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갖춘 군사독재②
출발부터 그랬으니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당연히 정치인과 관리에 대한 사찰이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기구로 출발했던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총괄하게 된다. 교정도감을 상설화하면서 최충헌(崔忠獻)은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신의 적절한 직함도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정도감의 책임자, 곧 교정별감이다(1205년에 그는 꿈에도 그리던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낡아빠진 문신의 최고위직이란 이미 그에게 어울리는 직함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정도감은 무신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 일본사에 비유하면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때 설치된 중앙정보부,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신정권은 시대를 초월한 독재권력의 전형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렇게 권력이 안정되자 최충헌(崔忠獻)은 비로소 다른 분야에도 신경쓸 여유를 얻게 된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으나 중앙 권력이 확실한 만큼 버텨낼 수 있고 차차 질서를 잡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과제는 권력의 태생적인 결함, 즉 물리력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는 취약점을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문신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 나온 노선 전환이다(그런 탓에 이규보는 권력에 아부한 지식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왕조 시대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비난이다).
시대를 앞서 ‘군사파쇼’의 기틀을 마련했던 덕에 최충헌(崔忠獻)은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는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비록 1217년에는 다시 들고 일어난 사원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승려 800명을 집단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2년 뒤인 1219년에 그는 암살이나 살해가 아닌 정상적 죽음을 맞았고, 교정별감이자 고려판 중앙정보부장이자 한반도판 쇼군의 지위는 아들 최우(崔瑀, ? ~ 1249)에게로 순조롭게 상속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무신정권이지 이제 고려는 왕국이 아니라 깡패 집단이 지배하는 나라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 보스는 대물림이 가능하니까 단순한 ‘조폭’ 정도가 아니라 마피아 수준이다. 무신 집권자로서는 처음으로 권력을 무난하게 상속받았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아버지 최충헌이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급급했다면, 최우는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창조적인(?) 독재정권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창조한 기구는 정방(政房)과 서방(書房)인데, 이름부터 ‘청(廳, 관청)’이 아닌 ‘방(房)’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둘 다 최우의 집안에 설치된 지배기구다. 기능 면에서 정방은 쉽게 말해 집안에 있는 교정도감에 해당한다. 힘으로 정상에 오른 권력자가 흔히 걱정하는 것은 바로 잦은 바깥 출입에서 변을 당하는 일일 테니까 최우는 아예 집안에서 모든 국정을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 군사파쇼의 시대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설 무렵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무신정권의 일본 버전이라 할 바쿠후가 성립했다. 그림은 바쿠후 정권을 낳은 헤이지의 난이라는 내전의 장면인데, 국왕과 중신들만을 처단하고 손쉽고도 평화롭게(?) 집권한 고려의 무신들에 비해 일본의 무사들은 서로 간에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서 군사파쇼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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