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학의 집대성자
정조(正祖)가 사망하고 노론(老論)이 다시 정국을 지배하게 된 1801년부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뜻하지 않은 유배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유배 기간이 18년 넘게 지속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고독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치권에서 망각되어 홀로 늙어갔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고독한 유배자였지요. 하지만 사상가로서 책을 통해 위대한 대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그는 절대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18년이 넘게 지속된 그의 유배 기간은 오히려 학문적으로 행운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이때 정약용은 기존의 사유 전통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자신의 사유를 가다듬고 숙고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로써 우리는 그가 남긴 방대한 규모의 저술들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836년 그가 타계한 뒤 방대한 그의 저술들은 단지 몇 벌의 필사본으로 남아 세상에 떠도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저술들이 상당히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던 셈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 실학자들의 글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짐작건대, 지금도 아마 어느 시골집의 벽지나 창호지로 사용되어 어처구니없이 소실된 실학자의 글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약용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난 1899년, 우연한 계기로 그의 저술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으니까요.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4월 17일~18일자에, 당시 주필이며 뒷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해진 장지연(張志淵, 1864~1920)은 자신의 논설을 통해 정약용을 ‘아국(我國)의 경제학 대선생(經濟學大先生)’이라고 부르면서 화려하게 부활시킵니다. 아마도 장지연은 정약용의 필사본에서 쇠약해져 가는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ㆍ경제적 개혁정책을 읽어냈던 것 같습니다.
장지연은 방대한 정약용의 저술 가운데 특히 경세학(經世學)에 주목했습니다. ‘경세학’이란 글자 그대로 세상을 경영하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운영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의미의 경세학은 요즘 말로 경제학이나 아니면 정치학, 사회학 정도에 해당되겠지요. 과거 정약용 사상에 대한 연구를 주로 사학이나 정치학, 사회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사회과학적 방면에서 진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지연 이후 정약용은 세상을 구제할 개혁이론의 선봉장처럼 이해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정약용의 사유를 사회과학적인 시선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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