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투르에서 마르텔이 구해낸 것은 단지 프랑크 왕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문명권 전체였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기를 모면한 것을 가장 환영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 300년 전에 클로비스는 이단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 교황에게 힘을 보태주더니 이제 그의 후손은 무시무시한 이슬람의 침략도 막아주었다. 교황으로서는 프랑크 왕국이 예쁘기만 했다. 따라서 마르텔이 일등공신의 위치를 넘어 프랑크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왕위는 마르텔의 당대에 얻어지지 않았다. 그는 보잘 것 없는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기보다는 그냥 유력한 지방 호족으로 남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아들 피핀(Pepin, 714~768)은 생각이 달랐다【그의 할아버지, 즉 마르텔의 아버지도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이 피핀은 피핀 3세라고 불리는데, Pepin the Short라는 이름도 있다(물론 당시에는 아직 영어가 없었지만, 편의상 영어 표기를 따르기로 한다. 프랑스어로는 Pépin le Bref인데, 같은 뜻이다). 그래서 ‘단신왕(短身王) 피핀’, ‘소(小) 피핀’, ‘꼬마 피핀’ 등으로 번역된다. 실제로 피핀의 키가 작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할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후손이 조상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고대의 관습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중세 유럽의 왕과 귀족 들도 대부분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경건왕, 존엄왕, 사자심왕, 태양왕, 심술보왕 등처럼 왕의 품성을 나타내는 별명이 있는가 하면, 단신왕을 비롯해 미남왕, 대머리왕, 뚱보왕처럼 신체의 특징을 나타내는 별명도 있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왕들을 표기할 때 그런 개별적 특성 대신 1세, 2세, 3세로 구분했다】.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은 피핀은 10년간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다가 차라리 직접 왕이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751년에 그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메로빙거 왕조의 문을 닫고 새로 카롤링거(Carolinger) 왕조의 문을 열었다(카롤링거는 카를이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물론 당시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752)는 이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사실 교황으로서는 프랑크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지지하고 말고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시 교황이 의지할 데라고는 오로지 프랑크 왕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황에게는 당면한 큰 위협이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은 롬바르드 왕국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뒤 물러나자 어부지리로 이탈리아 북부를 얻은 롬바르드는 점차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좀 멀리 떨어진 프랑크냐, 가까운 롬바르드냐를 놓고 선택한다면 교황은 당연히 종교가 같고 늘 자신을 지지해준 프랑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황은 교회 안에서라면 최강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실력자로 공인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한다면 교회 안에서도 로마 교황은 지존의 존재가 아니었다. 바로 비잔티움 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은 자신이 서방 로마의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설령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직 로마 교황의 권위와 힘은 비잔티움 황제에 미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비잔티움 황제는 동방교회의 종교적 권력에다 현실적인 제국까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로마 교황은, 롬바르드 왕국에는 세속의 힘에서 밀리고, 비잔티움 황제에게는 신성과 세속의 힘 모두에서 밀리는 형편이었다. 교황이 힘을 얻으려면 하늘과 땅에서 모두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먼저 싸움이 벌어진 곳은 하늘이었다.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낸 지 얼마 되지 않은 726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왕궁 문에 있는 성상(聖像)을 철거하고 성상 숭배 금지령(iconoclasm)을 내렸다. 종교에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다니? 이 알쏭달쏭한 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도와 정치적인 의도가 복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이 익숙하지만, 다신교라면 모르되 원래 유일신 종교에서는 성상이 익숙한 게 아니었다. 신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담아내는 것이니 아무래도 불경스러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에서 성상이 발달한 이유는 헬레니즘의 전통 때문이었다【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받은 것은 불교였다. 불교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굳이 부처의 형상을 표현해야 할 때에는 발자국이나 빈 의자 등의 추상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성립하자 그 영향을 받아 비로소 인도의 불교도들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당시 인도에서 제작된 불상들에는 그리스 신상과 같은 모습을 취한 것들이 많았다. 이런 양식을 간다라 미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모습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이나 그림으로 담았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문화적 전통이 강했던 소아시아에서는 성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겨우 방어했을 뿐 옛 헬레니즘의 고토를 대부분 이슬람 세계에 넘겨준 것이다. 이에 따라 제국 내에는 반헬레니즘적 정서가 널리 퍼져나갔다.
이것이 성상 숭배 금지령의 종교적 측면이라면, 정치적 측면은 수도원과 관련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전부터 대지주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대지주들의 대부분이 바로 수도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주 업무’는 바로 성상 숭배가 아니던가? 따라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면 수도원 세력이 약화될 것이고, 잘하면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국고로 환수될 수도 있다. 이게 레오 3세의 속셈이었다.
요컨대 황제의 조치는 종교적으로 성상을 우상으로 격하하고, 정치적으로 수도원을 약화시키고, 경제적으로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수도원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세기 이상이나 성상을 둘러싼 종교적·정치적 논쟁에 빠지면서 국력을 탕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불똥은 엉뚱하게도 로마 가톨릭 교회로 튀었다.
▲ 동방교회의 성전 옛 서로마 제국에서는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들어섰으나, 비잔티움 교회에서는 그런 이민족과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았다(동방교회를 ‘정통’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사진은 동방교회의 성전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품인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1453년부터 1931년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인다. 주변의 기둥(미나레트)들은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세워졌다.
프랑크 왕국만 개종했을 정도로 아직 서유럽에서 교세를 키우지 못한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성상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불만이었다. 교리상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어긋날지 모르지만, 이교도들에게 포교하기 위해서는 성상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마 교황으로서는 종교를 빌미로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문제를 풀려하는 레오 3세의 의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730년에 레오 3세의 공작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이 황제의 시책에 찬성하자 로마 교황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당시 로마 교황의 종교적 위상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교들과 동급이었으므로 라이벌 의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레오 3세도 신속하게 반격했다. 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위임한 서방 제국(오래전에 멸망하고 없는 제국이지만)의 종교적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당시 양측은 미처 몰랐겠지만 이 대립은 지극히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을 만들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가 결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잔티움 측은 자기들의 교회를 정교회(Orthodox Church, 정통교회)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가톨릭교, 개신교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분파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동방정교의 기원이다(동방정교회는 이후 주도권을 지닌 세력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로마 제국 후기에 지역적으로 분립했고 비잔티움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분립한 동유럽과 서유럽은 이로써 종교적으로도 분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차이’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다.
▲ 성상을 파괴하라 8세기 비잔티움 교회를 휩쓴 성상 파괴 운동은 사실 종교적인 측면보다 세속적인 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황제가 주동한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을 계기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영구히 분리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그림은 당시 이집트
의 수도원에 그려진 성상이다.
서유럽 세계의 탄생
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로마 교황은 세속에서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교와 달리 세속의 독립선언을 하려면 실제로 독립을 유지할 만한 물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황은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을 정식 파트너로 삼기로 했다. 마침 그럴 만한 계기도 있었다. 751년 롬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를 노리자 교황 스테파누스 3세는 다급해졌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했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피핀이 프랑크 왕 힐데리히의 왕위를 찬탈하고 교황에게 쿠데타의 승인을 요청했다.
사실 교황은 비잔티움 측에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었고, 또 과거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더구나 비잔티움 제국은 아직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 데도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 대신 프랑크를 선택했으니, 말하자면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레오 3세의 아들)는 우상 숭배 금지령에 반대하는 수도원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으므로 로마 교황으로서는 더더욱 비잔티움 측에 의지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교황이 체면 불구하고 몸소 프랑크 왕국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 피핀 역시 반갑기 그지없는 심정이었다. 과연 그는 교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로 원정을 와서 롬바르드족을 물리쳐주었다. 게다가 그는 전리품으로 얻은 라벤나를 교황에게 희사함으로써 돈독한 관계를 주변에 과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교황령(Papal State)의 시작이다【역사에서는 756년의 이 사건을 특별히 피핀의 기증(Donation of Pepin)이라고 부른다. 사실 라벤나는 6세기 중반부터 로마 교황의 소유였으니 기증이라기보다는 수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라벤나 총독이 롬바르드족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써 라벤나는 형식상으로 교황의 소유지가 되었다). 어쨌든 이리하여 공식적으로 탄생한 교황령은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70년 이탈리아 국가에 환수된다. 그 후 한동안 교황령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29년 로마 시내에 바티칸이 생겨나면서 다시 복구되었다】.
이제 프랑크 왕국과 가톨릭 교회는 찰떡궁합이 되었다. 교황은 피핀이 일으킨 ‘세속의 쿠데타’를 정당화해주었고, 피핀은 비잔티움에 반기를 든 교황의 ‘신성의 쿠데타’를 뒷받침해주었다. 서로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절묘한 커플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피핀이 교황령을 기증한 데 대한 대가만 받으면 되었다. 그 수혜자는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재위 768~814)였다【샤를마뉴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샤를 마르텔)를 따라 ‘샤를’이고 뒤에 붙은 ‘마뉴’는 존칭이다. 이 시대에는 아직 프랑스, 영국, 독일, 에스파냐 등의 서유럽 나라들이 생겨나기 전이므로 샤를마뉴의 이름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린다. 예를 들어 샤를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카를(Karl)’이 되는데, 그래서 ‘카를 대제(Karl the Great)’라고 하기도 한다(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기원이 되므로 독일식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샤를을 라틴어로 읽으면 카롤루스가 된다. 서로마 제국 황제로서 이르는 말이다. 카롤링거라는 왕조의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물론 그 이름도 원래는 샤를 마르텔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클로비스의 경우처럼 개창자의 아버지 이름을 왕조명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중세에는 샤를마뉴의 이름을 딴 왕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영국의 찰스, 독일의 카를,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같은 왕명들은 모두 그에게 기원을 두고 있다】.
▲ 교회를 지킨 군대 로마의 교회와 게르만의 군대, 이 양자는 서로의 필요성으로 인해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이 구도는 이후 로마-게르만 문명의 유럽 중세를 지배하는 기본 질서가 된다. 그림은 프랑크 왕국의 기병들이다. 로마교황에게 라벤나를 기부한 피핀의 군대가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마르텔-피핀으로 이어지는 유력 가문의 계보는 샤를마뉴에 이르러 활짝 만개한다. 할아버지 마르텔이 외적의 침략을 방어했고, 아버지 피핀이 새 왕조를 열었다면, 샤를마뉴는 그 터전 위에서 마음껏 정복 활동을 전개한 군주였다. 첫 목표는 할아버지 때부터 프랑크와 교황에게 눈엣가시였던 롬바르드족이다. 그들을 아예 없애기로 마음먹은 샤를마뉴는 프랑크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원정을 위한 체제로 편성했다. 774년에 알프스 산맥을 넘은 프랑크군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를 접수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다음에는 즉시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으로부터 카탈루냐를 빼앗았다(당시 바스크를 공략한 부대는 원주민 부대에게 참패하고 전멸했는데, 이 전투는 중세의 유명한 무훈시 『롤랑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
여기까지의 정복만 해도 이미 샤를마뉴는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를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동쪽으로 진출한 프랑크군은 색슨족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경계선은 엘베 강 유역에까지 확대되었으니, 로마 제국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대신 이루어준 셈이다(옛 로마는 항상 북쪽 국경을 엘베 강까지 넓히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라인 강으로 그쳤다). 피정복지에는 로마의 속주처럼 변경주를 설치했다. 이제 제국의 면모는 명확해졌다. 옛 로마 제국에 비해 영토의 면에서 뒤처지는 부분은 브리타니아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정도였으며, 게르마니아는 오히려 로마시대보다 훨씬 넓어졌다.
샤를마뉴에게 제국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정복이 이루어질 때마다 피정복지에 교구를 설치하고 현지 민족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영토와 정치에서 통합된 로마 제국을 넘어 이제 종교적 통합까지 이룬 제국을 건설했으니 샤를마뉴로서는 옛 로마 황제가 부럽지 않았다.
로마 황제가 부럽지 않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이교도의 영토가 하나씩 가톨릭권으로 바뀌어갈 때마다 로마 교황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실제로 포교는 교황의 업무였으니, 손 한 번 대지 않고 시원하게 코를 푼 교황의 기분은 무척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샤를마뉴는 교황령을 더욱 확대해 이탈리아 중부 전역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교황 레오 3세(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와는 물론 다른 인물이다)는 이제 피핀에게 준 선물 정도로는 샤를마뉴에게 보답할 수 없다고 여겼다.
800년 12월 25일에 레오 3세는 로마의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샤를마뉴에게 결코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그의 머리 위에 교황이 직접 서방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준 것이다. 신성의 황제가 세속의 황제에게 대관식을 치러준 격이다【로마 교황이 샤를마뉴를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것에 대해 비잔티움 황제는 신성모독이라며 반발했다가 813년에야 승인하게 된다. 그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는 이레네(Irene, 752~803)라는 여제였는데, 그녀는 원래 레오 4세의 황비로 남편이 죽자 아들의 섭정을 맡았다. 790년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할 수 없이 권력을 내주게 된 이레네는 마침내 797년 아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되찾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가 이레네에게 청혼을 했다는 점이다(그 무렵 이레네의 나이는 마흔이 넘었으니 분명히 정략결혼이다). 이 결혼이 성사되었더라면 막 갈라지기 시작한 동유럽과 서유럽은 다시 통합되었을지도 모른다(사실 샤를마뉴가 교황이 씌워주는 황제의 관을 덥석 받아들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게르만법에 따르면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한 귀족들의 궁정 혁명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레네는 유배되어 곧 죽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상징이기는 했으나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 상징이었다. 476년 서방 제국이 멸망한 이래 300여 년 만에 다시 서방 제국의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게르만이라는 새로운 전통은 새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승인되었다. 그 새 시대란 바로 중세였고, 따라서 그것은 중세 유럽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직도 로마 제국의 정당한 상속자는 동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이었지만, 이제 서유럽 세계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제정일치와 중앙집권제의 비잔티움 제국과 달리 서유럽 세계는 신성(교황)과 세속(황제)이 적절한 분업과 협력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하는 분권적인 체제였다. 처음에는 동방 제국에 비해 짜임새가 부족해 보였으나 이 느슨한 체제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발휘해 장차 서유럽을 세계 문명의 주역으로 만들게 된다.
▲ 전도사 군주 샤를마뉴는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상당히 강했던 듯하다. 정치와 종교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은 그에게 최상의 목표이자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마다 동방정교의 라이벌 신앙인 로마 가톨릭을 열렬히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림은 샤를마뉴의 시대에 간행된 복음서의 한 쪽으로, 복음서 저자인 마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중세의 원형
옛 로마 제국도 명실상부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될 때까지는 정복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후발 주자의 고유한 이점이다. 그러나 제국의 하드웨어는 초고속으로 갖추었어도 신생 프랑크 왕국이 제국의 소프트웨어마저 완비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물론 프랑크는 교황에게서 로마의 상속자라는 자격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명칭만 그랬을 뿐이고 로마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까지 이어받지는 못했다. 과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샤를마뉴는 제국의 영토를 많은 주께로 나누었으나 그것들은 로마의 속주처럼 되지 못했다. 수치로만 보면 300개에 달했으니까 로마의 속주에 못지않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에 미치지 못했다(로마 제국의 계승을 꿈꾼 샤를마뉴는 최소한 개수로라도 로마의 속주에 맞추어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원래 식민지란 모국이 든든해야 유지되는 법이다. 그런데 프랑크는 로마처럼 강력한 중심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주변 정세는 로마 시대처럼 튼튼한 중심이 들어서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소규모로 민족이동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유럽 대륙의 판도에는 늘 변화의 조짐이 역력했다(상대적으로 동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은 안정적이었지만 고질적으로 내정이 불안한 데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잃고 겨우 제국의 면모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해 사를마뉴는 처음부터 각 주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최소한 방어만이라도 제 힘으로 하라는 취지였으나, 그 과정에서 군사권·사법권·치안권을 맡긴 것은 곧 중앙 권력의 영향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앙 귀족과 성직자로 팀을 만들어 정기적인 순찰은 돌렸지만, 자치권을 소유한 주의 지배자들이 순찰사의 통제에 고분고분 따를 리는 만무했다. 그저 우호적인 관계만 다지고 대접이나 잘 받으면 만족이었다. 훗날 이 주의 지배자들이 중세의 영주 신분으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인 통합이야 어렵다지만 경제적인 통합마저도 이루지 못한다면 무늬만의 제국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도량형과 화폐 단위를 통일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 말기에 유명무실화된 은화(278쪽 참조)가 다시 주조되어 유통에 숨통이 트였다【당시에 생겨난 화폐 단위 가운데 하나가 리브라(Libra)다. 리브라는 로마 시대에 곡물의 양을 재는 중량 단위였는데, 프랑크 시대에 화폐로 격상되었다. 나중에 이것이 영국의 화폐 단위이자 무게 단위인 파운드가 된다. 오늘날 파운드의 약자를 £ 또는 Ib로 표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인 통합 조치는 각 주에도 이득이었으므로 저항을 받지 않았다.
▲ 신앙을 위해 종교를 중시한 샤를마뉴의 통치 방식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그림은 9세기 중반 프랑크에서 제작된 복음서인데, 놀랍게도 예수의 일생을 상아로 조각한 책이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친다는 중세의 ‘경건한’ 자세는 이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다.
사실 샤를마뉴는 지방 정치는커녕 중앙 정치를 꾸리기에도 힘이 벅찼다. 실로 오랜만의 서유럽 황제인지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그는 초대 황제(동양식 제국으로 치면 건국자)라면 누구나 취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이 많으면 사람이 필요한데 믿을 만한 사람은 가족뿐이다. 그는 프랑크족 출신의 30개 귀족 가문을 황실과 혼맥으로 결합시켜 제국의 수도인 엑스라샤펠(현재 독일의 아헨)의 중앙 귀족층을 구성했다【서양보다 오랜 제국의 역사를 가진 중국은 그 점에서도 더 선배다. 중국식 제국의 원형인 한을 세운 유방(한 고조)도 일가붙이들을 동원해 미약한 중앙 권력을 키웠다. 그는 닥치는 대로 지방 호족들과 혼맥을 구축했으며, 그게 불가능하면(자식의 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냥 친척으로 선언하고 자신의 유(劉)씨 성을 하사했다. 그 덕분에 심지어 한의 적이었던 흉노 부족장들에게도 유씨가 생겨났다. 역사학에서는 이런 제도를 군국(郡國)제도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부르지만, 실은 중앙을 황제가 직접 챙기고 지방은 수령들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어차피 넓은 영토의 제국을 지배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의 고위 관직들을 해결한 다음에는 군대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황제와 중앙정부를 지키려면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로마 황제들이 거느렸던 친위대 방식이지만, 선배들만큼의 권위가 부족한 신생 프랑크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는 언감생심이 아닐 수 없었다. 권위에서 나오는 ‘명령’이 불가능하다면 서로 간의 약속에 의한 ‘계약’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신하단과 계약을 통해 중앙 군대를 구성했다. 신하단은 황제에게 군사적 봉사와 복종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황제는 토지를 주는 것이다. 그 신하단이 바로 중세의 기사 신분을 이루게 된다【사실 이 계약은 용병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용병은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그리스와 페르시아, 카르타고와 로마 등의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한다(결국 로마는 용병의 손에 멸망했다). 모든 게 황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중국식 제국에서는 용병이 존재할 수 없다. 샤를마뉴는 충성과 복종의 대가를 내주어야 했지만, 중국의 황제는 ‘천자’의 권위로 신하와 군대를 지배했으므로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엇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서양식 정복(십자군 전쟁)과 동양식 정복(몽골의 유럽 원정)에서는 용병과 계약이라는 전통 때문에 서로 상당히 다른 양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전통은 ‘계약’ 개념에 기원을 둔 서양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발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에는 교구를 설치하고, 영주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하며, 중앙에서는 기사들과의 계약을 통해 직속 부대를 편성한다. 그렇다면 무척 낯익은 구성이다. 바로 서양 중세의 전형적인 체제다. 기도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이렇게 중세 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세 가지 신분(성직자, 영주, 기사)이 이미 생겨났다. 나머지 신분은 일하는 사람, 곧 농민이다.
이렇게 중세 정치의 골격을 만든 것과 더불어 샤를마뉴는 중세 문화의 골격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를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전혀 걸림돌이 없었다. 게다가 샤를마뉴는 그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탓에 학문과 예술을 무척 존중하고 사랑한 군주였다(그는 침대 밑에 펜과 양피지를 넣어 두고 틈틈이 글씨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직접 칙령을 내려 각 주교구와 수도원에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했으며, 수도에는 궁정 학교를 열어 라틴어와 라틴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등의 학문과 음악, 시 등의 예술을 적극 장려했다.
혹시 자신의 제국이 로마 게르만의 혼혈이라는 점을 약점으로 여겼을까? 샤를마뉴는 오히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그의 시대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특히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베끼고 장식한 고전의 필사본과 채식 필사본 들은 오늘날까지도 중세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 부활한 황제 샤를마뉴의 업적을 보여주는 지도다. 초록색 부분은 그가 왕위에 오를 무렵인 768년경 프랑크 왕국의 영토다. 여기에 샤를마뉴는 속국을 더했고, 직접 정복에 나서 영토를 늘렸다. 그 업적을 발판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로마 황제가 된다.
원시 프랑스
중세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샤를마뉴는 알렉산드로스-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대제(大帝)’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처럼 그가 역사에 대제로 기록되는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전파에 지대한 역할을 한 덕분에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에게서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평가는 대개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샤를마뉴가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대제가 되려면 그가 세운 프랑크 제국이 계속 존속하고 발전했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는 샤를마뉴에게 더 이상의 영광은 주지 않았다. 그가 죽자마자 제국의 면모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원래 프랑크 제국은 지역마다 민족과 언어, 관습이 달랐으므로 제국으로서의 통합성은 크게 부족했다. 물론 샤를마뉴가 이룩한 종교와 경제에서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차피 제국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의 당대에 제국이 유지되었던 것은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체제상의 취약점을 보완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그것으로 제국의 계승도 가능하다고 믿었겠지만,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마르셀 피핀-샤를마뉴로 계승된 조상의 ‘음덕’은 그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로 제위를 이은 루이 1세(Louis Ⅰ, 778~840, 재위 814~840)는 일찌감치 사태를 깨달았다. 정치적 통합성이 취약한 것은 이미 각오한 일,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시 외적의 침입이 잦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샤를마뉴가 없는 프랑크를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여긴 이슬람 제국은 은근히 에스파냐에서 치고 올라오려 했다. 또 북쪽에서는 바야흐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노르만의 민족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고자 교회와 수도원을 적극 보호하는 정책으로 ‘경건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이지만 아버지의 정복 사업마저 계승할 자신과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루이 1세는 817년에 제국 계획령을 내려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맏아들인 로테르(Lothaire, 795~855, 독일식으로는 로타르)에게는 제위와 함께 프랑크 본토를, 둘째 아들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셋째 아들 루이에게는 바이에른을 물려주기로 했다(첫째 아들 외에는 이름이 모두 ‘재탕’이다).
▲ 복사본, 아니 필사본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책을 보존하려면 오로지 필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열심히 책을 필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복사기의 역할을 이들이 대신한 셈이다. 수도사들은 글을 그대로 베끼는 데 머물지 않고 화려한 삽화로 장식해 채식 필사본이라는 중세의 한 미술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823년 재혼한 아내에게서 넷째 아들 샤를을 얻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루이가 자기 아버지인 샤를마뉴의 이름을 붙여준 아들이다). 아직 어린아이지만 샤를에게도 제 몫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루이 1세는 상속 계획을 변경시키려 했는데, 당연히 세 아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심지어 이 사건으로 루이 1세는 아들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폐위될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838년 피핀이 사망한 것은 제국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사형제가 다시 삼형제가 되었으니까. 그에 따라 아키텐은 자연스럽게 막내 샤를의 몫이 되었다. 피핀에게도 아들이 있었으나 그는 당연히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했다【여기서 잠깐 왕명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프랑크가 분할됨으로써 이후 이 지역의 역사도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로 나뉘어 전개된다(독일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탄생한 것은 19세기이므로 여기서 독일은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같은 왕명이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된다. 프랑스의 샤를은 독일의 카를이고, 프랑스의 루이는 독일의 루트비히다. 따라서 서프랑크를 차지한 샤를(‘대머리왕’)은 독일에서는 카를 2세가 되며, 동프랑크를 차지한 루이(‘독일왕 루이’)는 루트비히 2세가 된다(카를 1세는 그들 형제의 할아버지인 샤를마뉴이며, 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인 루이 1세다). 이들은 형제였으므로 후손들의 이름도 서로 뒤섞이게 된다. 예를 들어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은 카를 3세(‘뚱보왕’)인데, 작은아버지(샤를)의 제위를 물려받아 그의 이름을 따르게 된 것이다(물론 서프랑크 영토 자체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고 프랑크 황제 자리만 물려받았다)】.
루이 1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아들들의 분쟁이 불을 뿜었으니 그가 죽은 뒤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840년에 그가 죽자 분쟁은 즉각 전쟁으로 바뀌었다. 삼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대개 두 동생이 연합해 맏형과 맞서게 마련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합쳐 맏형 로테르를 일단 굴복시킨 다음 루이와 샤를은 로테르에게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조약을 맺어 정식으로 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843년에 유럽 최초의 조약인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프랑크는 서프랑크(지금의 프랑스 서부), 중부 프랑크(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이탈리아 북부), 동프랑크(지금의 독일 서부)의 세 왕국으로 나뉘었다. 결국 프랑크 제국의 수명은 50여 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프랑크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로테르의 두 동생은 싸움에서 진 맏형의 몫을 고스란히 인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형의 체면을 감안해서 당분간 조약의 결정에 따른 그들은 로테르가 죽자 즉각 동쪽과 서쪽, 양측에서 형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 작업에 더 열성적인 사람은 서프랑크의 샤를이었다. 그는 형제 중에서 막내였지만 야심은 가장 컸다. 당연히 양자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르됭 조약의 경험이 있었던 두 형제는 다시 한 번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870년의 메르센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형제는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한 중부 프랑크를 완전히 분할하기로 합의했는데, 그 경계선은 라인 강이었다【로테르의 영토는 다시 삼분되어 중심지인 로트링겐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나누어가졌고, 중부(지금의 스위스 일대)는 부르고뉴 왕국, 남부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쟁점은 로트링겐이다. 두 나라가 분할해 차지한 만큼 이 지역은 처음부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로트링겐은 지금의 로렌 지방인데, 근대 국민국가의 시대가 되면서 이 지역을 두고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근대 유럽이 탄생한 17세기부터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두 나라의 영토 분쟁의 핵심을 이루게 되는 알자스-로렌 문제의 기원은 이미 9세기에 생겨났던 것이다】.
라인 강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즉 메르센 조약으로 오늘날 서유럽의 주요한 3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시적 형태가 드러난 것이다. 그 가운데 프랑크의 전통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은 프랑스였다(프랑스라는 이름부터 프랑크에서 나왔다). 프랑스는 서유럽 세계에서 맨 먼저 나라의 꼴을 갖추었고, 이렇게 스타트를 일찍 끊은 덕분으로 이후 중세 유럽의 역사를 주도하게 된다.
환생한 샤를마뉴
서프랑크를 차지하게 된 샤를은 행운아였다. 그는 막내에다 이복 형제였는데도 둘째 형(피핀)이 죽는 바람에 알짜배기 땅을 물려받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루이 1세의 셋째 아들인 루이(루트비히 2세)는 억세게도 운이 없었다. 삼형제였을 때는 막내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장 오지인 동프랑크를 물려받았는데, 첫째 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었어도 여전히 그는 동프랑크에 만족해야 했다.
옛 로마의 속주였던 데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였던 서프랑크에 비하면 동프랑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샤를마뉴가 설치한 주들도 동프랑크 지역에는 많지 않았으며, 따라서 당시 첨단의 제도인 봉건제도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주민들도 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여전히 옛 게르만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위치상 노르만의 이동에 따른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문화권이 달랐기에 10세기 초반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자 동프랑크는 자연스럽게 서프랑크와 결별하게 되었다.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구태여 프랑크족의 혈통을 강조하려 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다. 그 결과로 프랑켄 공작(봉건 귀족의 하나지만 당시 공작은 정식 작위라기보다는 Herzog, 즉 부족장이었다) 콘라트 1세(Konrad Ⅰ, ?~918)가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동프랑크 왕국의 ‘지극히 조용한 멸망’이다.
이제 동프랑크 지역은 프랑크의 전통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귀족들은 게르만의 옛 전통에 따라 부족연합 체제(공국 체제)를 유지했다. 콘라트의 뒤를 이은 작센공 하인리히 1세부터 왕위는 세습되기 시작했지만(작센 왕조), 당시 세습 왕조는 시대의 추세라서 취한 것일 뿐 국가 체제는 종전과 달라질 게 없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분권화의 역사가 이후 1000여 년에 걸친 독일의 역사를 이룬다(하인리히 1세는 독일 역사에서 초대 국왕으로 간주된다)【동양식 왕조는 새 나라를 세우면 거창하게 국호를 짓고 대외적으로 널리 선전하지만 유럽의 역사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프랑스나 독일이 생겼다는 말을 동양식 왕조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심지어 프랑스 역사가들도 프랑스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에 관해서는 한 가지로 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에는 예로부터 왕조(나라)의 맺고 끊음이 분명했지만, 유럽에서는 그보다 훨씬 느슨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분명하기도 했다. 굳이 비교하면 유럽 각국의 경우에는 한 왕가의 지배기가 동양식 ‘왕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황금의 샤를마뉴 로마-게르만 문명의 문을 연 샤를마뉴는 당대만이 아니라 후대에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사진은 13세기에 제작된 샤를마뉴의 상인데,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물론 샤를마뉴의 실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13세기 방식으로 이상화된 조각상이다.
서프랑크(이제부터는 프랑스라 불러도 되겠다)와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 과거의 조약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프랑스를 침략해 로트링겐을 빼앗았다. 대내적으로도 그는 여러 귀족을 어르고 누르면서 왕권 강화에 성공해 신흥 세력인 작센 왕조의 토대를 튼튼히 굳혔다. 이 토대를 밑천으로 삼아 독일의 국력을 크게 키운 사람은 그의 아들 오토 1세(otto Ⅰ, 912~973, 재위 936–973)였다.
당시는 노르만의 민족대이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으므로 신생국 독일로서는 무엇보다 외침에 방어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에 대해 오토 1세는 샤를마뉴처럼 북쪽에 변경주를 두어 데인족(덴마크)과 마자르족(헝가리)을 방어했다. 프랑스는 인정할 수 없어도 ‘카를 1세’는 독일 민족의 시조로 인정했다고 할까? 게다가 그는 이민족을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로 개종시키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서도 샤를마뉴를 닮았다(그래서 독일인들은 그를 ‘오토 대제’라고 부른다. 또 한 명의 대제가 탄생했다). 특히 955년 남부의 레히펠트(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마자르족을 크게 무찌른 일은 다시 한 번 서유럽 세계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아가 그는 로트링겐을 탈환하려는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쳐 프랑스에 대해 힘의 우위를 다졌다.
이리하여 신생국 독일을 반석 위에 올린 뒤 오토 1세는 로트링겐, 슈바벤(알레마니아), 바이에른(지금의 뮌헨 일대) 등지를 동생과 아들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고, 작센과 프랑켄을 직속지로 삼아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는 샤를마뉴와 닮은꼴이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샤를마뉴와 닮게 만든 사건은 따로 있다(그는 샤를마뉴를 계승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 오토의 꿈 오토 1세는 샤를마뉴의 후손이 아니지만 그를 조상으로 받들고자 무척 노력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치적은 샤를마뉴의 복사판이다. 그 이유는 샤를마뉴와 그가 같은 목표, 즉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 로마황제가 된다는 꿈을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오토는 샤를마뉴처럼 그 꿈을 이루었다. 사진은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이다. 10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니까 이것을 오토가 머리에 썼을 것이다.
961년에 이탈리아에서 베렝가리오라는 자가 로마 황제를 자칭하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물론 오토가 당대의 실력자였기에 그런 것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150여 년 전의 샤를마뉴와 똑같을까? 베렝가리오는 루이 1세의 외손 족보이므로 오토보다는 샤를마뉴의 혈통에 가까웠으나 로마 황제의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샤를마뉴의 전통으로 인해 로마 황제 자리는 이제 로마 교황이 수여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교황의 뜻대로 이탈리아를 원정해 간단히 베렝가리오를 제압했다. 이듬해인 962년 교황은 그에게 황제의 직위를 수여했다. 자신의 우상인 샤를마뉴를 닮겠다는 오토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비잔티움 제국의 승인을 얻고 비잔티움 황실의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우상의 못다 이룬 꿈마저 이루어냈다. 또한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상의 과업을 끝까지 충실하게 모방했다. 학문과 예술을 적극 장려하고 육성해 후대에 ‘오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이 정도로 닮은꼴이었으니, 오토의 당대에는 샤를마뉴가 환생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후대의 역사로 인해 두 사람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황제의 명칭이다. 샤를마뉴 시대에도, 오토의 시대에도 제국은 그냥 제국이었고, 황제는 그냥 황제였다. 다시 말해 제국이나 황제 앞에 아무런 수식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오토 2세는 여기에 ‘로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200년 뒤에 프리드리히 1세는 또 ‘신성’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게 된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명칭을 소급해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고, 황제가 다스리지도 않았던 기묘한 나라인 신성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여기서 비롯되어 이후 독일의 왕은 황제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지만, 실은 다른 서유럽 나라의 국왕에 해당한다. 그래도 명칭상으로는 황제이므로 여느 왕들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중세가 끝나고 독일이라는 국가가 모습을 드러나게 될 때까지 대대로 로마 교황청에서 치르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 서유럽 세계를 낳은 민족이동 5세기의 게르만(왼쪽), 9세기의 노르만(오른쪽), 이 두 차례의 민족이동으로 로마 문명은 로마 게르만 문명으로 자라났고, 서양 역사는 중세로 접어들었다. 지도는 문명의 뿌리를 줄기로 키운 두 민족이동의 경로를 보여준다. 이미 오늘날 유럽 세계의 원형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본형과 활용형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건설할 무렵, 유럽의 북쪽에서는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었다.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라는 서유럽의 기본형이 형성될 무렵, 그 바람은 폭풍우로 변해 남쪽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바로 2차 민족대이동, 그러니까 노르만의 민족이 동이 시작된 것이다.
게르만이 그렇듯이, 노르만 역시 하나의 단일민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당시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살았던 여러 민족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노르만이라는 말 자체가 ‘북쪽 사람’이라는 뜻이다), 4세기에 시작된 게르만 1차 민족대이동이 서유럽 세계의 ‘기본형’을 확립했다면, 9세기에 진행된 2차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세계의 ‘활용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활용’의 주된 결과는 바로 영국과 러시아의 원형이 생겨난 것이다【이쯤에서 당시 유럽 세계의 판도를 한번 그려보는 게 좋겠다. 프랑크가 분열되면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형이 생겼다. 그 동쪽, 즉 중부 유럽에는 아직 뚜렷한 국가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부족국가 형식의 여러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유럽은 기본적으로 이슬람권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시칠리아, 나아가 이탈리아 남부까지 장악하고 있었다(이탈리아 중부의 교황령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 동유럽은 물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으므로 남은 곳은 브리타니아와 북유럽뿐인데, 여기에 각각 영국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형성된 것이 바로 2차 민족대이동 시기다(중부 유럽의 판세도 이 무렵에 결정된다). 따라서 대략 10~11세기부터는 오늘날과 비슷한 유럽국가들이 유럽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500년의 시차를 두고 서유럽 세계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역사가들은 북유럽의 인구 증가가 민족이동의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인구 증가를 낳은 원인을 또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문명의 전파라는 큰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1~2세기에 로마가 팽창하면서 로마 북부의 게르만족에게 문명의 빛이 전해졌다. 뒤이은 로마의 약화는 문명의 중심이 (적어도 서유럽에 관한 한) 이미 게르만족으로 이전되기 시작했음을 뜻하며, 결국 로마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게르만족의 침략에 의해 멸망했다. 이렇게 해서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 세계에서 북쪽으로 옮겨오자, 문명의 주변도 더욱 넓어지고 그 빛은 다시 더 북쪽으로 회절했다. 프랑크가 과거의 로마 제국과 같은 역할이었다면, 노르만족은 로마 시대의 게르만족과 같은 역할이었던 셈이다.
▲ 노르만족의 이동 500년 전 게르만족의 민족이동에 이어 노르만족의 민족이동이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세계는 완성된다. 이때부터는 오늘날의 유럽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그림은 바이킹으로 알려진 노르만의 함선(왼쪽)과 노르만 병사들(위쪽)의 모습이다.
차이가 있다면 북유럽의 지리적 여건은 문명의 중심지 노릇을 하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게르만족은 로마의 라틴 문명을 흡수해 더 풍부한 문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스칸디나비아는 중부 유럽에 비해 좁은 오지였다. 그래서 노르만의 민족이동으로 북유럽은 새로운 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대신 이미 형성된 서유럽 세계에 동참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오토 1세를 괴롭힌 이민족은 북쪽의 노르만족만이 아니라 동쪽의 마자르족도 있었다. 여기서도 오토는 샤를마뉴의 업적을 재현한다. 샤를마뉴가 게르만족의 이동을 끝냈다면, 오토는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이동을 저지한 것이다. 955년 오토 1세의 강력한 수비망에 걸려 더 이상의 서진이 불가능해진 마자르는 그냥 그 지점에 눌러앉기로 했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나라가 중부 유럽의 강국인 헝가리다(앞서 말했듯이 마자르는 훈족의 후예다. 그래서 오늘날 유럽에서 헝가리어는 유일한 아시아어에 속하며, 핀란드어, 바스크어와 함께 인도 유럽어 계열이 아닌 언어다).
또한 마자르족처럼 오토의 빗장 수비로 더 이상의 남하가 불가능해진 노르만족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 아니라 예로부터 슬라브족이 살고 있던 터전이었으므로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원래 기후가 춥고 땅이 척박한 데다 문명의 수준과 인구밀도가 낮았던 슬라브족이 떼거지로 밀고 들어오는 노르만족을 당해낼 순 없었다. 별다른 싸움 한 번 없이 노르만족은 슬라브족을 남쪽으로 내쫓고 그 지역에 첫 번째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게 된다. 이것이 노브고로드 공국의 시작이다. 또한 노르만족의 일파는 여기서 다시 남하해 오늘날 모스크바의 자리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는데, 이것이 바로 키예프 공국, 러시아의 원형이다.
한편 노르만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난 슬라브족은 중부 유럽 일대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과 살림을 합쳤다. 더 남쪽은 비잔티움의 영토이므로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 터전에 몇 개의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이 슬라브족의 나라들이 훗날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로 발전하게 된다(불가리아도 슬라브족의 나라였으나 당시에는 비잔티움 영토 내에서 속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영국의 탄생
독일의 철벽 수비는 노르만족의 이동을 동쪽으로만 우회하게 만들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심장부는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남부였고, 작센과 프랑켄도 기껏해야 중부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북부는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덴마크라는 데인족(노르만족의 일파)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당시까지는 스칸디나비아가 한 덩어리였으며,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로 분립하는 시기는 11세기 이후다).
게다가 바이킹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르만족의 장기는 육로보다는 바닷길에 있었다(노르만족은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활발히 나서서 멀리 북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까지 탐험했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도 바이킹이었다). 따뜻한 바닷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넓은 북해는 노르만족의 연못이 되었다. 더구나 육로 진출이 어려워지자 해상 진출은 더욱 활발해졌다.
9세기부터 노르만은 북해로 흘러드는 프랑스의 강들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때문에 프랑크의 루이 1세는 제국을 분할하기로 결심한 바 있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노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린 프랑스의 샤를 3세는 마침내 911년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예 그들에게 땅을 떼어주고 충성 서약을 받기로 한 것이다. 노르만족은 물론 약탈하던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었으니 불만이 없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공국이 생겨났는데, 훗날 영국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간의 복잡한 소유권 분쟁의 대상이 된다.
프랑스에 나라를 세울 정도라면 그보다 문명의 힘이 약한 브리타니아에서는 노르만족이 진출하기가 훨씬 더 용이할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에서 북해를 횡단하면 그대로 닿는 곳이 바로 브리타니아가 아닌가? 하지만 브리타니아 남부는 비록 갈리아 만큼은 못해도 예로부터 로마 속주의 전통이 강력히 전해지던 곳이었으므로 아무리 사나운 바이킹이라 해도 쉽사리 정복할 수는 없었다.
바이킹이 다가올 무렵 브리타니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난 5세기 초반부터 9세기까지 브리타니아의 역사를 이은 것은, 게르만족 대이동의 와중에 독일 북부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간 앵글족과 색슨족, 그리고 유트족이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왕국을 건설하고, 대륙과 단절된 상태에서 늦지만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그들 세 민족은 원래 고향이 같았으므로 타향에 와서도 서로 간에 민족적인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때부터는 브리타니아 대신 영국이라는 이름을 써도 된다.
그러나 로마 문명의 세례를 받고 대륙에서 터전을 잡은 프랑크족과 고트족에 비해 앵글족과 색슨족은 ‘촌놈’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들이 브리타니아에 세운 나라들은 명칭만 왕국일 뿐 부족국가에 가까웠다. 따라서 각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왕이라기보다는 족장에 불과했다. 오늘날 영국의 지명과 인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ing’, ‘-ingham’, ‘-ington’ 같은 어휘들은 모두 당시의 친족집단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이를테면 헤이스팅스(Hastings)는 해스타(Haesta) 사람이라는 뜻이며, 워킹엄(Wockingham)은 워카(Wocca) 사람의 농장이라는 뜻인데, 이렇게 친족 집단에 -ing형 어미를 쓰는 것은 게르만적 전통이다. 메로빙거나 카롤링거 같은 왕조의 이름들을 생각하면 쉽다. 앵글족과 색슨족이 오랫동안 영국을 지배한 흔적은 오늘날 영국의 지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잉글랜드라는 이름과 영국 동남부의 이스트앵글리어(East Anglia)는 앵글족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에식스(Essex), 웨식스(Wessex), 서식스(Sussex) 등은 색슨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에식스는 동색슨, 웨식스는 서색슨, 서식스는 남색슨의 뜻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지명들은 로마의 속주 시대부터 생겨났고(런던, 노섬브리아 등), 후대의 지명들 중에는 노르만족의 정복으로 전래된 북유럽의 신들에게서 비롯된 것들도 많다(Tuesday, Wednesday, Thursday 같은 요일들의 명칭은 바이킹이 섬기던 신들의 이름에서 나왔다)】. 당시 영국에 존재했던 왕국들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5세기를 무대로 한 ‘아서 왕의 전설’이다. 여기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로부터 오늘날 격의 없이 민주적으로 진행하는 회의라는 뜻의 원탁회의(round-table conference)라는 용어가 나오기는 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아서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위계와 서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고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무렵 영국에서도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597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Ⅰ, 540년경~604, 재위 590~604, 그는 레오 1세와 더불어 중세 교황권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에 ‘대교황’으로 불린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한 전도단을 영국에 파견해 앵글로 색슨 왕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비록 소수 왕족과 귀족만의 개종에 그쳤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영국은 일단 종교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에 편입되었다(영국 본토의 선교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로마 가톨릭은 아일랜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종교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 영국의 개종 브리타니아는 로마 시대부터 로마 문명을 수용하면서도 로마화를 거부한 지역이었다 갈리아와 달리 브리타니아가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이 큰 작용을 했다). 그러나 대륙에 로마-게르만 문명권이 성립하면서 이곳에도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진은 8세기에 세워진 민스터 성당이다. 1066년 이래 역대 왕들의 대관식 및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이렇듯 서서히 진행되던 영국의 형성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앨프레드(Alfired, 849~899, 재위 871~899) 왕이었다. 9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데인족의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앵글족과 색슨족의 부족국가들은 당연히 뭉쳐야 산다고 생각했다. 웨식스의 왕이었던 앨프레드는 데인족과 맞싸움을 벌이는 대신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웨식스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돈을 준 것이다. 과연 약속대로 데인족은 웨식스를 그대로 놔둔 채 다른 곳들을 침략했다. 그러자 다른 왕국들은 몰락했고, 웨식스는 상대적으로 번영했으며, 앨프레드는 일약 유능한 군주로 떠올랐다.
자신의 정책에 자신감을 얻은 앨프레드는 런던까지 손에 넣고 난 다음 그 동쪽에 자리 잡은 데인족과 장기적인 평화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데인족의 자치 구역인 데인로(Danelaw)다(그런 탓에 데인로에서는 독특한 관습과 법, 인명과 지명이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왕국의 안전을 확보한 앨프레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왕국을 잉글랜드라 이름 짓게 된다. 그런 공을 세운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영국사에서는 앨프레드를 통일 왕국 잉글랜드의 건설자로 간주하며 대왕(Alfred the Great)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민족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크게 이질적인 두 나라가 서로 접경하고 있으니, 사실 장기적인 평화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잉글랜드 왕국도 아직 왕위 세습조차 확립되지 못할 만큼 부족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당시 잉글랜드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다. 왕을 선출하는 회의체를 위탄게모트(Witangemot, 현인賢人 회의)라고 불렀는데, 비슷한 시기 한반도 신라의 화백제도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 귀족 회의 기구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위탄게모트에서 영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지만, 그건 마치 원시 공산주의에서 현대 공산주의의 뿌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위탄게모트는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부족적인 성격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영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맨먼저 발달하게 된 이유도 영국에 원래 민주적인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이 대륙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데인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굴복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잠재적 위기는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100여 년간 그런대로 유지되던 평화를 먼저 깬 측은 잉글랜드였다. 1002년 잉글랜드의 왕 에셀레드는 잉글랜드 내의 데인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장은 기분이 좋았겠지만, 이 사건은 바로 이듬해 덴마크의 대대적인 역공을 초래했다. 아직 잉글랜드는 덴마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덴마크는 앵글족과 색슨족, 유트족의 고향이었으므로, 잉글랜
드인들은 모국을 상대로 싸운 셈이다. 현재 덴마크가 위치한 유틀란트 반도는 바로 ‘유트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10여 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1016년 스칸디나비아 국왕의 동생인 크누드(Knud, 995~1035)는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20년 가까이 잉글랜드를 지배했지만, 잉글랜드의 관습을 존중해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또한 후기에는 스칸디나비아 왕위를 물려받아 주로 그쪽에 신경을 쓴 탓으로 영국 역사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다.
정작 영국이 영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크누드가 죽은 뒤였다. 크누드는 아들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해 계속 덴마크 계의 왕통이 이어지기를 바랐으나, 그의 아들은 영국보다 덴마크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왕위 하나만 받으려 했다. 그러자 위탄게모트에서는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앨프레드의 혈통인 에드워드(Edward, 1003년경~1066)를 왕으로 선출했다. ‘참회왕’이라는 별명답게 에드워드는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는 등의 종교적 업적을 쌓았지만, 어린 시절 노르망디에서 자란 탓으로 노르망디에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 번번이 왕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웨식스 백작 고드윈의 전횡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외사촌 동생이자 노르망디의 왕인 윌리엄(william Ⅰ, 1027년경~1087, 재위 1066~1087,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Guillaume)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밀약을 맺었다.
1066년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고드윈의 아들로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한 해럴드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마저 이루기로 했다. 위탄게모트를 통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여긴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이를 두고 넘어갈 리 없다. 그해 10월 14일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도버 해협을 건너온 윌리엄은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 단 하루의 전투가 이후 영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여기서 승리한 윌리엄은 해럴드를 앵글로 색슨 계열의 마지막 왕으로 만들고(그는 불과 9개월 동안 재위했다), 새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조는 모두 윌리엄의 혈통이니까 대륙에서 건너온 덴마크계의 후손들이다(18세기부터는 하노버 왕가가 영국 왕실이 되지만 하노버도 북독일이므로 덴마크계와 그리 멀지 않다).
▲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 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가 북부의 땅을 노르만족에 떼어주면서(그래서 노르망디라는 지명이 생겼다) 노르만족은 서유럽에 근거지를 확보하게 된다. 노르망디에서 해협 하나만 건너면 바로 영국인데, 당시 영국은 덴마크 출신의 노르만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에는 어떤 형태로든 노르만 왕조가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