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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칼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칼뱅)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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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농민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루터파 군주들은 반루터파 군주들과 약간 다른 행동을 취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그들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프랑스와 영국에서처럼 국가 체제 안으로 포함시켰다. 때마침 카를 5세가 독일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작업은 더 쉬웠다. 카를 5세는 1521년 루터를 추방한 직후 에스파냐로 가서 10년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 왕의 명함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외가인 에스파냐에 더 애착을 가졌다(그러나 그가 에스파냐에 오래 머문 이유는 당시 오스만 제국이 동방 진출에 나서 오스트리아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05쪽 참조).

 

독일(오스트리아)로 돌아온 카를 5세의 눈에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행동이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그는 즉각 의회를 소집해 그들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루터파 군주들은 카를 5세에게 강력히 저항하며 항의서를 제출했다. 여기서 항의하는 사람’, 즉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 나온 프로테스탄티즘(신교)은 훗날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종파가 된다.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황제파와 루터파는 실력대결에 들어갔다. 1546년 양측은 본격적인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루터파 군주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파에 맞섰으나 아직 물리력에서는 한 수 아래였다. 이듬해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대승을 거두자 갓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곧 사어가 될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센 군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스부르크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한 그가 황제파에서 이탈한 것이다. 영향력 있는 영방이 빠져나가자 양측은 대뜸 호각을 이루었다. 결국 지루하게 끌던 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절충적으로 마무리된다.

 

 

항의하는 자들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독일의 군주들도 가톨릭과 루터파로 양분되었다. 그림은 1529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의회 장면이다. 여기에는 황제 카를 5세와 많은 제후, 주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카를은 루터파 군주들을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교파를 지칭하는 이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항의의 보람은 있었다. 루터파는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교파로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종교의 선택권은 지배자, 즉 군주에게만 있었고, 군주가 선택한 종교는 그 영방국가 내에서 무조건적으로 관철되었다. 그렇다면 군주가 선택한 종교를 거부하는 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있는 남독일은 가톨릭으로 남았고, 북독일의 영방국가들은 대부분 루터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은 것은 루터파 하나뿐이었다. 다른 교파들이 모두 제외되었다는 것은 계속 불씨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종교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전례를 낳았다. 그래서 곧이어 유럽 전역에 종교전쟁의 회오리를 부르게 된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가톨릭에 유리한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종교전쟁의 마무리이자 그 절정인 30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분란의 도화선이 된다.

 

루터파 이외에 다른 교파라면 무엇일까? 루터가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지 불과 수십 년 동안 유럽 각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가 생겨났다. 일찍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이단 문제를 논의하던 325년 이래로 가장 다양한 교과(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이단)가 득시글거렸다. 1000여 년 전 첫 공의회는 처음 교리를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던 만큼 쉽게 이단을 규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 로마 가톨릭에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으로 몰면 오히려 정통이 위태로워질 참이었다. 이단이라기보다는 신흥 교파라고 보아야 했다. 그 신흥 교파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신조어의 내용을 채우게 된다.

 

종교개혁의 불씨는 루터가 피워 올렸지만, 공교롭게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신교 개혁가들은 대부분 루터와 견해가 크게 달랐다. 사실 그것은 당연했다. 루터는 가톨릭의 부패가 현실의 정치 발전(특히 독일 지역의 정치)을 저해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종교개혁가라기보다는 정치개혁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루터를 계승한 개혁가들은 정치적 이념보다 종교적 측면을 더 중시했다. 그중 한 사람이 스위스의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했다츠빙글리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루터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1516년부터 독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516년이라면 루터가 반박문 사건을 일으키기 1년 전이므로 그의 주장은 앞뒤가 들어맞는다. 이는 곧 당시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유럽 도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피워 올린 사람을 루터 하나로 국한하는 게 잘못임을 말해주기도 한다(더구나 루터가 처음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루터보다 훨씬 성서주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심지어 교회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체성사도 폐지할 것을 주장했으니, 순전히 종교적인 측면에 서 보면 로마 가톨릭에 루터보다 더 심각한 이단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루터처럼 강력한 군주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데도 교회에서 그를 어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츠빙글리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개 토론회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영방군주의 비호를 받았고 영방국가 중심의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츠빙글리는 자치도시의 시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츠빙글리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이렇게 시민적 토대 위에서 신학자와 성직자, 일반 시민 들까지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개혁 토론회를 열었기에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다른 지역의 도시들에서도 그의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진정한 종교개혁의 창시자는 루터가 아니라 츠빙글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츠빙글리에 뒤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나선 인물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의 견해에 가까웠지만, 도시 당국의 지지를 받은 츠빙글리와는 달리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종교개혁을 주창했다(루터와 츠빙글리는 일종의 국가 교회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닮은 점이 있다). 개인적 배경에서도 그럴 만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면서도 프랑수아 1세의 반동 정책을 피해 제네바로 망명한 뒤 종교개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칼뱅의 새로운 교리에서 핵심을 이룬 것은 도덕과 규율이었다. 그는 가톨릭이 부패한 이유가 상층(교회)에서는 도덕이, 하층(시민)에서는 규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도덕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타락한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훈련과 교육을 통해 거듭나게 해야 한다. 이를 전담하는 교회 기구로서 칼뱅은 장로제를 제안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중요한 교회 기구가 되어 있다. 또한 시민들의 규율을 회복시키려면 금욕적이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강조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중세의 수도원 운동에서 늘 주장해오던 금욕적 생활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중세에는 신앙이 곧 생활이었으므로 종교적 명령이 통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아무런 대가나 혜택이 없는데 스스로 금욕이라는 고통을 사서 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칼뱅은 그 혜택을 만든다. 참된 신앙생활은 신에게서 구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다. 물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칼뱅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다. 그는 현세에서의 생활에 이미 신의 뜻과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이미 신이 예정해놓았다. 이것이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예정설이다.

 

이제 천국에 가기 위해 기존의 교회를 통하지 않아도 된다. 칼뱅의 사상은 강력한 힘과 매력이 내포되어 있는 만큼 순식간에 폭넓은 지지 세력을 얻었다. 유럽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제네바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심지어 칼뱅을 프로테스탄티즘의 교황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가 거둔 성공은 루터나 츠빙글리처럼 정치 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지 않았기에 더욱 가치가 컸다. 특히 그의 예정설은 신흥 시민층과 상인들을 위주로 하는 중산층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가르쳤지만(그러면서도 사제들은 부자였다), 칼뱅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칼뱅의 가르침을 믿는 시민층은 머잖아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다. 장차 그들은 인류 역사상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체제, 자본주의 사회를 낳게 된다19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칼뱅의 이 예정설이 자본주의를 낳은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칼뱅 자신은 세속적인 성공(이를테면 돈을 많이 번다든가, 기업을 일으켜 성공한다든가)을 중시하지 않았으나, 그의 예정설은 세속적인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타락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은 물론 예외가 되겠지만, 도덕적인 방법으로 세속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오히려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당시 도시의 상인들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성공이 얼마나 가능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넘어 종교전쟁이라는 험한 싸움이었다.

 

 

믿음의 척도는 성공 칼뱅의 교리는 가톨릭에서 경멸을 받은 상인들의 입지를 크게 강화해주었다. 세속에서의 성공이 바로 신의 낙점을 받았다는 징표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림은 플랑드르 화가 쿠엔틴 마시스의 작품인데, 장사로 번 돈의 무게를 달고 있는 상인 부부의 모습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개혁과 비판의 차이

독일의 문제

루터의 허상과 실상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기묘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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