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②
집권 후 수십 년쯤 지난 17세기 중반에 이르자 에도 바쿠후의 직할 영지에서 생산되는 쌀 생산량은 전국 총 생산량의 4분의 1에 달했다. 거느린 직속 병력만도 무려 8만 명에 달했다. 이제 에도 바쿠후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체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문에 세습되는 쇼군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은 중앙집권이 가능해도 국방은 그렇지 않다. 한반도의 1.5배가 넘는, 결코 작지 않은 일본의 영토를 수비하는 일이 중앙의 지시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게다가 사소한 일들까지 일일이 중앙이 간섭하기도 어렵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정치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했으면서도 드넓은 중국 대륙을 수비하기 위해 군사적인 면에서는 지방분권을 실시했다. 그것이 곧 당의 번진이며, 명ㆍ청의 번왕, 번국이었다. 때로는 이 번국들이 강성해져 중앙 정부를 위협하는 일도 있었지만 국경 수비를 위해서는 그런 제도가 불가피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번국들을 거느렸기에 ‘제국’이라 불릴 수 있었다.
중국에 비해 한참 작은 천하 였으나 일본도 ‘작은 제국’의 체제를 취해야 했다. 다만 ‘큰 천하’인 중국의 경우에는 북방 이민족이라는 대외의 적을 수비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일본은 변방의 다이묘와 유력 가문이라는 대내의 적(반란)을 수비한다는 점이 달랐다. 부케쇼핫토는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처자를 인질처럼 에도에 거주시켜 변방을 제어하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제도화되면서 에도 바쿠후는 변방에 번흥(중국의 번진, 번왕과 같은 글자이지만 일본식으로 읽으면 ‘한’이다)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번들은 각 지방의 수비는 물론 행정까지 담당했으며, 중앙의 바쿠후를 그대로 축소한 것과 같은 통치 기구를 갖추었다. 이것이 곧 바쿠한(幕藩) 체제였다.
바쿠후 체제와 달리 바쿠한 체제는 중앙집권과 동시에 지방분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집권을 기본으로 하면서 지방분권을 배합하는 것, 이것은 바로 중국 역대 제국의 기틀이 아니던가? 중국 역사에서 정치의 중심이자 중앙집권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는 일본의 경우 쇼군에 해당했고, 황실을 중심으로 한 중앙 조정은 에도 바쿠후에 해당했다【에도 시대의 일본 천황은 춘추시대의 주나라 왕실에 비교할 수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기원전 770년의 동천 이후 주나라 왕은 실권도 없고 변변한 영토마저 가지지 못한 이름만의 왕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강성한 제후국들은 주나라를 멸망시키기는커녕 상국으로 받들고 주의 사직을 보존하면서 상징적인 권위를 인정했다. 그것은 동시에 제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교토의 천황도 직할지 외에는 별다른 영토도 실권도 가지지 못했지만, 에도 바쿠후와 쇼군은 천황의 상징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주 왕실이 동천 이후에도 400년 이상이나 사직을 유지했듯이, 일본의 천황 역시 마지막 실권을 누렸던 14세기 남북조시대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고, 심지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중국의 주나라나 일본의 천황이 실권을 잃은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족 전체의 정신적ㆍ역사적 원천으로 자리 잡았음을 뜻한다. 주나라가 중국 역대 왕조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었듯이, 일본의 천황도 일본 민족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다(오늘날 일본의 신사에서는 부처와 더불어 천황도 섬긴다)】.
다만 중국의 번국은 군사적인 목적에 치중되었던 반면 일본의 번은 군사와 행정 양 기능을 모두 수행했다. 요컨대 중국의 제국에서 관료적 행정 기구가 한 역할을 일본에서는 바쿠한 체제가 담당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바쿠한 시대에 이르러 일본은 비로소 ‘제국’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일찍이 쇼토쿠 태자 시대에 고대 천황이 ‘동천황’을 자처한 이후 일본은 내내 중국과 대등한 ‘제국’임을 자처했으나,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은 내용이 채워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00여 년이 지난 에도 시대부터였다.
▲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 임진왜란이 명확한 승부가 나지 않은 탓에 일본과 조선은 전후 수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에도 바쿠후는 자신들이 전쟁의 주범인 히데요시와 무관함을 역설했고, 일본의 무력을 두려워한 조선은 그냥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말해주는 것은 조선통신사였는데, 평균 400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일본은 아무런 사절단도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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