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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본문

책/한문(漢文)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건방진방랑자 2020. 4. 15.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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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사회적 출구가 닫혀 있는 양인수

 

주영염수재의 주인 양인수는 개성의 사족士族이다. 개성은 전 왕조인 고려의 수도인지라 조선 시대 내내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따라서 개성 사족은 비록 사족이라고는 하나 그 처지가 영남이나 기호畿湖[각주:1] 사족과는 지체가 달랐다. 그래서 인삼 밭을 경영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재理財 활동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삼은 대청 무역에서 우리 측이 중국에 가지고 간 물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양인수의 물적 기반, 그리고 그런 물적 기반으로 인해 가능했으리라 짐작되는 그 서화골동 취향은 일정하게 당대에 이루어진 대청 무역의 상업적 잉여와 연결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기는 하나, 양인수의 서화골동 취향이나 일견 명리를 돌아보지 않는 듯한 한가로우며 탈속적인 생활 태도는,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서울의 명문가 집안)의 고답적이고 여유로운 예술 취향과는 내면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양자의 사회 정치적 조건의 차이에서 연유할 터이다. 경화 세족과 달리 양인수는 소외된 지역의 사족이다. 그는 비록 경제력은 있으되 사회적ㆍ정치적 출구는 닫혀 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처지는 서얼이나 중인층의 사회적 처지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양인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권태감, 그리고 그 하릴없어 함은 바로 이런 그의 사회적 처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락은 얼핏 보면 일사ㆍ고인의 한가롭고 유유자적하는 사람을 그려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양인수 일사ㆍ고인이 아니다. 그가 일사ㆍ고인이 아님은 이미 1에서 넌지시 시사된 바 있다. 더군다나 거문고ㆍ검ㆍ향로ㆍ술병 등 쭉 열거하고 있는 기물들 가운데 책이 들어 있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책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고사처럼 보이지만 기실 고사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양인수의 삶에는 어떤 심각한 균열, 내면과 외면의 심각한 분열이 존재한다. 양인수는 사회적 출구가 닫혀 있음으로 인해 무늬만 일사ㆍ고인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돈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사회적 출구가 닫혀 있을 때,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향락이나 유흥이 아니면 혹 양인수처럼 예술 취향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기에 실로 무료하고 권태롭다.

 

 

 

글을 통해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드러내는 방법

 

끝으로, 표현미에 대해 몇 군데 살펴보자. 연암은 기물을 나열하면서 무엇 하나 무엇 하나라는 식()으로 하나라는 말을 무려 여덟 번이나 되풀이해 사용하고 있다(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 이 말은 사물의 구체성을 부각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동시에 이 단락 전체가 풍기는 권태로움의 뉘앙스를 증폭하는 데 언어미학적으로 일조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하나라는 말을 똑같이 몇 번이고 되풀이함으로써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이 단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획되는데, 그 첫 번째 부분과 둘째 부분이 똑같이 벌렁 눕는다는 말로 종결된다. ‘벌렁이라는 말의 원문은 퇴연頹然이다. ‘퇴연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물이 무너지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양인수가 권태로운 나머지 자기 몸도 못 가눈 채 벌렁 쓰러져 잠드는 광경을 약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만하다.

 

 

  

 

 

  심사정, 유선도船遊圖.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5. 총평

 

  1. 畿湖: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와 황해도 남부 및 충청남도 북부를 포함한 지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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