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섬 속의 섬, 우도에 이끌리다
어제 오후에 성산읍으로 달릴 때 하늘이 잔뜩 흐려졌고 바람까지도 심상치 않게 불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며 달렸는데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정말 푹 잔 느낌이다. 이곳은 그래도 호텔이란 이름에 걸맞게 깨끗하고 시설도 좋은 편이며,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다. 6시에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커튼을 젖히고 비가 오는지를 살폈다. 어제 발표된 일기예보엔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비가 오는 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전히 비가 온다면 이곳 퇴실 시간인 11시까지 뒤비져 놀다가 나가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날씨를 확인한 건데, 다행히 하늘엔 구름만 껴 있을 뿐 비는 그쳤더라. 무작정 떠난 여행치고는 여러 상황들이 나의 여행을 돕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국토종단을 처음 시작할 때 목표 유달산에서 천지신명께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봐주세요!’라고 빌었는데, 그처럼 이번엔 굳이 제주의 만신께 빌진 않았지만 여러 만신들이 이처럼 도와주고 있었던 거다. 참 나란 녀석, 인복만 많은 줄 알았더니, 신복도 오사게 많다니까^^
▲ 2009년 국토종단을 시작하며 유달산에 올라 천지신명님께 빌었다.
어쩌다 우도
그런데 그때 불현듯 ‘여기까지 왔는데 성산일출봉은 2011년에 올라갔으니, 이번엔 우도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제주여행 자체가 우발적으로, 충동적으로 시작되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날라 왔고, 그때의 기분에 따라 갑자기 자전거를 빌리게 되어 자전거 여행으로 확정되며 도무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분명 내 의지에 따라 일어난 상황이겠으나, 어떤 도도한 흐름에 맞춰 그저 흘러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달려가 보자라는 심정으로 마구 달리다 보니 이틀 사이에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 하루 만에 오게 됐으며, 지금은 어찌 어찌 성산읍까지 흘러오게 됐다. 이건 뭐 기분 내키는 대로 흘러왔더니 제주의 3/4 정도를 이틀 만에 달린 셈이다. 우연과 의욕이 스파크를 튀기며 빚어낸 결과물은 역시나 예상을 완전히 빚나가는 거였다. 이래서 내가 ‘즉흥적인 여행’,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이런 상황에서 매우 갑작스레 ‘우도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까지 스친 것이니, 과연 이 생각이 나를 또 어드메로 이끌어갈 것인가?
▲ 일어날 때만 해도 전혀 생각도 없던 우도에 갑자기 홀렸다.
우도로 들어가는 배는 7시 30분부터 있으며 30분 단위로 배정되어 있더라. 그리고 작년 8월 1일부턴 개인 자가용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뭐 나야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륜차 및 화물차는 별도 문의바랍니다’라는 주의사항이 걸렸다. 자동차는 그러려니 했지만, 자전거까지 통제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객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오늘 배가 운항하는지, 자전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오늘도 정상적으로 배가 운항하고 있으며, 자전거는 별도의 비용(왕복료 1.000원)만 내면 된다고 하더라.
▲ 우도에 갑자기 홀려 열심히 패달을 밟았다.
닥여의 정신으로 우도에
‘닥공’이 전북현대의 모토지만, 나는 지금 ‘닥치고 여행’의 경지를 시전하고 있는 셈이다. 좋다, 이번 여행의 모토를 매우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니. 그런데 막상 전화통화를 하며 우도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맘은 무지 바빠지더라. 지금 시간은 8시 40분인데 이리저리 준비하고 부리나케 터미널로 달려가면 9시 30분 배를 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머리에 비누칠을 한 상태로 몸까지 한꺼번에 씻는 군대식 샤워의 신공을 발휘하여 후다닥 씻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까지 마쳤다. 그때 시간은 이미 9시 6분이었고, 다음지도로 확인해본 결과 호텔에서 터미널까진 20분 정도 걸리는 걸로 나와 있었다. 마치 기록 경신을 해야 하는 운동선수처럼 분초를 다투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힘껏 페달을 밟아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앞뒤 볼 것 없이 이럴 땐 젖 먹던 힘까지 써야만 한다. 그랬더니 터미널엔 무려 9시 16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분 거리를 10분 만에 주파한 셈이다. 역시 사람은 간혹 이처럼 초인적인 힘이 나올 때가 있다.
▲ 여기서 표를 끊는다. 바로 옆엔 잠수함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 있더라.
이른 아침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표를 끊고 있더라. 우도에 들어가려면 표를 끊기 전에 승선신고서를 써야 하고 배에 탈 때 신분증과 함께 승선신고서를 내야 한다. 카자흐스탄에 갈 때 이런 신고서를 썼던 적이 있기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의 섬에 들어가는데도 이런 걸 작성해야 한다니 좀 의외긴 했다. 아마도 범죄자나 자살자가 섬에 숨어들어 은둔할 수 있기에 이런 정책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표는 자전거 왕복료까지 포함해서 9.500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이처럼 ‘닥여’는 여행을 하면서도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제주 속 우도여행까지 하게 될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계획이 아닌 닥치는 상황에 따라 그때 드는 감정에 따라 가보는 것이기에, 매우 스펙터클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런 여행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버티어온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왠지 이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몸을 맡기다 보면 그제야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 이제 우도로 들어갑니다. 아이 신나라.
인용
'연재 > 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8. 후회 없던 우도 소풍에서의 점심식사 (0) | 2019.10.21 |
---|---|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7. 콧바람 쐬며 우도에 왔어요 (0) | 2019.10.21 |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5. 존재가 선물이 되는 순간 (0) | 2019.10.21 |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4. 지도 들고 떠날 것인가, 스마트폰 들고 떠날 것인가 (0) | 2019.10.21 |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3. 이중섭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있다 (0) | 2019.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