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관상학은 우리의 心身이 일원적이라는 사고, 그리고 우주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다르지 않다는 사고에 기반해 있다.
화가로서의 세잔의 초기 역사는 자신의 常套型과의 싸움의 역사다. 그의 의식은 새로운 인식을 원했다. 그런데 기성품으로서의 그의 두뇌적 의식은 줄곧 그에게 기성품적인 표현을 베풀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캔버스 위에서 자기를 조롱하는 듯한 기성의 상투형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내적으로 자존심이 강했던 세잔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형상들을 파괴시키는 데 보냈다. (……) 그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기를 열망하는데, 그것을 할 수 있기 이전에 그는 끊임없이 대가리가 다시 살아나는, 마치 히드라와 같은 상투형과 싸워야 했다. (……) 상투형과의 투쟁, 이것은 세잔의 그림들에서 가장 분명한 현상이다. 그 투쟁으로부터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고, 조각 난 가루들이 펄펄 난다. 세잔의 추종자들이 아직도 모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먼지와 기록들이다. 세잔은 상투형이라는 진지를 날려 보내기 위해 수많은 폭발을 감행한 것이다. -D.H 로렌스 「세잔과 상투형」
불교에서는 諸法無我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我’라고 할 만한 자성이 없다는 것. 이를 다른 말로 ‘空’하다고도 한다. 이는 존재가 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는 변화와 관계의 역동적 배치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98쪽
늙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늙어감이 진행되는 불안정한 流體로서 나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고정된 점(‘주체’)으로부터 늙음의 특징을 추출해 내는 방식으로 나의 늙음을 사고한다. 이 경우 늙음은 늘어가는 잔주름과 검버섯, 질병 등으로 재현된다. 인공적으로 주름을 펴서라도 동안을 유지하려 하고, 호르몬 주사를 맞아 가며 늙음을 지연시키려 하는 건 ‘늙어감’이라는 변화를 나의 외부에 두고, ‘늙음’을 몇 가지 특징들로 재현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종의 히스테리다. 늙음을 하나의 새로운 생성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특정한 상태로 재현하는 자에게 ‘늙어감’이란 현실은 ‘젊음’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비추어 부정된다. 하지만 젊음은 젊은이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늙음 또한 늙은이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젊은이에게나 늙은이에게나 시간은 매 순간 새롭게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기에 젊음도 늙음도 ‘재현’될 수는 없고, 다만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늙는 것이 아니라 늙음이 나를 만들어 간다. 늙음은 새로운 시간을 열어 주는 또 다른 잠재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예순에 앳된 스무살의 얼굴을 갖고자 하는 건, 미안하지만 늙음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모욕이다. -102쪽
한 학인이 물었다. “추위나 더위가 닥쳐오면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
동산이 대답했다. “어째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은가!”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란 어떤 것입니까?” “추울 때는 그대를 몹시 춥게 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몹시 덥게 하라!”
추위나 더위를 피하려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저편을 상상하는 대신 추위와 더위가 있는 바로 그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라! 학인은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런 별천지를 상상했던 모양인데, 동산 스님은 그러한 망상을 여지없이 깨고 만다. 여기 아닌 어딘가에 특별한 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야 말로 지독한 망상이다. -109쪽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닌 다양한 능력과 욕망을 다자원적으로 구성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지 모든 구성원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능력’이 아닌 것이다. -115쪽
작가가 시를 짓는다기보다는 작가를 관통한 천지만물이 시가 되어 흘러나온다.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를 빌려 표현한다! 고로 만물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열지 못하는 자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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