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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기묘한 종교개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기묘한 종교개혁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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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한 종교개혁

 

 

대륙을 휩쓴 종교개혁의 바람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영국을 대륙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것은 강이 아니라 바다이듯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 전혀 다르게, 아주 기묘한 동기에서 시작되어 기묘한 과정을 거쳐 기묘한 결과를 낳게 된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의 문을 연 헨리 7세는 새 왕조의 개창자라는 자격으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대륙보다 먼저 절대주의가 발달했다). 그가 닦아놓은 기반은 그의 차남으로 왕위를 계승한 헨리 8(Henry , 1491~1547, 재위 1509~1547)의 시대에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권력에서는 대륙의 어느 군주도 부럽지 않았던 헨리 8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형이 일찍 죽어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왕자 시절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수인 캐서린과 약혼했고, 왕위에 오른 직후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그의 형 아서가 결혼 생활 1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진정한 이유는 캐서린의 친정이 당시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 최고의 부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였기 때문일것이다. 아버지 헨리 7세도 에스파냐 왕실의 며느리를 원했을 테고, 헨리 8세 본인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나이도 여섯 살이나 연상인 데다 미모도 아니라는 것은 괜찮았다. 문제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다(실은 두 아들을 포함해 여섯 아이를 낳았으나 딸 하나만 살아남고 다 어릴 때 죽었다). 다른 시대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유럽 각국에서 왕권이 강화되고 있던 16세기였다.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나 에라스뮈스 등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폭넓은 교제를 통해 첨단의 학문과 소양을 기른 데다 거칠고 호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캐서린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한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에스파냐와의 돈독한 관계가 필요했으므로 헨리 8세는 개인적 불만을 눌러 참았다(프랑스는 백년전쟁 이후 스코틀랜드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면서 영국을 괴롭히고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뒤늦게 유럽 그리스도 교권에 합류한 탓에, 또 사활이 걸린 대서양 항로 개척을 위해 로마 교황청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스파냐 왕실을 처가로 둔 만큼 헨리 8세는 대륙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루터파에 단호히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는 책까지 직접 써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얻었다.

 

 

헨리 8세의 여섯 아내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궁색할 듯싶다. 무려 여섯 왕비를 둔 데다가 그것도 형수였던 첫 번째 왕비를 빼면 불과 2, 3년을 살지 못하고 계속 이혼하거나 아내를 처형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영국의 록그룹 예스의 키보드 연주자 릭 웨이크먼이 1972년에 발표한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라는 솔로 앨범의 재킷이다. 오른쪽의 두 왕비는 릭 웨이크먼이 가리고 있다.

 

 

하지만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끝내 그의 결혼 생활을 종국으로 몰았다. 그는 아들을 얻어야 했고, 아내는 이미 마흔이 넘었다. 일단 헨리는 아내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교회법에 따르면 살아 있는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는 교활하게도 형수와의 결혼 자체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교황청에 탄원했다. 물론 캐서린은 이혼할 마음이 없었고, 교황청도 이혼을 허락할 마음이 없었다.

 

법이 허락하지 않으면 법을 바꿀 수밖에 없다. 헨리는 1531년에 캐서린과 이혼하고 이듬해에 앤 불린이라는 궁녀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당시 영국 사교계에서 인기가 높았다)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유토피아의 작가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자 대법관직을 사임하면서 항의를 표시했다. 평등과 사유재산 폐지라는 진보적인 사상을 주장한 그로서도 헨리의 행동에는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헨리의 눈 밖에 난 그는 2년 뒤 헨리의 왕위 계승법에 선서하기를 거부했다가 런던탑에 투옥된 다음 처형되고 만다. 이제 이혼을 법으로 정당화할 차례다. 하지만 교황은 그의 이혼과 재혼을 승인해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교리로도 불가능한 데다 에스파냐 왕실의 반발도 걱정이었다. 게다가 1516년부터는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로스 1세가 에스파냐의 왕으로 있었다. 그는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카를 5, 교황청의 최대 후원자가 아니던가?

 

사실 교황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이나 승인을 필요없게 만드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니까. 1534년 그는 의회에서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통과시켰다. 무엇의 수장이라는 걸까? 바로 종교의 수장이다. 그는 영국 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는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대륙에서 일고 있던 국가 교회 체제의 절정이었고, 비잔티움 제국이 무너진 이후 사라진 황제-교황 체제의 부활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영국 국교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우리 사회에는 대한성공회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어 있다이런 탄생의 배경을 가진 만큼 영국 국교회는 종교나 신앙 문제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의 개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도 영국 국교회는 한동안 중심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1553년 캐서린의 딸로 왕위에 오른 메리 여왕이 영국 국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귀시켰다가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또다시 분리시켰다. 이후부터는 영국 국교회가 계속 독자적으로 존속하게 되지만, 애초부터 가톨릭과 종교적 차이는 없었으므로 영국 국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 교파 가운데 가장 가톨릭적인 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때에 따라 구교와 다른 신교를 모두 탄압했다(사실 영국 국교회는 어찌 보면 근대의 문턱에 어울리지 않게 고대적 제정일치로 복귀하려는 것이었으며, 영국이기에 가능한 기묘한 종교개혁이었다). 이런 문제점은 나중에 청교도 박해로 이어지고, 아메리카에 청교도들 이 이주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교황청에서 종교적으로 분리된 이상 두려울 게 없다. 헨리는 후속 조치로 영국에서 거두어가는 교황청의 수입을 차단하고, 수도원을 모두 해산한 다음, 그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마음껏 호기를 부린 것과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앤 불린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궁실 내의 알력으로 결혼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내를 처형했으며, 이후 네 번이나 더 결혼했다가 실패했다(앤 다음에 결혼한 제인 시모어에게서 아들 하나를 겨우 낳았다). 하지만 불린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은 얼마 뒤 엘리자베스 1(Elizabeth , 1533~1603, 재위 1558~1603)로 왕위에 올라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헨리 8세의 과감한 결정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국 역사에 지극히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종교개혁은 영국에서처럼 국왕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듯이, 대륙의 종교 문제는 중세에 서유럽 문명의 오지였던 영국에 비해 훨씬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대륙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회오리가 종교전쟁으로 번지면서 근대 유럽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개혁과 비판의 차이

독일의 문제

루터의 허상과 실상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기묘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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