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본문

책/한문(漢文)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건방진방랑자 2020. 4. 15. 03:36
728x90
반응형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양군은 성품이 게으르고, 깊은 곳에 거처하길 좋아하는데, 권태로워지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오피궤烏皮几[각주:1] 하나, 거문고 하나,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각주:2] 하나, 고서화古書畵 두루마리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는 사이에 벌렁 눕는다.

梁君性懶而好深居, 倦至輒下簾, 頹然臥乎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之間.

 

매양 자다 일어나 주렴을 걷고 해가 어디쯤 걸렸는지를 보는데,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언뜻 옮겨가고 울타리 아래 한낮의 닭이 처음 운다. 그러면 안석에 기대어 검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 몇 곡조를 타 보기도 하고, 한 잔 술을 조금씩 마시기도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혹은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고, 혹은 옛 기보棋譜[각주:3]에 따라 바둑돌을 놓는데, 몇 판을 두다가 그만두면 하품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눈꺼풀이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벌렁 눕는다.

每睡起, 揭簾看日早晏, 則階上樹陰乍轉, 籬下午鷄初唱矣. 於是乎據几看劒, 或弄琴數引, 細吸一盃, 以自暢懷. 或點香烹茗, 或展觀書畵, 或棋按古譜, 擺列數局已焉, 久來如納潮, 睫重若垂雲, 復頹然而臥.

 

객이 찾아와 문에 들어오면 주렴이 조용히 드리워져 있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풍경風磬[각주:4]이 절로 운다. “인수! 인수!”하고 서너 번 주인의 자를 부른 후에야 양군은 일어나 앉아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보는데, 해는 아직도 서산에 걸려 있다.

客至入門, 則簾垂寂然, 落花滿庭, 簷鐸自鳴. 字呼主人三四聲, 然後起坐, 復觀樹陰簷影, 則日猶未西矣.

이 단락에 와서 비로소 집주인이 등장한다.

집주인은 몹시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권태로워지면 방에 벌렁 드러눕고, 자다가 일어나면 해가 어디쯤 걸렸나 하고 살핀다. 유감스럽게도 해는 아직 중천에 있다. 그는 하릴없는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옮겨 가는 모습이며 한낮에 우는 닭 울음소리 따위에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그것도 곧 싫증이 난다. 그러면 이제 방에 잔뜩 늘어놓은 기물들, 이를테면 거문고라든가 검이라든가 향로라든가 다관이라든가 고서화라든가 바둑판이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 소일을 한다. 검을 들고 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그게 싫증이 나면 이번엔 거문고를 몇 곡조 타 보기도 하고, 술을 한 잔 따라 홀짝홀짝 마셔 보기도 하고, 좋은 향을 피워 놓고 가만히 차를 마셔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무료해진다. 그래서 이번엔 기보를 봐 가며 혼자 바둑을 두어 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권태가 엄습하면서 하품이 나고 졸음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벌렁 드러누워 잔다. 이때 객이 찾아와 주인을 찾는다. 꿈결에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앉아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보는데, 아직도 저놈의 해는 지지 않고 서산에 걸려 있다.

 

이처럼 이 단락은 집주인의 무료한 삶, 하릴없음을 곡진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얼핏 보아 집주인은 세속을 벗어나 산중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고인高人ㆍ일사逸士처럼 보인다. 그가 거처하는 방 안에는 온갖 고상하고 아취 있는 기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갖추어짐1에서 집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말과 서로 호응한다. 그가 보여주는 이런 취미는 이른바 골동ㆍ예술 취향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런 취향은 특히 18세기 서울의 사대부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개성은 서울과 가까운 곳이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예술 취향이 개성으로까지 확대되어 간 것일 터이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5. 총평

 

 

 

 

 

  1. 오피궤烏皮几: 검은 염소 가죽으로 싼 작은 궤석几席(=안석)을 말한다. 몸을 기대는 데 사용했다. [본문으로]
  2. 다관茶罐: 찻주전자, 즉 찻물을 끓이는 그릇을 말한다. [본문으로]
  3. 기보棋譜: 바둑 두는 법에 대해 기술해 놓은 책이다. [본문으로]
  4. 풍경風磬: 처마 끝에 매다는 작은 종을 말한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려 정취 있는 소리를 낸다.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