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명제
언어나 기호가 갖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는 거지요.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는 실제 송아지의 ‘이름’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말은 먹는 행위를 가리키고, 그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여기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예를 들면 실제 송아지)을 흔히 ‘지시체’(referent)라고 합니다. 기호나 언어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지시체) 간에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호는 지시체를 반영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언어나 기호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호들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정해질까요?
소쉬르의 견해를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로 요약해 봅시다.
첫째, 언어학의 대상과 그 특징입니다. 그에 따르면, 언어활동에는 랑그(langue, 언어)와 파롤(parole, 화언)이 있는데, 언어학은 랑그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파롤은 화언 혹은 발화로 번역되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이 예가 되겠습니다. “나는 주스를 한 컵 마셨다”는, 제 성대를 울려 나오는 이 소리가 바로 파롤이지요. 그런데 이걸 경상도 사투리로 저기 앉아 있는 분이 말했다 합시다. 그건 분명히 다른 음색과 음량, 음파를 가질 겁니다. 사투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지요. 사람마다 말하는 게 다르니까요. 이 경우 같은 문장이지만, 모두 다른 파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제가 같은 문장을 말한다 해도 다른 파롤이 됩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오직 일회성만 갖는 게 파롤의 특징입니다.
반면 랑그는 누가 어떤 목소리로 말해도 “나는 주스를 마셨다”란 말은 동일한 규칙에 따라 동일한 순서로 말해진 거지요. 만약 “주스는 나를 마셨다”라든가, “마셨다 나 주스는”를 이란 식으로 말한다면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죠. 이처럼 말을 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는데, 바로 이 규칙 전체를 랑그라고 합니다. ‘문법’이란 이 랑그의 일부입니다.
예를 들어, 500명의 학생들에게 이 말을 반복하도록 한다면 500개의 파롤이 행해지지만, 그 모두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랑그만을 찾아낼 수 있지요, 그런데 누군가 하나 심술궂은 사람이 있어서 “I drunk a cup of juice”라고 했다고 합시다. 앞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문장이지만, 다른 문자로 된 다른 기호를 다른 규칙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때는 두 개의 랑그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규칙이라는 것은 본래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따를 때 성립하는 것이죠. 자기만의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것은 곧 규칙이 없는 것과 같지요. 따라서 랑그는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있든 없든, 내가 쓰든 안 쓰든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죠.
언어학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비유는 바로 장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馬] 하나를 병뚜껑으로 바꾼다 해도 장기를 두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랑그란 장기에서 말들을 움직이고 잡아먹는 게임 규칙 전체를 가리킵니다. 말들이 다른 걸로 바뀌어도 장기 규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듯이, 우리가 쓰는 말[語]들이 다른 걸로 바뀌어도 언어사용 규칙인 랑그는 변하지 않습니다. 소쉬르는 이 랑그야말로 언어학이 다루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언어활동(language)의 ‘사회적 규범’이며, 하나의 사회적 제도입니다(『일반언어학 강의』).
둘째, 기호와 지시체의 관계입니다. 그는 기호란 자의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의 관계가 자의적이란 말도 됩니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로 나누지요.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란 뜻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음하는 ‘시계’라는 소리는 이 시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물건을 가리키기 위해 ‘티계’나 ‘치계’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시계라고 발음하기로 한 건 사회적인 약속일 따름이지요. 새로 약속을 바꾸어 ‘티계’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전에서 ‘티계’란 철자를 찾으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표는 그 대상과 무관하게 사용되거나 바뀔 수 있습니다. 즉 기호는 자의적인 것이죠. 이것은 또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욕할 때는 주로 격한 소리의 기표를 쓴다든가, 어두운 느낌을 표현할 때는 어두운 소리의 기표를 사용한다든가, 의성어나 의태어를 쓰는 경우 등입니다.
▲ 모세, 여호와의 부름에 답하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조각 「모세」
”모세야.” “예.” “너는 이집트 땅에 가서 내 백성들을 해방시켜라.” 여호와의 부름에 모세는 대답했고,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는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름을 부른 여호와의 ‘신민’이 된 것이기도 했다. 영어의 subject는 그래서 주체와 신민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호명’이라고 한다.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대답한 사람은 주체/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여호와가 실수를 해서 “경세야”라고 불렀다면 어떻게 될까?? 모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고, 히브리인 해방의 주체가 되지도, 여호와의 신민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도, 우리도 바보가 아니다.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아, 이건 그의 이름이 아니군”하며 그의 이름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꺼비나 여우는 제대로 된 이름일까? 아무리 “두껍아” 소리쳐 불러도 두껍이의 대답을 들은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름이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아닌가? 그럼 이 모두가 잘못된 이름은 아닐까? 이는 기호(이름)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일까?
셋째,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에 관련된 것입니다. 예컨대 주어는 동사와 함께 쓰이며, 타동사는 목적어를 갖습니다. 이런 경우 주어는 동사와, 타동사는 목적어와 ‘공시적’이라고 합니다. 공시성이란 이처럼 어떤 기호를 사용하는 데 동시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말합니다. 반면 통시성이란 것은 예컨대 ‘셔’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서울’이란 말이 되기까지 겪은 역사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흔히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말이죠..
따라서 그가 보기에 언어학에는 공시언어학과 통시언어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통시언어학은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고, 공시언어학은 언어의 규칙과 체계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이 둘 중에서 언어학의 중심 영역은 공시언어학이라고 합니다.
넷째, 문장을 엮어가는 형식으로서, ‘결합관계’와 ‘계열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결합관계란 프랑스어로 생타금(syntagme)이라고 하고 계열관계는 파라디금(paradigme)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예를 봅시다.
문장이란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식으로 단어들이 일정한 법칙에 의해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단어들이 공존하며 연쇄를 이루는 관계를, 그리하여 서로 연관되어 결합될 수 있는 관계를 ‘결합관계’라고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가로축이 바로 결합관계의 축이지요.
너 | 물 | 긷는다 | ||||||||
나 | 는 | 밥 | 을 | 먹는다 | →결합관계 | |||||
우리 | 빵 | 버린다 | (syntagme) | |||||||
↓ 계열관계(paradigme) |
한편 위 그림에서 보듯이 ‘나’ 대신에 ‘너’ 나 ‘우리’, 혹은 그 밖에 주어가 될 수 있는 건 아무 단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밥’이나 ‘먹는다’도 다른 단어도 대체될 수 있는 건 마찬가집니다. 이처럼 어떤 단어가 다른 것으로 선택되어 대체될 수 있는 관계를 ‘계열관계’라고 합니다. 즉 위 그림에서 세로축이 바로 계열관계의 축이지요. 이 두 개의 축이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고 언어로 조직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다섯째, 소쉬르는 기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좋다’ / ‘나쁘다’를 말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의미’라는 말과 유사한데, 사실은 의미란 말과 달라지는 내용을 표시하기 위해 끌어들인 용어입니다.
이와 관련해 소쉬르는 ‘양’이란 단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프랑스어의 mouton은 ‘양’이란 뜻인데, 알다시피 영어에서 ‘양’은 sheep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프랑스어의 mouton은 산 양이든 죽은 양이든, 양고기든 모든 종류의 양을 다 가리킵니다. 반면 영어에서 sheep은 살아 있는 양만을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가치’는 다른 거지요.
영어에는 프랑스어의 mouton에 해당되는 mutton이 있지요. 이 말은 mouton이 영어화된 말입니다. 알다시피 mutton도 양이란 뜻이지요. 그러나 영어에서는 살아 있는 양을 가리킬 때는 mutton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죽은 양, 양고기 등을 가리킬 때만 씁니다. 이런 점에서 mouton과 mutton은 ‘가치’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잠시 상상력을 발동해 봅시다. 영국인이 프랑스어를 배웁니다. 프랑스인이 양을 가리키면서 mouton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국인은 “아! mouton은 sheep이란 뜻이군” 하겠지요. 그런데 또 양고기 요리를 보면서 mouton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상응하는 영어가 없자, “아! mouton이란 양고기를 가리키는 거군” 하겠지요. 그런데 살아있는 양이야 계속 Sheep을 사용할 테니 별 문제가 없겠지만, 양고기를 보고선 프랑스인에게 배운 단어를 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mutton은 원래 프랑스어와 달리 양고기란 뜻이 되었을 겁니다. 이는 mouton 이란 기호의 가치가 영어에 들어오면서 달라진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달라진 이유는 sheep이란 단어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마 양고기를 뜻하는 다른 기호가 있었다면 그 말은 안 쓰이거나 다른 뜻으로 쓰였겠지요.
이는 기호의 가치가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mouton은 sheep이 가리키는 것과 ‘다른’(different), 그러나 아직 별도의 기호가 없는 대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mouton(mutton)의 가치는 sheep이나 영어의 다른 기호들에 의해, 즉 그 기호들과 ‘다름’을 표시하고 있지요.
소쉬르에 따르면 외래어만이 아니라 모든 기호들이 다 그렇다고 합니다. ‘강아지’와 ‘개새끼’는 모두 ‘개의 새끼’를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건 다른 가치를 갖지요. 뒤의 말은 주로 욕을 할 때 사용하지요. 만약 이게 ‘강아지’와 같은 뜻이라면 이 단어를 별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단어가 쓰이는 것은 다른 단어와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다를 때만 그렇습니다. ‘개새끼’란 기호의 가치는 ‘개’나 ‘강아지’란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기호의 가치는 ‘차이’(diference)에 의해 결정된다고 소쉬르는 말합니다. 이는 뒤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명제니 꼭 기억해 두십시오.
▲
위 그림은 반 아이크(Jan van Eyck)의 「아르놀피니의 약혼」(The betrothal of Arnolfini)에 등장하는 강아지다. 기묘한 표정의 상인 아르놀피니와 이미 배가 남산만큼 부른 약혼자의 발 밑에서 얼쩡대는 중인 것을 끌어왔다.
그런데 아직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두 가지 평범한 제목을 생각중이다. ‘하나는 강아지’, 다른 하나는 ‘개새끼’. 이 두 기호는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둘 다 작은 개, 혹은 개의 새끼를 뜻한다. 그러나 같은 지시체를 갖는 이 두 기호는 너무도 다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하지 못해서, 섞어 썼다간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기호는 자의적이기에 어떤 걸로 써도 별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두 기호를 대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자의적이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미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미 때문일까? 그렇지만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두 기호가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