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
초명은 인저(仁低),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ㆍ지헌(止軒).
1168년 | 12월 16일 부친 이윤수(李允綏)와 모친 김씨의 아들로 출생.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 황려현(黃驪縣) 사람. | |
1171년 | 4세 | 부친이 성주(成州) 원(員)으로 부임하였으므로 임소로 따라감. |
1174년 | 7세 | 부친이 내시(內侍)로 발령되어 다시 개성으로 돌아옴. |
1178년 | 11세 | 숙부인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부(李富)가 부른 ‘지(紙)’자 운(韻)을 받아, 여러 낭관(郎官)들 ‘지로장행모학사 배심상재국선생(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이라고 지음 |
1181년 | 14세 |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최중(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에 들어가 학업을 닦음. 하과(夏課) 때 시를 지어 줄곧 일등으로 뽑힘. |
1185년 | 18세 | 사마시에 응시하였지만 불합격함. |
1187년 | 20세 | 사마시에 응시하였지만 불합격함. 최근 4~5년간 술과 시에 탐닉하고, 과시(科詩)는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임. |
1189년 | 22세 |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 꿈을 꾸고 나서 이름을 ‘규보(奎報)’로 바꿈. |
1190년 | 23세 |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로 뽑힘. |
1191년 | 24세 | 8월에 부친상을 당함. 천마산(天磨山)에 우거하며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호함. |
1192년 | 25세 | 백운거사 어록(語錄)과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을 지음. |
1193년 | 26세 |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참고해 장편서사시 「동명왕(東明王)」을 지음 |
1199년 | 32세 | 최충헌 정권에 시문(時文)으로 알려져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 겸 서기(書記)에 보임됨. 이 해에 고시와 율시 등 15~16편을 지음. |
1200년 | 33세 | 파직되어 전주를 떠남. |
1201년 | 34세 | 사위의 부임지인 죽주(竹州)에 가서 계신 모친을 모시고 개성으로 돌아옴. |
1202년 | 35세 | 5월에 모친상을 당함. 12월에 동경(東京,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종군 지원하여 병부록사 겸 수제원(兵部錄事 兼 修製員)이 됨. |
1204년 | 37세 | 개성으로 돌아옴. |
1205년 | 38세 | 「상최상국서(上崔相國書)」를 지어 벼슬을 구함. |
1207년 | 40세 | 으로 「모정기(茅亭記)」를 지어 직한림원 권보(直翰林院 權補)에 임명됨. |
1208년 | 41세 | 한림원 진보(眞補)에 임명됨. |
1212년 | 45세 |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 錄事 參軍事)가 되고, 겸직한림원(兼直翰林院)이 됨. |
1213년 | 46세 | 최충헌의 집에서 ‘공작(孔雀)’을 시제(詩題)로 시를 지어, 12월에 司宰丞으로 승진. |
1215년 | 48세 | 시를 지어 참직(參職)의 품계를 구하여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됨. |
1217년 | 50세 |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음. |
1218년 | 51세 | 좌사간(左司諫)이 됨. |
1219년 | 52세 | 탄핵을 받아 파직됨. 다시 계양도호부부사 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 兵馬鈐轄)이 되어 계양으로 부임함. |
1220년 | 53세 | 최충헌이 죽고 최이가 집권하여 시례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郞中 起居注 知制誥)로 부름을 받고 개성으로 돌아옴. 12월에 시태복소경(試太僕少卿)으로 옮김. |
1221년 | 54세 | 보문각대제 지제고(寶文閣待制 知制誥)에 제수됨. |
1222년 | 55세 | 태복소경 즉진(太僕少卿 卽眞)이 됨. |
1223년 | 56세 | 조산대부 시장작감(朝散大夫 試將作監)이 됨. |
1224년 | 57세 | 장작감 즉진(將作監 卽眞)이 됨. 사마시 좌주(座主)가 되자 양사표(讓謝表)를 지음. 시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試國子祭酒 翰林侍講學士)가 되어 양사표(讓謝表)를 지음. |
1225년 | 58세 | 사마시 시관(試官)이 되어 인재를 선발함. |
1226년 | 59세 | 좨주 즉진(祭酒 卽眞)이 됨 |
1228년 | 61세 | 정월에 중산대부 반위위사(中散大夫 判衛尉事)가 됨. 5월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춘장과(春場科)와 명경과(明經科)를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함. |
1230년 | 63세 | 팔관회를 열 때 옛 규례를 어긴 것이 문제가 되어 위도(猬島)로 귀양감. |
1231년 | 64세 | 고향 황려현(黃驪縣)으로 이배(移配)됨. 8월에 몽고군의 1차 침입을 당하여 백의종군함. |
1232년 | 65세 | 귀양에서 풀려나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경성부(慶成府) 우첨사(右詹事) 지제고(知制誥)에 제수됨. |
1233년 | 66세 | 한림학사 승지에 제수되었지만 아들 함(涵)이 직한림원이 되었기에 친혐(親嫌)을 피해 보문각학사로 자리를 옮김. |
1234년 | 67세 | 춘장지공거(春場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선발함. 정당문학 감수국사(政堂文學 監修國史)에 제수됨. |
1235년 | 68세 |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가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됨. |
1236년 | 69세 | 춘장지공거(春場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선발함. 청노표(淸老表)를 올렸지만 수용되지 않음. |
1241년 | 74세 |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국조의 고문대책(高文大冊)과 외국에 오가는 서표(書表) 등을 지음. 7월에 병이 심해져, 진양후(晉陽候) 최이(崔怡)가 이상국(李相國)의 문집 간행을 서두르게 함. 하지만 간행을 보지 못하고 9월에 생을 마침.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임. |
평가
1.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며 죽림고회의 시회를 드나들기도 함. 스스로 출세기회를 던져버림.
2. 이인로가 문단을 잡고 있을 때 문필 활동을 시작했고, 죽림고회에 들어오길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함.
3. 만년에 시ㆍ거문고ㆍ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함.
| |
| |
| |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한문놀이터 > 인물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해崔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복위 1) (0) | 2019.01.16 |
---|---|
일연一然: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0) | 2019.01.16 |
진화陳澕: ?~? (0) | 2019.01.16 |
김극기金克己: ?~? (0) | 2019.01.15 |
임춘林椿: ?~? (0) | 2019.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