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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독일의 문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독일의 문제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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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문제

 

 

바깥의 비판자를 처형해 급한 불은 껐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개혁이 필요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교황청의 추기경과 수백 명에 이르는 서유럽 각국의 주교, 수도원장, 신학자 들은 교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도원 운동이 구해주었던 것을 생각했다. 이제는 재야인 수도원도 제도권못지않게 타락했으니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중세에 수도원이 한 역할을 수행할 새로운 개혁 기구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런 문제를 놓고 계속 논의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개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종교회의, 즉 공의회를 상설 기구로 만들어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는 데 합의를 보았다. 공의회에서 공의회를 상설화하자는 희한한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교황에게 리더십을 빼앗기면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 후유증은 엉뚱하게 나타났다. 그 기회를 이용해 각국은 자국 내의 교회를 국가 차원에서 통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로지 교황만 있을 뿐 국적이 없던 교회들은 이제 새로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어온 교회의 통합성은 완전히 깨어지고 신성의 영역은 세속의 영역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교회의 고삐에서 풀려난 서유럽 각국은 일제히 왕권 강화에 나섰다. 그 결과가 바로 16세기부터 시작되는 절대주의였다.

 

그러나 새로운 추세에 동참하지 못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바로 독일과 에스파냐였다(이탈리아는 남부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두 왕국, 중부의 교황령, 북부의 자치도시들로 분열되어 있어 독일만큼의 국가적 정체성도 없었으므로 논외다), 두 나라는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로마 교황청에 한사코 매달렸다. 대분열 시기에는 로마 교황청(독일)과 아비뇽 교황청(에스파냐)으로 나뉘어 대립한 두 나라가 어떻게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Maximilian , 1459~1519)는 가문과 제국을 함께 부흥시키는 방책으로 통혼이라는 고전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통혼 정책은 룩셈부르크 왕가 때부터 독일 황제들이 즐겨 사용해오던 것이었는데(그 방법으로 보헤미아를 합병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아예 이것을 가장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삼았다.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통혼 정책으로 네덜란드로부터 알자스와 부르고뉴를 획득했고, 에스파냐와 보헤미아, 헝가리의 상속권도 확보했다. 또한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제위를 세습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의 은총을 받은 가문이라면서 오스트리아 가문이라 부르고 1453년 오스트리아 공령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후일 오스트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우선 그 자신은 부르고뉴의 상속녀 마리아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챙겼고, 마리아가 죽은 다음에는 밀라노 공국의 지배자인 스포르차 가문의 딸과 재혼했다. 또 자신의 딸과 아들은 에스파냐의 왕자와 공주, 손주들은 헝가리의 왕자와 공주에게 각각 결혼시켰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는 에스파냐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유럽 최대의 왕가로 떠올랐다. 막시밀리안 자신은 프랑스의 반발에 부딪쳐 통혼의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그의 손자로 다음 황제가 된 카를 5(Karl , 1500~1558, 재위 1519~1556)는 독일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왕이라는 두 개의 공식 명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밖에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시칠리아, 네덜란드 등의 왕국과 공국 들을 거느리면서 합스부르크 세계 제국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다(에스파냐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이며, 재위 기간은 1516~1556년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떠오르자 가장 크게 반발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사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François , 1494~1547, 재위 1515~1547)는 막시밀리안이 죽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위 세습을 막기 위해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가 카를 5세에게 밀려 낙선한 바 있었다. 일곱 명의 독일 선제후들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횡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프랑스의 왕에게 제위를 허락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왕이 독일 황제 선출에 뛰어들 만큼 당시 유럽 왕실의 통혼 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카를 5세는 선거에서 이겼으나 여전히 프랑스가 두려웠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름만 그럴듯할 뿐 제국에 어울리는 중앙집권력은 없었다(합스부르크 제국이란 물론 편의적인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연장이다). 따라서 그가 전통적인 연대 세력인 교황에게 접근한 것은 당연했다.

 

 

고래 싸움의 새우 문화와 정치는 비례하지 않는 걸까? 르네상스를 꽃피웠음에도 북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무주공산처럼 남아 있었다. 급기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는 교황 선거전의 연장전을 북이탈리아에서 치르기까지 했다. 그림은 1527년 프랑스군과 합스부르크군이 피렌체에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변수가 있었다. 황제의 의도는 그랬어도 독일 영방국가 군주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영방국가들에 대해 지니는 영향력은 휘하의 왕국이나 공국 들에 비해 훨씬 뒤처지는 수준이었다. 영방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방국가의 군주들 중에서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들이 있었으니 당시 독일 지역의 정치적 지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위를 세습하게 되자 선제후들의 위상은 애매해졌다. 무엇보다 금인칙서 이래 행사해오던 황제 선출권이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은 프랑스 못지않게 영방국가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결정타를 가한 것이 바로 카를 5세의 친교황 정책이었다.

 

교황청의 젖소인 것도 모자라서 교황의 발까지 씻어주려는 건가? 때는 바야흐로 도약의 시대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을 마치고 서둘러 국력 강화에 나섰고, 심지어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에스파냐에서도 대서양 항로의 개척이 결실을 보기 시작하면서 만년 후진국의 탈을 벗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잖아도 독일 지역의 경제를 좀먹는 근원인 교황청에게로 복귀한 것은 영방군주들의 반발을 넘어 분노를 샀다. 그러나 더 큰 반발과 분노는 지배층보다 피지배층이 품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강력한 정치권력이 없는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도 자치도시의 바람이 불어 경제 번영의 시대를 맞고 있는데, 유독 독일 지역만이 중세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중세의 농노들, 즉 일반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과 폐해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바로 교황청에 우유를 대는 당사자가 아닌가?

 

합스부르크 영토를 제외한 독일 지역에서는 모순의 집적이 점차 거대하고 파괴적인 바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중세적인 지역의 가장 중세적인 요소에 대한 반대, 즉 종교개혁이었다.

 

 

누더기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영토가 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한 누더기 제국이었다. 지도는 카를 5세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에스파냐, 플랑드르, 이탈리아, 중부 유럽 등지에 널리 분산된 것을 보여준다. 급기야 카를 5세는 독일 지역을 포기하고 황제 대신 에스파냐 왕을 택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개혁과 비판의 차이

독일의 문제

루터의 허상과 실상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기묘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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