무관한 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문법적 규칙을 일반화하여 사고규칙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논리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리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했는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해킹(I. Hacking)은 『철학에서 언어가 왜 중요한가?』라는 책에서, 서구의 논리학과 철학 분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중요한 책으로서 『포르 루아얄(Port-Royal) 논리학』을 꼽습니다. 포르-루아얄은 프랑스의 수도원이 있던 지명이고, 『포르 루아얄 논리학』은 16세기에 이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들이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이후 논리학의 발전은 물론이고, 현대에 와서도 언어학(특히 촘스키)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기지고 있는 기본적인 발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고란 개개의 표상들, 예를 들면 ‘토끼’ ‘귀’ ‘길다’ 같은 표상들을 질서지우고 결합하는 것이며, 그래서 “토끼는 귀가 길다”와 같은 판단을 만들어내는 규칙이 바로 논리지요. 즉 논리학이란 사고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서 표상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고 규칙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논리학이란 언어가 표상들을 결합시키는 일반적인 규칙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논리학의 법칙은 문법적 규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논리학의 법칙이란 문법 규칙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한 것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을 바꾸면, 문법적 규칙 즉 표상들을 결합하는 언어적 규칙이 전혀 다르다면, 전혀 다른 논리학을 가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서구의 논리학적 규칙이 성립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도, 참조되지도 못한 언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는 언어가 다르면 사고방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훔볼트의 주장과도 일치합니다.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영어든 독일어든, 아니면 프랑스어든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공통적으로 꼽힐 것이 있습니다. 영어의 be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 프랑스어의 être 동사가 그것입니다. 알다시피 이들은 우리말로 하면 ‘있다’와 ‘이다’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동사가 주어와 서술어를 관계짓고, 문장 전체를 연결합니다. 또한 서구어에서 모든 동사는 être 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르 루아얄 논리학』에서 한 부를 할당하고 있는 동사의 이론이 바로 être 동사에 대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말에서 ‘있다’와 ‘이다’는 분명 다른 단어고, 중국어에서도 그것은 ‘有’와 ‘是’라는 다른 단어며, 일본어에서도 그것은 ‘ある’/‘いる’와 ‘である’라는 다른 단어입니다(오히려 이 점에서 동양의 언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이데거는 자신을 방문해서 존재론에 대해 질문한 일본인 철학자에게 sein 동사도 없는 언어로 어떻게 ‘존재론’을 연구하겠느냐고 했다 합니다. 즉 ‘있다’와 ‘이다’를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가 없다면 존재론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일종의 ‘문법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말에서 sein 동사(be동사)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있다’/ ‘이다’를 구분해서 사고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고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으리란 결론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사의 이론이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푸코에 따르면, be(être) 동사는 무언가를 긍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The tree is green이라면 나무(tree)와 green이 동등한 관계에 있음을 표시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tree=green 이란 거고, =의 기능을 be동사(étre 동사)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동사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되는 내용입니다. 논리학의 동일률이 이러한 동사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우리 말은 “나무가 푸른 상태에 있다”가 아니라 나무는 푸르다”일 뿐입니다. 물론 ‘나무=푸름’이란 등식은 여기서도 보이지만 우리 말에선 ‘=’을 위해 어떤 동사도 동원되지 않습니다. 형용사 자체가 용언으로서 술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동사 없이는 어떤 문장도 생각할 수 없는 서구어와 매우 다른 특징을 갖습니다. 푸코가 『포르-루아얄 논리학』을 인용해 언어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강조한 ‘동사의 이론’은 여기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사의 동일화 기능에 기초한 논리학의 동일률 역시 다르게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서구의 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조차도 진리이거나 자명한 게 결코 아니란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습니다. 니체는 동일률이나 모순률이 진리란 것을, 혹은 누구나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대체 누가 증명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아무도 그것의 보편타당성을 입증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학의 규칙, 여기에는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없으며, 단지 모든 걸 동일한 틀에 꿰어맞추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만이 있을 뿐이라고 니체는 갈파합니다.
한편 동일률, 모순율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 간주되어온 배중률은 직관주의의 대표자인 브루베르(L, Brouwer)라는 수학자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배중률이란 어떤 게 A가 아니면 ~A(not A)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 “기면 기, 아니면 아니지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배중률은 왜 부정되었을까요?
원주율인 π의 값을 컴퓨터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π=3.1415926535897932384626…… 134999999837……
π는 아시다시피 무리수여서 불규칙하게 수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소수점 아래 762번째 자리부터 9가 연속해서 6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한히 계속되는 이 수의 배열에서 다시 9가 연속해서 6개 나오는 경우가 있을까요? 혹은 이 수의 배열에서 9가 연속해서 10개가 나오는 경우가 있진 않을까요? 확률상으론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가 무한히 계속되므로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수가 나올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기 곤란합니다. 바로 여기서 배중률은 난파하고 맙니다. 이처럼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이제 모순률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주장도 모두 거짓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법을 달리하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구조를 단지 서구의 논리학적 규칙에 끼워맞추려는 시도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좀더 나아간다면 우리의 언어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의 논리학적 규칙조차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