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의 시대: 윗물②
반란은 그럭저럭 진압되었지만 이제 고려는 본격적인 하극상의 시대를 맞았다. 전통적인 서열은 이미 무너진 데다가 누구보다 서열을 특히 따지는 문신들도 거의 씨가 말랐을 정도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다. 이듬해인 1174년에는 서경유수인 조위총(趙位寵, ?~1176)이 들고 일어나 북부 40여 개의 성을 장악하고 개경까지 쳐들어 오는 기세를 떨친다. 비록 개경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금나라에까지 구원을 요청하며 서경에서 2년간이나 버텼다(당시 금나라는 40여 개 성을 바치겠다는 조위총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가 보낸 사신을 고려 정부에 인계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국정의 총책임자도 룸살롱에만 틀어 박혀 있을 순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압 사령관으로 서경에 간 이의방은 오히려 반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 ? ~ 1179)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결국 조위총의 난은 윤인첨(尹鱗瞻)이 맡아서 진압했는데, 그는 바로 윤언이의 아들이었으니 대를 물려가며 서경 세력과 맞싸운 셈이다(문신으로서 어렵게 살아남은 그는 여러 차례 무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는데, 이를 계기로 파평 윤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정중부는 아들 덕분에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그 아들 덕분에 안락한 노후를 맞지 못하게 된다. 그 자신은 칠십 줄에 들면서 권력 욕심을 버렸지만 아들 정균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권력의 단맛을 보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했을까? 정균은 자신이 죽인 이의방을 본받아 왕실과 혼맥을 맺으려 했다가(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했다) 무신 세력 내부에서조차 거센 반발을 산다. 5년 동안 권력을 누리던 정중부 가문은 결국 1179년 스물네 살의 경대승(慶大升, 1154 ~ 83)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가가 모두 도륙당하면서 칼로 일어난 죄과를 호되게 받는다.
나이가 적은 것도 특이하지만 경대승은 여러모로 다른 무신들과는 다른 이색적인 인물이다. 그는 음서(蔭敍)를 통해 무관직에 오를 만큼 가문도 좋았고, 정중부의 난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신을 적대시하기만 했던 이전의 단순무식한 무신들과 달리 문신들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런 탓에 대다수 무신들과 등을 돌리게 된 그는 집권한 직후 중방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새로 도방(都房)을 설치했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친위대 조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을 알 만큼 균형잡힌 사고를 했던 듯하다. 비록 중방 정치 대신 도방 정치를 열었지만 도방을 오락장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고 문신들을 기용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아버지가 빼앗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는 5년 동안 집권하다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무신정권은 단순한 쿠데타 권력에서 벗어나 그 시기 일본의 바쿠후처럼 집권 능력을 갖추게 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고려 왕실에게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정권을 끝장낼 수도 있는 찬스였다. 그 찬스를 무산시켜 버린 것은 못난 왕 명종이다. 이름만 왕일 뿐 어느덧 꼭두각시로 지내는 데 익숙해진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자 자유를 누리는 대신 오히려 겁을 집어먹었다. 그래서 명종은 부랴부랴 새 주인을 찾는데, 하필이면 바로 김보당의 난에서 자신의 형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이었으니 얄궂지 않을 수 없다(당시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경대승(慶大升)을 피해 고향인 경주로 달아나 있던 이의민은 이렇게 해서 화려하게 중앙 무대에 복귀했다. 명종은 과연 새 주인을 맞아 만족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의민은 그의 주인 노릇을 끝까지 책임졌다. 자신의 아들들과 더불어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을 뿐 아니라 1196년 그가 최충헌(崔忠獻, 1149~1219)에게 살해당하면서 이듬해 명종도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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