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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5부, 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5부, 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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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명제

 

 

언어나 기호가 갖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는 거지요.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는 실제 송아지의 이름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말은 먹는 행위를 가리키고, 그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여기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예를 들면 실제 송아지)을 흔히 지시체’(referent)라고 합니다. 기호나 언어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지시체) 간에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호는 지시체를 반영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언어나 기호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호들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정해질까요?

 

소쉬르의 견해를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로 요약해 봅시다.

첫째, 언어학의 대상과 그 특징입니다. 그에 따르면, 언어활동에는 랑그(langue, 언어)와 파롤(parole, 화언)이 있는데, 언어학은 랑그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파롤은 화언 혹은 발화로 번역되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이 예가 되겠습니다. “나는 주스를 한 컵 마셨다, 제 성대를 울려 나오는 이 소리가 바로 파롤이지요. 그런데 이걸 경상도 사투리로 저기 앉아 있는 분이 말했다 합시다. 그건 분명히 다른 음색과 음량, 음파를 가질 겁니다. 사투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지요. 사람마다 말하는 게 다르니까요. 이 경우 같은 문장이지만, 모두 다른 파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제가 같은 문장을 말한다 해도 다른 파롤이 됩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오직 일회성만 갖는 게 파롤의 특징입니다.

 

반면 랑그는 누가 어떤 목소리로 말해도 나는 주스를 마셨다란 말은 동일한 규칙에 따라 동일한 순서로 말해진 거지요. 만약 주스는 나를 마셨다라든가, “마셨다 나 주스는를 이란 식으로 말한다면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죠. 이처럼 말을 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는데, 바로 이 규칙 전체를 랑그라고 합니다. ‘문법이란 이 랑그의 일부입니다.

 

예를 들어, 500명의 학생들에게 이 말을 반복하도록 한다면 500개의 파롤이 행해지지만, 그 모두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랑그만을 찾아낼 수 있지요, 그런데 누군가 하나 심술궂은 사람이 있어서 “I drunk a cup of juice”라고 했다고 합시다. 앞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문장이지만, 다른 문자로 된 다른 기호를 다른 규칙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때는 두 개의 랑그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규칙이라는 것은 본래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따를 때 성립하는 것이죠. 자기만의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것은 곧 규칙이 없는 것과 같지요. 따라서 랑그는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있든 없든, 내가 쓰든 안 쓰든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죠.

 

언어학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비유는 바로 장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 하나를 병뚜껑으로 바꾼다 해도 장기를 두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랑그란 장기에서 말들을 움직이고 잡아먹는 게임 규칙 전체를 가리킵니다. 말들이 다른 걸로 바뀌어도 장기 규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듯이, 우리가 쓰는 말[]들이 다른 걸로 바뀌어도 언어사용 규칙인 랑그는 변하지 않습니다. 소쉬르는 이 랑그야말로 언어학이 다루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언어활동(language)사회적 규범이며, 하나의 사회적 제도입니다(일반언어학 강의).

 

둘째, 기호와 지시체의 관계입니다. 그는 기호란 자의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의 관계가 자의적이란 말도 됩니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로 나누지요.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란 뜻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음하는 시계라는 소리는 이 시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물건을 가리키기 위해 티계치계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시계라고 발음하기로 한 건 사회적인 약속일 따름이지요. 새로 약속을 바꾸어 티계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전에서 티계란 철자를 찾으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표는 그 대상과 무관하게 사용되거나 바뀔 수 있습니다. 즉 기호는 자의적인 것이죠. 이것은 또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욕할 때는 주로 격한 소리의 기표를 쓴다든가, 어두운 느낌을 표현할 때는 어두운 소리의 기표를 사용한다든가, 의성어나 의태어를 쓰는 경우 등입니다.

 

 

모세, 여호와의 부름에 답하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조각 모세

모세야.” “.” “너는 이집트 땅에 가서 내 백성들을 해방시켜라.” 여호와의 부름에 모세는 대답했고,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는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름을 부른 여호와의 신민이 된 것이기도 했다. 영어의 subject는 그래서 주체와 신민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호명이라고 한다.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대답한 사람은 주체/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여호와가 실수를 해서 경세야라고 불렀다면 어떻게 될까?? 모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고, 히브리인 해방의 주체가 되지도, 여호와의 신민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도, 우리도 바보가 아니다.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 이건 그의 이름이 아니군하며 그의 이름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꺼비나 여우는 제대로 된 이름일까? 아무리 두껍아소리쳐 불러도 두껍이의 대답을 들은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름이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아닌가? 그럼 이 모두가 잘못된 이름은 아닐까? 이는 기호(이름)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일까?

 

 

 셋째, 공시성(synchrony)과 통시성(diachrony)에 관련된 것입니다. 예컨대 주어는 동사와 함께 쓰이며, 타동사는 목적어를 갖습니다. 이런 경우 주어는 동사와, 타동사는 목적어와 공시적이라고 합니다. 공시성이란 이처럼 어떤 기호를 사용하는 데 동시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말합니다. 반면 통시성이란 것은 예컨대 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서울이란 말이 되기까지 겪은 역사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흔히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말이죠..

 

따라서 그가 보기에 언어학에는 공시언어학과 통시언어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통시언어학은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고, 공시언어학은 언어의 규칙과 체계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이 둘 중에서 언어학의 중심 영역은 공시언어학이라고 합니다.

 

넷째, 문장을 엮어가는 형식으로서, ‘결합관계계열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결합관계란 프랑스어로 생타금(syntagme)이라고 하고 계열관계는 파라디금(paradigme)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예를 봅시다.

 

문장이란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식으로 단어들이 일정한 법칙에 의해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단어들이 공존하며 연쇄를 이루는 관계를, 그리하여 서로 연관되어 결합될 수 있는 관계를 결합관계라고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가로축이 바로 결합관계의 축이지요.

 

      긷는다    
  먹는다   결합관계
  우리     버린다   (syntagme)
                     
 
계열관계(paradigme)
   

 

 

한편 위 그림에서 보듯이 대신에 우리’, 혹은 그 밖에 주어가 될 수 있는 건 아무 단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나 먹는다도 다른 단어도 대체될 수 있는 건 마찬가집니다. 이처럼 어떤 단어가 다른 것으로 선택되어 대체될 수 있는 관계를 계열관계라고 합니다. 즉 위 그림에서 세로축이 바로 계열관계의 축이지요. 이 두 개의 축이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고 언어로 조직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다섯째, 소쉬르는 기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좋다’ / ‘나쁘다를 말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의미라는 말과 유사한데, 사실은 의미란 말과 달라지는 내용을 표시하기 위해 끌어들인 용어입니다.

 

이와 관련해 소쉬르는 이란 단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프랑스어의 mouton이란 뜻인데, 알다시피 영어에서 sheep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프랑스어의 mouton은 산 양이든 죽은 양이든, 양고기든 모든 종류의 양을 다 가리킵니다. 반면 영어에서 sheep은 살아 있는 양만을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가치는 다른 거지요.

 

영어에는 프랑스어의 mouton에 해당되는 mutton이 있지요. 이 말은 mouton이 영어화된 말입니다. 알다시피 mutton도 양이란 뜻이지요. 그러나 영어에서는 살아 있는 양을 가리킬 때는 mutton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죽은 양, 양고기 등을 가리킬 때만 씁니다. 이런 점에서 moutonmutton가치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잠시 상상력을 발동해 봅시다. 영국인이 프랑스어를 배웁니다. 프랑스인이 양을 가리키면서 mouton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국인은 ! moutonsheep이란 뜻이군하겠지요. 그런데 또 양고기 요리를 보면서 mouton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상응하는 영어가 없자, “! mouton이란 양고기를 가리키는 거군하겠지요. 그런데 살아있는 양이야 계속 Sheep을 사용할 테니 별 문제가 없겠지만, 양고기를 보고선 프랑스인에게 배운 단어를 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mutton은 원래 프랑스어와 달리 양고기란 뜻이 되었을 겁니다. 이는 mouton 이란 기호의 가치가 영어에 들어오면서 달라진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달라진 이유는 sheep이란 단어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마 양고기를 뜻하는 다른 기호가 있었다면 그 말은 안 쓰이거나 다른 뜻으로 쓰였겠지요.

 

이는 기호의 가치가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moutonsheep이 가리키는 것과 다른’(different), 그러나 아직 별도의 기호가 없는 대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mouton(mutton)의 가치는 sheep이나 영어의 다른 기호들에 의해, 즉 그 기호들과 다름을 표시하고 있지요.

 

소쉬르에 따르면 외래어만이 아니라 모든 기호들이 다 그렇다고 합니다. ‘강아지개새끼는 모두 개의 새끼를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건 다른 가치를 갖지요. 뒤의 말은 주로 욕을 할 때 사용하지요. 만약 이게 강아지와 같은 뜻이라면 이 단어를 별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단어가 쓰이는 것은 다른 단어와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다를 때만 그렇습니다. ‘개새끼란 기호의 가치는 강아지란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기호의 가치는 차이’(diference)에 의해 결정된다고 소쉬르는 말합니다. 이는 뒤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명제니 꼭 기억해 두십시오.

 

 

위 그림은 반 아이크(Jan van Eyck)아르놀피니의 약혼(The betrothal of Arnolfini)에 등장하는 강아지다. 기묘한 표정의 상인 아르놀피니와 이미 배가 남산만큼 부른 약혼자의 발 밑에서 얼쩡대는 중인 것을 끌어왔다.

그런데 아직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두 가지 평범한 제목을 생각중이다. ‘하나는 강아지’, 다른 하나는 개새끼’. 이 두 기호는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둘 다 작은 개, 혹은 개의 새끼를 뜻한다. 그러나 같은 지시체를 갖는 이 두 기호는 너무도 다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하지 못해서, 섞어 썼다간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기호는 자의적이기에 어떤 걸로 써도 별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두 기호를 대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자의적이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미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미 때문일까? 그렇지만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두 기호가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소쉬르 혁명의 효과

 

 

소쉬르의 언어학은 종종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비유됩니다. 다만 소쉬르 자신이 그런 혁명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칸트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어학자의 이런 주장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철학적 혁명에 비유되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 소쉬르가 언어학에 새로 제기한 명제들은 대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갖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합시다.

첫째,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개의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입니다. 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랑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물론 좋다’ ‘나쁘다는 판단 역시 언어의 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을 가져다 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나 판단 혹은 사고가 주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언어구조에 내장되어 있고, 거꾸로 주체들이 사고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이 언어구조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언어를 통해 의미나 사고, 판단을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자기가 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의 중심이 아닌 게 되며, 그 중심은 오히려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라는 객관적 구조에 있다는 게 분명해진 셈입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그 자신은 구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소쉬르의 언어학은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근대철학을, 그 중심을 해체함으로써 궤도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계의 중심을 다시 주체 외부로 옮겨놓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요소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소쉬르 언어학의 탈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아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체만으론 언어구조를 하나의 단일하고 자기완결적인 체계로 간주하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주체는 그 단일한 언어구조가 빚어내는 구조의 효과로 정의되게 됩니다. 이때 구조란 언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주체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게 되며,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됩니다. 즉 칸트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선험적 구조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주체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칸트와 다르지만(그래서 탈근대적이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판단의 단일하고 통일적인 구조란 점에서 칸트와 유사합니다(그래서 근대적입니다), 말하자면 주체 외부의 선험적 구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결국 선험적 구조를 주체 외부로 잠시 끄집어냈다가 다시 주체 내부에 옮겨놓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훔볼트의 칸트주의와 매우 유사하다는 데 주목합시다. 이런 한에서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근대적인 성격 또한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소쉬르 언어학의 내적인 모순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쉬르가 기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표기의라는 짝에 의해서입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이미 말했지요? 12개의 숫자 사이를 규칙적으로 도는 저 물건을 굳이 시계라고 할 이유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시계라고 쓰자고 일단 약속을 하면, ‘시계라는 기호의 의미는 저런 종류의 물건으로 고정됩니다. 즉 기호(기표)와 의미(기의) 사이의 관계는 약속에 따라 고정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시계라는 기호를 보면 세 개의 바늘이 하루 종일 도는 저런 종류의 물건을 언제나 떠올리게 됩니다. 저 물건이 있는 한 시계란 기호는 계속 존재할 겁니다.

 

반면 기호의 가치란 개념을 앞서 보았지요? 그때 개새끼란 기호의 가치는 강아지란 기호와의 차이(다름)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지요? 이 차이가 바로 개새끼란 기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기호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면 어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이는 소쉬르에게선 그다지 명시적으로 읽히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 사과 하나 둘로 쪼개 /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은)에 나오는 사과라는 기호와 빌헬름 텔은 총독이 아들의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사과를 향해 떨리는 가슴으로 활시위를 놓았다에 나오는 사과라는 기호를 비교해 봅시다. 앞 문장의 사과는 사랑’, 열매 맺는 가을’, ‘나눠갖다와 같은 기호들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결실, 사랑과 나눠가짐, 그것이 주는 정감과 온기가 잘 익은 사과 빛깔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반면 뒤 문장의 사과는 총독’, 이들의 머리 ’, 거길 겨누고 있는 (화살)’ 등의 기호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총독의 억압과 모짊, 아들의 머리를 겨냥해야 하는 명사수 아버지의 고뇌와 그것이 주는 긴장이 팽팽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사과는 말 그대로 기호들간의 관계에 의해 각자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과라는 동일한 기호에 새겨진 다른 기호의 흔적이 다른 것입니다. 위의 두 문장이 각각 나름의 소중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호는 일단 약속이 성립된 연후에는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질 거라는 앞의 명제와 모순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앞의 명제는, 언어구조 자체 내에서 기호의 의미를 언제나 고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체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그 고정된 의미를 갖다 쓰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 입장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기호의 의미는 구조 안에서 고정된 것이고, 개인이 사용하는 의미나 받아들이는 의미는 이러한 구조의 효과라는 것입니다. 반면 뒤의 명제는 이런 구조주의적 명제를 흔들고 있으며, 체계화된 기호의 망 속에서도 기호의 의미(가치)가 얼마든지 가변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예를 들면 데리다)에 의해 강조되고 부각됩니다(소쉬르에게 이러한 측면은 사실 매우 미약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순 역시 앞서처럼 근대적 측면과 탈근대적 측면이 소쉬르 언어학에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구조언어학의 기착지

 

 

소쉬르의 언어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흔히 프라하학파라고 불리는 언어학자들입니다. 야콥슨(R. Jakobson)과 트루베츠코이(N. Troubetzkoy)를 필두로 하는 이들의 이론은 대개 구조주의 언어학이라고 불립니다. 특히 야콥슨은 2차 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학교에서 지내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바로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이제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과 사고방식은 언어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로 흘러들어 갑니다. 여기서는 일단 우리 주제와 관련해 야콥슨의 이론적 입장을 최대한 간략히 살펴보고, 그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기호의 구조를 인간의 기호사용 능력으로 환원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쉬르를 다루면서 결합관계와 계열관계를 얘기했지요? 거기서 우리는 먹었다란 말을 예로 사용했습니다. 이때 먹었다라는 단어는 단지 하나의 단어만이 아닙니다. 먹었다면 무엇인가를 먹었을 거고, 또 누군가가 먹었다는 게 함축되어 있는 거니까요. 다시 말해 먹었다라는 말에는 누가 무엇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먹었다라는 말이 그와 인접한 다른 단어들을 대표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인접성을 갖는 기호들이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는 경우를 야콥슨은 환유’(metonymy)라고 합니다. 연기를 보면 불을 떠올리듯이, 서로 가까운(인접한) 관계여서 하나를 보면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때 단어는 생략될 수 있다는 거지요.

 

한편 먹었다라는 말은 무엇을이란 목적어를 갖습니다. “무엇의 자리에는 밥이 올 수도 있고, 빵이 올 수도, 물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유사성을 갖는 다른 단어들이 선택되고 대체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유사성을 갖는 기호들이 선택ㆍ대체되는 관계를 아콥슨은 은유’(metaphor)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언어의 두 가지 측면을 요약하고 있습니다(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 일반언어학이론), ‘사과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기호를 표시하는 경우 역시 은유의 예지요.

 

소쉬르의 결합관계와 계열관계가 언어의 구조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는 기호를 사용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실어증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라는 두 개의 축에 따라 실어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떠올립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 죽음’ ‘공포혹은 강도등등을 떠올리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는 이란 말에서 칼과 인접해 있는 다른 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접성 연관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의 사고구조가 환유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편 이란 말을 듣고 이나 송곳’ ‘포크등등 칼과 유사한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사성 연관입니다. 이런 분들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어증에도 이런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사성 연관이 파괴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접성 연관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유사성 연관이 깨진 사람은 예를 들어 남편 없는 여자를 표현하기 위해 과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저 여자는 과부란 말이지?”라고 물으면, “아니, 그 여자는 남편 없는 여자야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이런 유형의 실어증 환자는 유사한 단어를 찾아내 설명하거나 치환시킬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증상이 심해지면 환유적인 문법구조만 남게 되어 다른 단어는 다 잊어버리고 접속사만 남습니다.

 

반면 인접성 연관이 깨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명제를 구성해내지 못합니다. 그는 단지 한 단어를 비슷한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만 할 수 있지요. 예컨대 과부는 밤에 외롭다와 같은 명제를 만들지 못합니다. 특히 접속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지요. 다만 유사한 다른 단어를 찾거나 비유를 할 뿐입니다. 과부는 미망인이고, ‘남편 없는 여자고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언어를 구성하는 능력이 인간의 사고 안에, 즉 인간의 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쉬르가 생각했던 언어의 구조가 야콥슨에 이르면 인간의 선험적인 언어사용 능력이 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깨지면 사고하거나 판단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그런 능력이지요.

 

이것은 인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기호나 기호의 망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선 적극적인 측면을 갖습니다만, 동시에 또 하나의 선험적 주체를 가정 물론 주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즉 소쉬르의 언어학이 갖고 있는 칸트주의적 요소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야콥슨은 훔볼트의 칸트주의에 근접하는 셈입니다. ‘주체 없는 주체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레비-스트로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조차 야콥슨을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고 야콥슨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런 측면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특징이 됩니다.

 

다른 한편, 야콥슨은 소통(communication)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소통이론의 관점에서 언어학과 시학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킵니다. 언어학과 시학이란 논문에 나오는 다음 도식은 매우 유명합니다.

 

    상황    
발신자 ―― 전언 ―― 수신자
    접촉    
    코드    

 

 

이 그림에 기초해 그는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정의하지요(이는 그냥 넘어갑시다). 여기서는 소통이론에 따르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전해야 할 메시지(전언)가 있다는 데 주목합시다. 그리고 메시지를 만들거나 전달된 메시지를 해독할 코드가 있습니다. 이런 도식에서 언어는 어떤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는 수단이고, 그로 인해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전달되며, 코드는 그런 전달 가능성을 미리 확보해 주는 조건입니다.

 

결국 이런 요소들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요인들이고, 언어학은 이런 보편적-과학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 됩니다. 여기서 진리는 메시지의 참뜻, 즉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보내려 한 의미고, 그걸 받아보는 수신자는 진리를 읽어내는 자가 됩니다. 코드는 메시지에서 진리를 읽어내는 수단이며, 결국 진리가 소통구조 전체에서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론적 구조에서 진리 주위를 맴도는 근대적 과학주의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컨대 야콥슨의 언어학은 특이한 방식으로, 소쉬르 언어학을 근대적인 주체철학과 과학주의의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소쉬르 안에 있는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 가운데 전자를 확대하면서 후자를 약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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