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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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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못지않게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베리아라면 바로 에스파냐, 8세기 초반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 이슬람 문명권의 일부로 편입된 지역이 아니던가? 그리고 곧이어 9세기에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시칠리아와 더불어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이 지배하는 유럽으로 남아있던 곳이 아닌가? 그 이슬람이 이제 서유럽 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니! 지중해 동쪽 끝에서 날아온 승전보는 지중해 서쪽 끝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이슬람이 에스파냐의 전 지역을 지배한 게 아니었다. 마르셀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이슬람군을 격파한 뒤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로 물러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이슬람 식민지를 건설했다. 물론 북부도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슬람에게 밀려난 에스파냐인들의 터전이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지만 피레네를 넘어간다고 해도 그 북쪽은 프랑스의 아키텐, 제집에서 쫓겨난 철새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줄 텃새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반도 북부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했고, 그런 배수진의 자세가 효과를 보아 이슬람은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에스파냐인들은 옛 서고트족, 한때 용맹을 떨친 게르만의 강성한 민족이었으니 이슬람이 어쩌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반도 북쪽 끝의 산악 지대로 도피해 아스투리아스라는 작은 왕국을 세우고, 남부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해 살아가는 무기력한 동포들을 비난하며 재기를 꿈꾸었다. 서유럽이 중세의 안정기 속에서 서서히 발전을 이루는 동안 이슬람은 그에 반비례해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서고트의 후예들은 하나둘씩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스투리아스는 레온으로 확대 재편되었고, 레온에서는 새로 카스티야가 분리되어 나왔다. 이미 그 동쪽에는 일찍이 샤를마뉴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가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해 있었다. 바야흐로 독립의 계절이었다. 카스티야가 생겨날 무렵 나바라에서 갈라져 나온 바스크인들은 그 동쪽에 아라곤 왕국을 세웠다. 또 그 동쪽의 바르셀로나에는 이미 백작령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도 독립의 계절풍을 타고 자연스럽게 미니 왕국으로 성장했다. 이로써 11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피레네 산맥 남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섯 개의 왕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문명의 도시 코르도바 에스파냐 남부의 코르도바는 로마 시대에 창건된 도시지만 이슬람 지배기에 크게 발달했다.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과 쌍벽을 이루는 서방의 보배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리스도교권으로 수복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두 문명의 흔적이 공존하는 도시다.

 

 

그 나라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십자군이 조직되기 이전이었다. 때마침 코르도바의 식민지 정부에서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그들은 잃은 영토를 되찾고 이교도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기 위해 일어섰다. 비록 나라는 다섯이지만 같은 그리스도교권의 형제들이므로 공동 전선을 펴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멀리 동쪽에서 날아온 십자군의 승전보는 이들에게 더욱 큰 자신감을 주었다. 이들은 일제히 이슬람을 압박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했다. 선봉에 선 카스티야는 레온을 병합하고 반도 중부 마드리드 일대까지 손에 넣었으며, 아라곤은 사라고사를 정복하고 바르셀로나를 병합해 서열 2위를 유지했다. 또한 카스티야에서 분리되어 나온 일파는 남쪽으로 치고 내려가 포르투갈 왕국을 세웠다. 이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서로 경쟁하듯 레콘키스타에 주력해, 마침내 십자군 전쟁이 끝날 무렵인 13세기 후반에는 코르도바, 세비야, 발렌시아 등 반도 남부까지 모조리 두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제 이슬람은 반도 남단의 그라나다만 겨우 유지하는 형국이 되었다(그라나다는 15세기 말에 에스파냐의 영토로 수복된다. 800년이나 이슬람이 지배했기에 그라나다에는 특히 이슬람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다)레콘키스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에스파냐인들이 열심히 싸운 덕분도 있지만, 이슬람 제국이 현저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3세기 초 이슬람 제국은 아바스 왕조가 유명무실해지고 셀주크튀르크가 흥기하면서 혼란에 빠진 탓에 유럽의 먼 서쪽 식민지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레콘키스타는 이슬람 제국을 상대로 한 게 아니라 에스파냐에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싸운 것이었다. 급기야 이슬람 제국은 1258년에 아예 멸망하고 만다. 에스파냐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방에서 몽골 원정군이 침략해왔기 때문이다. 본국이 무너지자 에스파냐의 이슬람교도들은 더욱 힘을 잃었으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는 커녕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라나다는 그 사투의 결과로 얻은 생존의 장소였다.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에스파냐는 비로소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에스파냐가 서유럽 왕가들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뒤늦게 서유럽 세계에 동참한 탓에 이 지역에는 봉건제가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봉건적 발전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중세의 상당 기간을 허송세월했으니 에스파냐는 서유럽의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 걸까? 그러나 근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그랬어도 그 당시에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서유럽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지중해 무역에 동참할 처지가 못 된 덕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서쪽의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대항해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후발 주자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에스파냐의 십자군 정식 십자군의 역사에 등재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인 성전도 있었다. 그림은 에스파냐의 이슬람 세력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토로사 전투에서 승리한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8세의 모습이다. 이때부터 에스파냐에서는 그리스도교 세력이 힘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레콘키스타가 시작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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