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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국론, 교사론 - 3.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기에 풀어둬도 될까 본문

책/교육(敎育)

교육입국론, 교사론 - 3.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기에 풀어둬도 될까

건방진방랑자 2022. 2. 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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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기에 풀어둬도 될까

 

 

존 듀이 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그런데 진보주의교육이 왕왕 자유주의로 오해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지상의 테제로 삼는 성향이 있다. 개체지상주의는 결국 방종으로 귀결된다. 몬테소리(Montessori), 섬머힐(Summerhill)류의 열린학교가 초창기의 건강한 혁명적 성격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결국 방종훈육의 결여’, ‘결과적 진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 교육철학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의 리버랄리즘적 교육관의 계승자들이 시행한 교육방법론의 파탄은 미국의 공교육을 망쳐버리고 미국 사회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공헌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존 듀이의 사상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생은 결코 온전한 개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듀이 철학이 역동적 과정을 중시하지만, 교육이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신화적 예찬에만 머물게 되면 아무런 목표설정이나 휴먼빌딩(human building)’의 결실이 부재하게 된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초창기의 대안학교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던 제1의 이유였다. 어설프게 혁신교육을 외치는 자들이 흔히 말한다: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므로 그 온전한 개체의 가능성이 스스로 발현되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말인즉 매우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학생의 현실태는 온전한 개체가 아니다. 학생은 교육받기 위해서 학교에 오는 것이다. 목가적인 에밀(Émile)의 체험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온전한 개체라는 것은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설정의 이데아티푸스(ideal type, 이상형)적 좌표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학생의 현실태일 수는 없다.

 

 

슈타이너 학교에서도 가능성은 이미 개인 안에 있다는 말을 했었다. 이 말을 나도 좋아한다.  

 

 

 

길거리에 가득 찬 것이 다 성인

 

맹자도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 했고, 나는 성인과 동류(同類)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양명의 제자들은 길거리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성인이다[滿街人都是聖人]”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조선의 유자 최한기(崔漢綺, 1804~77)의 말대로, 인간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지 현실태의 승인은 아니다.

 

인간은 교육되어야 한다. 혁신학교의 자발성은 교육적 계기의 효율적 방법론을 말한 것이지 자발성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를 두자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무아적 자기규율의 난제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협력하는 인간(homo cooperativus)’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지리산 여행은 우리에게 협력하는 인간이 무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대안학교와 규율

 

이러한 교육의 수행자가 바로 교사이다. 모든 낭만주의 교육, 열린 교육, 자유 교육의 낭패는 바로 교사와 학생을 완벽하게 평등한 개체로 설정하는 천진스러운 낙관주의에 있다. 나의 공부론은 이러한 낙관론을 거부한다.

 

모든 성공적인 대안학교ㆍ혁신학교는 자율적 규율성을 강조한다. 내가 경험한 김제의 지평선중ㆍ고등학교는 매우 실험적인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놀라운 자발적 규율성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토록 학생들이 예절에 밝은 것이다.

 

 

 

[검단산]에 갈 때 아이들은 스스로 교칙을 정해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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