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담: 소통하기와 안회의 삶
소통이란 서로의 자리가 옮겨 간다는 것
techne(본질을 들여다본다)는 당연히 소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과의 만남이야말로 ‘테크네의 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념으로 상대를 틀지어서는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나의 맘을 비우고 서로가 다른 생각이나 위치에 있음을 느끼며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왕주 선생님은 “상대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위치가 조금 옮겨집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나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죠. 그 상태에서 나 또한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러면 상대방 또한 어떤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위치가 옮겨지고 옮겨지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멈추든 먼 거리에 멈추든 멈추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통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위치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소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라고 소통과 비소통을 설명했다.
다이알로그Dialog라는 말로 알려진 ‘dialogos’는 ‘dia(둘)+logos(진리)= 두 개의 진리’라는 라틴어의 합성어다. 각자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의 생각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다. 각자는 각자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진리체계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고, 그런 변화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상대방의 생각도 변하게 할 수밖에 없다.
소통이란 극단적으로 말해 서로 같은 문법체계를 지니고 있거나, 사고가 비슷해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자』 「소요유」편의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팔기 위해 월나라로 갔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宋人資章甫而適諸越, 越人斷髮文身, 无所用之.).”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서로의 사고가 다르다고 인정한 순간, 소통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월나라에 남아 소통을 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 근심 없이 대화가 가능한(실제론 소통이 아닌 독백) 송나라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기에 소통은 어찌 보면 존재를 건 도전인지도 모른다.
“Education(교육)이란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낸다는 뜻입니다. 밖에 있는 완벽한 진리를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지니고 태어난 완벽한 것을 끄집어낸다는 뜻이죠.”
이왕주 선생님은 “사람은 완벽하게 태어납니다. 그렇기에 그 완벽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라고 말해주셨다.
이건 ‘사람의 본성은 자연의 완벽함을 타고 났다. 하지만 기질의 편벽됨에 가려져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그건 혹 태양은 늘 있지만,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하기에 기질을 갈고 닦아 타고난 완벽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성리학 논리와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교육을 본다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선생이 하는 일은 학생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
교육이 나 자신이 타고난 완벽함을 끄집어내는 것이라 한다면, 선생이 하는 일은 학생에게 ‘너 자신의 완벽함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선생이 학생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선생과 학생이 함께 소통함으로 함께 성장해 갔다’는 말로 수정되어야 한다. 핵심은 ‘어떻게 고민하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건 강압적인 행동이나 억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 또한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치열함을 보일 때, 학생도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준규쌤이 이야기한 줄탁동시啐啄同時(알을 깨고 새끼가 나오려 할 때, 부모도 알을 쪼아 돕는 것)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에게 어떤 도움을 제공하느냐 그게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안회의 앎을 위한 치열한, 그런 제자의 죽음에 대성통곡한 공자
『논어』 「옹야」9편에 “안회는 어질구나! 한 바가지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사네. 보통 사람이라면 근심거리가 그치질 않을 텐데, 안회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 안회는 어질구나! (子曰:“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안회라는 제자를 좋아했다. 배움에 대한 욕구도 남달랐으며 어떤 것을 알게 되면 알게 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삶과 일치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제자가 일찍 죽고 말았다. 논어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말했다(顔淵死. 子曰:“噫! 天喪予! 天喪予!” -「先進」8).
안연이 죽자 공자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애통해 하였다. 제자들이 “선생님이 너무 극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자, 공자는 “이런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애통해할 것인가!”라고 말했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子慟矣.” 曰:“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先進」9).
이런 장면에서 우린 진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 환경 탓 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산 안회라는 제자와 그 제자를 인정하며 맘껏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던 공자라는 선생의 만남이 빚어낸 애절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길게 살아도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삶인데, 맘껏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현재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회와 공자의 모습은 체면치레 하느라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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