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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4. 지도 들고 떠날 것인가, 스마트폰 들고 떠날 것인가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4. 지도 들고 떠날 것인가, 스마트폰 들고 떠날 것인가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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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지도 들고 떠날 것인가, 스마트폰 들고 떠날 것인가

 

 

이중섭에 대해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이번 제주여행에 필수 코스로 넣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막상 이중섭미술관에 들어가 보니 그가 내게 다가와 인생담, 예술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소회 등을 맘껏 얘기해주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정현종 시인사람이 온다는 건 /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처럼 그의 무수한 얘기들이 나를 흔들었다.

2011년에 사람여행을 하며 느꼈던 사실과 같이, 그 장소가 누군가와의 추억으로 채워지면 그 장소는 뭇 장소가 아닌 그 장소로 기억된다. 거기엔 우리가 함께 나눈 숨결과 이야기들이 섞여들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중섭과의 만남과 대화는 그 장소를 아주 각별한 장소로 남게 했고 내 속에 감춰진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순간이 사람이 선물이 되는 순간이다. 이따금 삶이 팍팍하다 느껴질 때면, 막막하다 느껴질 때면 이곳을 찾아 이 순간의 느낌을 되새겨봐야겠다.

 

 

소의 울음소리 같은 이중섭 선생님의 이야기를 참으로 잘 들었다.  

 

 

 

정방폭포는 다음으로 미루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나와 시간을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당연히 근처에 있는 정방폭포에 가야 했지만, 어제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대정읍에서 서귀포까지 늦은 시간에 달렸던 탓에 우선은 잘 곳이 있나 확인해봐야 했다. 그나마 서귀포에서 웬만큼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곳 중에 표선면이 큰 규모의 마을이었기에 그곳을 숙박앱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기엔 마땅히 잘 만한 곳이 없더라. 그래서 좀 더 욕심을 내어 성산읍 근처로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있는 대표 관광지답게 숙박시설이 참으로 많더라. 그래서 아주 적당한 가격의 호텔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을 예약했다.

이로써 앞으로 4시간 30분 정도를 더 달려야 하고 중간에 점심밥까지 먹으면 시간은 더 늦어질 것이다. 정방폭포까지 들렸다가 가면 어제처럼 늦은 저녁까지 달려야 할 게 분명했고, 오늘은 저녁부터 비 예보까지 있기에 그곳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우선은 표선까지 가서 점심부터 먹고 보기로 했다.

 

 

표선으로 달려가는 길. 가까울 것 같았는데 전혀 가깝지 않더라.  

 

 

 

지도 들고 떠난 여행과 스마트폰 들고 떠난 여행의 차이

 

그러고 보면 지금의 제주여행과 여태껏 떠났던 도보여행과의 차이는 확연하다. 물론 걷느냐, 자전거를 타느냐와 같은 이동수단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건 바로 스마트폰의 여부이고 그 여부에 따라 예측 가능한 길을 가느냐, 미지의 세계를 더듬듯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 도보여행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었다. 지도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 가면 큰 마을이 있는지 만을 알려준다. 그 외엔 모든 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 모르는 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니 어떤 때는 잘 곳을 구하지 못해 9시가 넘도록 벌벌 떨어야 했고, 어떤 때는 생각보다 길이 멀어 무작정 손을 들어 히치하이킹을 해야만 했으며, 어떤 때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가까스로 잘 곳을 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은 미지의 세계를 기지旣知의 세계로 바꿔주는 최첨단의 도구다. 지도를 검색하면 그곳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순식간에 알려준다.

이렇게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면 지도를 가지고 떠난 여행보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 훨씬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이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의 본질엔 위배된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은 익숙하고 반복되던 환경을 벗어나 불편하고 한 번도 마주쳐본 적이 없는 환경에 스며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려면 계획은 어그러져야 하고, 예측은 빗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과 어우러지게 되고 상상도 못한 상황 속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럴 때 여태껏 나는 ~~한 사람이야라는 완고한 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나에게 ~~한 모습도 있구나라는 생소함과 맞닥뜨린다. 고정된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해가고 흘러가는, 상황 속에 나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본질에 더욱 더 충실한 여행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 가는 여행이라 생각하고, 이번 여행은 그에 비하면 좀 더 편하게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 생각한다.

 

 

국토종단 종단 때 지도 달랑 들고 다니던 때와 2014년에 아이들과 남한강을 도보여행을 할 때.

 

 

인용

목차

사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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