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9:34
728x90
반응형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십자군 전쟁이 진행된 11~13세기는 서유럽의 원형이 생겨난 시대다서유럽 세계가 형성되는 계기는 얼추 세 가지로 잡을 수 있다. 앞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서유럽의 원시적 형태가 생겨난 것이 1차 계기라면, 십자군 시대는 2차 계기가 된다. 마지막 3차 계기는 근대 유럽을 낳은 17세기 30년 전쟁부터 20세기 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란기다. 이 무렵 서유럽 세계는 지역 전체적으로는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각국 내부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서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갈등과 반목 속에서 초기 국민국가로 성장해갔다. 편입생과 재학생이 꾸준히 학업에 열중하는 것은 휴학생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뒤늦게 배움의 필요성을 깨달은 이 휴학생은 바로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10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으로 서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독일은 이후 오히려 교황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처지라는 점 때문에 독자적인 행보에 제약이 많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세 가지 특징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제국이었으나 정작으로 독일에 주어진 것은 신성과 로마뿐이었다. 신성의 영역만 관장해야 할 로마의 교황이 독일 국내의 정치에 사사건건 간섭했으니까. 오토 1세를 배출한 작센 왕조가 11세기 초반에 왕통이 끊어지고 새로 잘리어(saler) 왕조가 들어섰어도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름만 황제일 뿐 잘리어 왕조의 황제들은 여전히 독일 지역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적어도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의 심정은 그랬다.

 

재기를 꿈꾸던 하인리히 4세에게 좌절을 안겨준 사람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였다. 그는 아버지가 거의 꿈을 이루었을 무렵, 교황과 결탁해 아버지를 축출하고 1105년에 황제가 되었다. 이후 그는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과 타협을 보고 종교 문제를 매듭짓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런 타협이 좋지 않았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루이 6세가 교황과 타협을 이룬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오히려 봉건 귀족들의 발언권만 강화시켜준 결과가 되었다(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독일의 귀족들이 프랑스의 귀족들에 비해 신앙심이 높았던 탓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교황이 배경에 불과했으나 독일에서는 교황이 거의 실세였던 것이다. 그런 탓에 보름스 협약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독일 귀족들의 반발을 받아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나, 독일을 위해서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을 것이다.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잘리어 왕조는 이름처럼 대가 잘리었으며,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하나같이 왕권을 강화하고 초기 국민국가를 이루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분권화의 길로 나아갔다(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아내 마틸드는 그가 죽는 바람에 팔자를 고쳤지만).

 

 

신성과 세속의 균형 이 그림은 보름스 협약의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신이며, 그 양쪽으로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다. 요컨대 교황과 황제는 신 앞에서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렇게 신성과 세속이 균형을 이루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세속 군주들이 교회마저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잘리어 왕조의 뒤를 이은 것은 슈바벤에 근거지를 둔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였다. 전 왕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황제 프리드리히 1(재위 1152~1190)는 교황과 다투기 전에 먼저 독일 내의 귀족들부터 교통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백 번 옳은 노선이었다. 그는 강력한 맞수인 벨펜 가문에 남독일의 바이에른을 양도하고, 그 대신 중소 귀족들을 하나씩 제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북으로는 덴마크, 동으로는 폴란드, 헝가리의 봉건 귀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남으로는 부르군트(지금의 오스트리아 동부)가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토 1세 이래로 처음 군주다운 군주가 출현한 것이었다.

 

부르군트를 손에 넣은 프리드리히는 곧바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를 노렸다. 롬바르디아는 독일의 황제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곳, 일찍이 샤를마뉴와 오토 1세 등 역사상의 대제들도 롬바르드 왕을 칭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롬바르디아는 상징적으로 대제의 관문이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교황령의 북쪽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롬바르디아를 점령한 것은 불가피하게 교황과의 충돌을 빚었다. 어차피 독일 황제와 교황은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나 당시는 교황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절정에 달했을 무렵이다(13세기 무렵 교황청의 수입은 서유럽 모든 군주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그전까지 기세 좋게 나아갔던 황제군은 그만 교황군에게 호되게 쓴맛을 보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좌절하지 않았다. 강하면 우회하라. 그는 교황령을 피해 이탈리아 남쪽으로 진출한 뒤 맏아들을 시칠리아의 상속녀와 결혼시킴으로써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다지금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일부이지만 역사는 이탈리아와 사뭇 다르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예로부터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리스 시대에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식민시들이 발달해 있었으며, 포에니 전쟁 중에는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의 쟁탈지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최초의 속주였다가 로마가 멸망하고 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332쪽 참조). 또한 9세기부터는 이슬람이 섬 전체를 지배했으며, 11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콘키스타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여기에서도 국토회복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주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1130년 시칠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 왕국을 세웠다. 그러던 중 불과 한 세대 만에 다시 프리드리히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시칠리아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유럽 강국들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중반에야 이탈리아로 편입된다. 이런 수난의 역사가 시칠리아를 마피아의 고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비록 숙적(교황)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충분한 전과를 올리고 독일로 귀환한 프리드리히는 밀린 숙제를 해결했다. 바로 벨펜 가문으로부터 바이에른을 빼앗은 것이다. 이로써 그는 그때까지 독일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독일을 만들었다. 그런 그가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 3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 객지에서 죽은 것(395쪽 참조)은 어쩌면 독일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연장을 얻는 법인데, 그럴 만한 힘과 자격을 갖춘 프리드리히가 죽으면서 독일의 중앙집권화는 아예 차갑게 식어버렸던 것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위해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또 한 명의 뛰어난 군주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2(재위 1215~1250)는 아버지 하인리히 6세가 죽을 때 겨우 네 살이었다. 호엔슈타우펜의 숙적인 벨펜 가문에서는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오토 4세가 제위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어린 프리드리히는 할 수 없이 외가인 시칠리아로 가서 소년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는 얼마 못 가 숙부(영국 왕 존)를 잘못 둔 죄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제위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존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국 귀족들 앞에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던 그해(1215)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지원으로 오토를 몰아내고, 호엔슈타우펜의 대를 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제위에 오르는 데는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도움도 컸지만, 젊은 프리드리히는 역대 교황들 중 최대의 야심가이자 최강의 권력을 자랑하던 인노켄티우스를 대단치 않게 여겼다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이 종교적 권위를 지니려면 세속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긴 인물이었다. 쉽게 말하면 현실 정치에서도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사이가 좋았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는 결혼 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간섭했으며, 캔터베리 주교 임명 문제로 그의 명령을 거역한 영국의 존은 힘으로 굴복시켰다. 또한 1215년에는 라테란 공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의 고삐를 다시금 죄었다. 그러나 아무리 교황권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세였어도 서유럽의 분권화를 향하는 시대의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친가는 교황과 경쟁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었고, 그의 외가는 이슬람 문화에 젖어 있는 시칠리아였던 것이다.

 

따라서 1227년 십자군 전쟁을 중단했다는 이유로 교황(그레고리우스 9)에게 파문을 당한 사건은 프리드리히에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자극을 주었다(교황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파문은 이미 낡은 무기였다). 그는 이듬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군 왕국을 접수하고 성지를 사유화해버렸다. 여기에 교황이 중부 이탈리아를 침략한 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그곳을 잃으면 외가이자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로 가는 길도 잃게 된다. 분노한 프리드리히는 교황군을 격파하고 중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합쳐 통일 왕국으로 재편했다(로마가 멸망한 이후 800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격리되어 있었으니, 프리드리히의 조치가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다른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이름의 할아버지(프리드리히 1)처럼 프리드리

2세도 혹시 샤를마뉴-오토로 이어지는 대제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독일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면 그의 정책은 당연히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일개 왕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다(제국은 애초부터 없었는데도), 제국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은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정부에는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직속 관할 하에 있는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정치와 경제를 모두 직접 통제하는 한편, 독일 귀족들에게는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독립과 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앞서 샤를마뉴나 오토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전통이 미약한 제국은 강력한 군주들이 연속으로 등장해야만 제국의 골격을 유지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1250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죽으면서 황제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제위를 물려받은 콘라트 4세는 교황은 물론 독일의 귀족들과도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칠리아로 들어가 시칠리아의 왕에 만족했으나 그마저도 몇 년 못 가 죽고 말았다. 이로써 100여 년을 존속하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끝났다. 독일의 귀족들은 시대를 역행해 분권화의 길로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 자치권을 부여받은 터이므로 아예 이 기회에 각자 자신의 영지를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전까지 독일 지역 전체의 관심사를 함께 논의해야 할 경우 느슨하게나마 공동 운명체의 의식을 가졌던 귀족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리하여 독일은 본격적인 영방국가(領邦國家) 체제로 접어들었다그러나 독일은 시대를 역행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하는 서유럽 세계에서 독일은 이탈리아와 더불어 서유럽의 그늘을 이루었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이 모두 국민국가를 이룬 뒤에도 분열 상태로 존속하다가 19세기 후반에야 통일을 이루고 처음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앞으로도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자주 나오겠지만, 19세기까지 그 이름들은 국호가 아니라 지역명일 뿐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한 이후 약 20년 동안 독일은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대공위(大空位, Interregnum) 시대를 맞게 된다. 물론 공위라고 해서 실제로 황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황가가 없이 다시 옛날처럼 귀족들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간 데다 황제도 이름만 내걸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심지어 1257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기 꼭두각시 후보들을 내세웠다. 교황 지지파는 영국 왕 헨리 3세의 동생인 리처드를 독일 황제로 밀었고, 다른 귀족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0세를 황제로 선출한 것이다(서유럽 왕가들은 일찍부터 통혼을 통해 서로 얽히고설킨 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졸지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은 막상 자신이 황제로 있는 나라에는 거의 가보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된 독일 귀족들은 1273년 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아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의 문을 열었다(그러나 이때 왕조가 시작된 것일 뿐이고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황위를 세습하게 되는 것은 15세기 중반부터다).

 

 

예루살렘의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서 파문을 당하자 오히려 성지로 달려가 예루살렘 왕국을 독차지해버렸다.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셀주크 제국의 술탄 카밀과 평화조약을 맺고 악수하는 장면이다. 이교도와 강화하는 데 교황의 승인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프리드리히에게 교황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스칸디나비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