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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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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이베리아 반도와 더불어 십자군 시대에 서유럽 세계로 편입된 곳은 영국이다. 1066년 노르망디 공으로서 영국 왕이 된 윌리엄 1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앵글로색슨 시대의 관습과 제도를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일단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의 성가신 제도 개혁 같은 것은 원치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한 가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하들의 논공행상이었다. 자신을 믿고 바다를 건너와 해럴드를 물리치고 영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노르망디 출신 가신과 기사 들만큼은 어떻게든 배려해야 했다.

 

윌리엄은 무엇으로 공을 논하고 상을 주었을까? 물론 토지다. 신천지를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굳이 기존의 앵글로 색슨 귀족들이 가진 토지를 빼앗지 않더라도 개국 공신들에게 줄 토지는 남아돌았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줄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것도 아주 쉬웠다. 익숙한 방식을 채택하면 된다. 윌리엄은 토지와 더불어 그 토지에 속한 농민들까지 나누어주었다. 봉토와 농노가 생겨났으니 이것은 바로 대륙(주로 프랑스)의 봉건제다. 윌리엄은 당시 영국에 별로 퍼지지 않았던 봉건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이것으로 영국은 중세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 신고를 마친 셈이다.

 

그러나 대륙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성장한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도입되고 실시된 경우이므로, 아무래도 대륙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는 왕권이다. 프랑스에서는 옛 프랑크 시대의 귀족과 신흥 귀족이 자연스럽게 봉건 영주로 변신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봉건제를 확립했다. 따라서 영주들 간에 서열은 있었으나 특별히 한 명의 영주가 압도적인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그 결과 왕권은 보잘것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영국의 윌리엄은 처음부터 정복자의 지위이고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조의 개창자라는 자격으로 명령을 통해 봉건제를 실시한 것이었으므로 같은 봉건제라 해도 프랑스의 왕보다 훨씬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윌리엄의 왕권은 프랑스의 왕만이 아니라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도 강력했다. 또한 그는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더 넓은 왕실 직속 토지와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첨단의 봉건제가 도입됨에 따라 영국의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은 급속히 사라졌다. 구시대의 유물인 위탄게모트는 폐지되었고,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전국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전국의 행정과 사법을 관장했다. 영국은 이제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중앙집권 체제의 봉건 왕국이 된 것이다.

 

 

영국 귀족들의 사냥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팔자가 늘어진 사람은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영국의 왕은 같은 시대 대륙의 어느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힘센 봉건 영주일 뿐 정치적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영국은 귀족들이 각자 자기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귀족들의 세상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후 영국에서 귀족들 중심의 의회가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룬다. 그림은 영국 귀족들이 사냥을 즐기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직 영국은 대륙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은 어디까지나 노르망디 공이 정복한 지역일 뿐이었으므로, 이를테면 대륙의 어느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힘센 봉건 영주일 뿐 정치적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노르망디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가진 것(권력과 재산)만으로 치면 영국의 왕은 프랑스의 왕보다 강력하고 부유했으나, 지위의 면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슬람에서 해방되어 새로 서유럽 세계에 편입된 에스파냐의 왕들보다도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의 왕으로서도 그런 서열을 별로 굴욕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덴마크의 크누드가 그랬듯이, 윌리엄은 영국보다도 자신의 원래 소유지인 노르망디에 더 관심이 컸고, 이후의 영국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륙에서 볼 때 아직까지 영국은 서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고, 문명의 오지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 대륙의 인식은 엉뚱한 문제를 낳았다. ‘노르망디의 지배자가 영국의 왕이 되므로 노르망디의 왕은 자동적으로 영국 왕이 된다.’

 

이게 프랑스 귀족들의 생각이었다(이렇게 영국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영국이 서유럽에 편입되면서 그 가치가 예전보다 높아졌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 왕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은 물론 조상들의 고향인 노르망디도 영국 왕실의 소유였다. 이런 시각 차이로 인해 노르망디를 둘러싼 분쟁의 불씨는 점점 커져갔다.

 

1128년에 프랑스 서부의 앙주 백작 조프루아는 정복왕 윌리엄의 손녀인 마틸드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고, 마틸드는 그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인 데다 3년 전에 죽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미망인이었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인데, 어떤 정략이 숨어 있었을까? 앙주 가문은 10세기부터 노르망디 남쪽을 영지로 갖고 있었는데, 가세를 키워 12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의 유력 가문으로 떠올랐다. 당시 영국 왕 헨리 1(윌리엄 1세의 아들)는 앙주 가문의 힘을 빌려 노르망디를 지킬 마음을 먹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혼맥을 구축하는 것이다. 헨리는 때마침 싱글이 된 딸을 앙주 가문의 며느리로 보냈는데, 그녀가 바로 마틸드였다. 덕분에 앙주 가문은 노르망디를 거저 얻게 되었으니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헨리가 후사도 없고 후계자 지명도 하지 않은 채 죽자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헨리의 조카 스티븐은 재빨리 공석인 왕위를 물려받는 데 성공했으나, 바다 건너 노르망디에서 마틸드가 노려보고 있었다. 젊은 남편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마틸드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영국은 노르망디보다 훨씬 넓고 군대도 강했으나, 노르망디는 엄연히 영국의 본국이자 모국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영국 귀족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사병들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스티븐은 마틸드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국이 노르망디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런던의 시민들이었다. 싸움을 방관하고 있던 런던 시민들은 마틸드가 영국을 우습게 여기고 거드름을 떠는 태도에 격분해 그녀의 대관식을 육탄으로 저지했다. 애초부터 영국에 눌러 살 생각은 없었던 마틸드는 영국 왕위를 순순히 포기하고 노르망디로 귀환했다당시 마틸드의 별명은 여황제였다. 독일 황제의 미망인인 데다 프랑스 유력 가문의 상속녀, 게다가 영국 왕위 계승권까지 쥐고 있었으니, 권력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유럽 왕실들이 통혼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프랑크가 분열될 때부터 따지면 9세기부터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성행하는 것은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이 사건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노르망디는 영국 왕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앙주 가문의 것이 되었다. 둘째, 스티븐의 왕위는 인정되었으나 그의 가문으로 후사를 이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 이제 영국 왕위는 어떻게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154년 스티븐이 죽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조프루아와 마틸드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제 앙주 가문은 정식으로 영국 왕가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헨리의 아버지인 조프루아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새 왕조의 개창자는 조프루아가 되었을 것이다. 조프루아는 자기 투구에 금잔화의 가지(planta genista)를 꽂고 다녀 플랜태저넷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그게 새 왕조의 이름이 되어 영국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 왕조가 생겨났다(또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새 왕조의 이름을 지은 경우다)플랜태저넷 왕조는 앙주 왕조라고도 부른다. 사실상 이 무렵에는 영국에 앙주 왕조가 생겼다기보다는 앙주 왕조가 영국을 차지했다고 말하는 게 옳다. 즉 잉글랜드는 앙주 왕국의 일부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덴마크 혈통으로 출발한 영국 왕실에는 이때부터 프랑스의 혈통이 섞이게 되었다. 윌리엄 시대에 봉건제도가 이식된 데 이어, 플랜태저넷 왕조의 성립으로 영국은 대륙의 국제 질서에 포함되면서 유럽사의 한 바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후부터는 특히 프랑스의 역사와 맞물린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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