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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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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을 때, 또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조토가 새로운 사실성의 세계를 화폭에 구현하고 있을 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납치하고 아비뇽에 자기 마음에 맞는 새 교황청을 열었다. 이 아비뇽 사태는 당시 추락 일로에 있던 교황권이 몰락하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가 출범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중세 사회에 통합성을 부여해온 로마 교황청은 이제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렇잖아도 교황청의 간섭을 싫어하던 서유럽의 군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실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예 접수하는 방법을 구사했고, 영국은 적국인 프랑스의 교황청을 거부하고 나섰으며, 독일은 북이탈리아 자치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교황청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신성이 세속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분열된 세속은 통합의 중심이자 상징인 신성을 마음대로 주물렀고, 마침내 분리시켜 버렸다.

 

1377년 교황청은 70년간의 오랜 아비뇽 시절을 끝내고 일단 로마로 복귀했으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우선 프랑스는 교황청을 휘하에 거느리던 맛을 잊지 못했다. 더욱이 교황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추기경들 중에는 프랑스계가 상당수 있었다.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프랑스계 추기경들과 로마계 추기경들은 교황 선출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칼싸움이 아니니 승자가 명확할 수 없고, 승자가 없으니 각자 자기 뜻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양측은 각자 한 명씩 교황을 선출했으니, 이제 교황은 두 명이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못 되어 교황청은 아비뇽과 로마 두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Schisma)이었다.

 

 

두 교황을 둘러싼 패싸움 아비뇽 시대에 한 번 크게 금이 간 교황의 권위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그림은 아비뇽과 로마에서 각각 교황을 세워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교황이 둘이므로 유럽의 군주들도 두 패로 나뉘어 패싸움을 벌였다. 영국ㆍ독일ㆍ헝가리는 로마 교황을, 프랑스 나폴리 스코틀랜드 카스티야ㆍ아라곤은 아비뇽 교황을 밀었다.

 

 

교황청이 두 곳이므로 서유럽 각국이 줄 서는 곳도 두 군데가 되었다. 프랑스는 당연히 아비뇽 교황청의 편이었고, 여기에 에스파냐의 왕국들이 가세했다. 아직 백년전쟁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영국은 프랑스의 반대편인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고 나섰고, 여기에 독일이 힘을 실어주었다(독일의 영방군주들은 제국이 약화되고 영방국가 체제가 되면서 더욱 로마 교황청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세속의 권력들이 달라붙었다면 혹시 스러져가던 교회의 권위와 권력이 되살아났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분열이 더 오래 지속되어 교회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1417년에 새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즉위하면서 교황청의 분열은 해소되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봉황이 꼬리를 잃으면 닭이 된다. 꼬리를 잃은 교회는 한때 봉황이었다는 기억만 믿고 형편없이 타락해갔다. 성직자들은 무너져가는 교회의 권위를 찾기보다 헌금함에 더 관심이 컸고, 성서보다 장부를 더 가까이 두었다. 중세에는 교회가 타락하면 그때마다 수도원이 일어나 해결해주었다. 수도원 운동은 그래도 교회 자체 내에 개혁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한 시대에는 수도원도 마찬가지로 부패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제기된다면 개혁이지만 밖에서라면 비판이 된다. 교회 바깥에서는 점차 교회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높아졌다.

 

 

마녀사냥 종교의 시대답지 않게 중세에는 온갖 주술과 미신도 성행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와 마녀다. 이들은 원래 민간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말하자면 무당이나 돌팔이 의사에 과했는데, 교회가 위기에 처한 15~16세기에는 부패한 교회를 변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히 여성은 악마와 계약하고 성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고 화영을 당했다. 그림은 1549년 테르담에서 마녀여섯 자매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판은 학자들의 몫이다. 최초로 교회를 비판고 나선 사람들은 지식인들이었다. 대분열이 있기 전에 이미 퍼드 대학의 교수인 위클리프John Wyelife (1330년경~1384)는 권력을 가졌다면서도 세속의 재산에까지 탐욕을 부리는 교회이중성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렇게 제도권 교회를 통째로 거부고 나면 어디서 신앙의 근거를 찾을까? 그것은 바로 성서였다. 는 교회가 아니라 성서 안에 신앙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음을 민중 설교회에서 널리 설파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교황이 직접 그에게 징계를 내리려 했으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을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불렀다. 누가 누굴 파문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위클리프는 그래도 교황청의 관할권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의 인물이었지만당시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왕권 강화와 교회 재산에 욕심이 있었으므로 위클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위클리프가 그런 과감한 교회 비판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정치적 지원을 받은 데다 영국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전통적으로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곧이어 대륙에서도 비슷한 비판자가 나왔다.

 

프라하 대학의 교수와 교회의 수석사제를 지낸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2년경~1415)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교회의 가르침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의 주장은 위클리프와 다를 바 없었으나 교황청에서는 후스를 더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다. 교황청의 앞마당인 보헤미아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뿐 아니라, 후스는 교황청의 주 수입원 중 하나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1412년 후스는 교황 요한네스 23세가 나폴리 토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돈을 내면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는 중세 초기부터 있었던 종교적 관습이었으나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폭넓게 이용되었다. 당시에는 전쟁에 나가면 죽을지 살지 모르는 데다 교회 권력이 절정기에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효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가 면죄부를 활동 자금이자 주요 치부 수단으로 삼으면서 면죄부의 효능은 사라졌다. 후스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나설 무렵에는 이미 일반 민중도 면죄부를 별로 믿지 않고 있었다를 팔려 하자 민중을 동원하여 격렬히 반대했다. 격분한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심지어 그를 낳은 프라하 시까지도 파문해 문자 그대로 저주받은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을 시켰다.

 

하지만 후스는 죽었어도 그의 망령은 계속 보헤미아를 떠돌았다. 후스를 추종하던 프라하의 시민들은 1419년 교회의 잔인한 처사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보헤미아의 농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는 곧장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는 여러 차례 기사단을 파견했는데, 그 이름은 또다시 십자군이다. 그들로서는 이단을 처단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농민군은 이름만의 십자군을 무찌르고 오히려 보헤미아를 넘어 독일 동부 지역까지 진출했다. 깜짝 놀란 교회 측은 태도를 바꾸어 화해에 나선 끝에 간신히 사태를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강경파인 독일의 룩셈부르크 왕조가 몰락하고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오랜만에 다시 합스부르크 왕조가 제위에 복귀하게 되었다.

 

 

신앙은 불에 타지 않는다 처음에 후스의 요구는 종교개혁이었으나 점차 정치적 요구로 바뀌었다. 결국 교황의 미움을 산 그는 그림에서처럼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만 불에 탄 것은 그의 육신뿐이었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순교로 여기고 오히려 그의 사후에 더욱 반역의 불길을 높이 피워 올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개혁과 비판의 차이

독일의 문제

루터의 허상과 실상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기묘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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